제160화 - “흐아아암.”
시문두하는 기지개를 켜고 난 뒤에 눈을 비비면서 샤를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나른한지 반쯤 비몽사몽이었다.
그런 놈에게서 강자로서의 압도적인 여유가 느껴졌다.
“흐아아아암. 벌써 몇 번이나 시간이 돌아갔군. 날 여러 번 죽였나 보지?”
“그래. 근데 안 죽더라고.”
“당연하지. 이 몸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가믈란 행성의 불세출의 천재이며 여신을 죽이고 남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이자 신인 시문두하이니라.”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위대하다고 소개하면서도, 자신감과 자만심이 가득 차 있는 말투.
‘그런 것치곤 개복치처럼 죽더라.’
샤를은 그 말을 꺼내지 않고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허공에 떠올렸던 주문을 그대로 발사한 것.
폭풍 같은 불꽃이 몰아치며 시문두하가 잠들어 있던 침대를 그대로 박살 내버렸다.
“쯧쯧. 참을성이 없군. 내 계획을 이렇게 방해할 자가 나타나리라고 한 번쯤은 생각했었지. ‘그년’은 꽤 강력하고 귀찮은 능력을 갖고 있었거든.”
박살난 침대 아래에, 운명의 셉터는 없었다. 샤를은 문득 생각이 들어, 시문두하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갖고 있군.’
아무리 궁전 내부를 뒤져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시문두하의 ‘본체’가 운명의 셉터를 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 시간의 흐름 밖에서 나타난 암살자여. 이제부터 진짜 힘을 보여다오. 그렇지 않으면 넌 죽는다.”
시문두하가 허공에 손을 올리자 엄청난 숫자의 도구들이 날아왔다.
‘뭐야?’
샤를은 그것들이 전부 혼자서 움직이고 있던 잡다한 도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가 상당히 많으니, 대충 보아도 천 단위가 넘었다. 시문두하는 그 도구들을 허공으로 끌어모은 뒤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내 검들은 다 어디 갔지?”
샤를은 문득 서쪽 궁전의 금은보화가 넘쳐나는 창고에서 검 같은 것들을 회수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거 내가 턴 것 같은데.”
“이 도둑을 봤나!”
그 말과 동시에 시문두하의 잡동사니(?)가 날아왔다. 손을 뻗어서 정다면체를 꺼낸 다음, 봉황을 소환했다.
-날아오는 저 잡동사니들, 전부 불태워줘.
-흐음. 첫 번째로 시키는 일인가?
봉황은 나타나서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는 행동을 취하더니, 그 숨결을 내뱉자 전방이 전부 불꽃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할 일을 끝마쳤으니 난 되돌아가겠다.
등장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퇴장하는 봉황을 보면서 샤를은 한숨을 쉬었다. 봉황에게 후불로 건네어 주겠다는 유물을 주지 않는 이상 이런 식으로 단발적인 요구에만 응할 것 같다.
“한 수는 있구나. 그럼 두 번째는 어떨까?”
저 멀리 머리 위에서 무언가 거대한 존재감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천장이 박살 나면서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나타났다.
퀘에에에에에에에!
엄청난 진동이 울려 퍼지며 천장의 보석이 박살 나면서 무언가가 짓쳐 들어왔다.
골드 드래곤이 금빛 비늘을 번뜩이면서 떨어져 내렸다.
-자, 내 애완 드래곤이다!
샤를은 시문두하를 깨우기 전에 미리 침대의 주변 바닥에 깔아뒀던 나비들을 일제히 날아오르게 만들고 그것으로 동시에 백기사를 소환했다.
이번에 소환된 백기사는 대검을 집어넣고 창을 들고 있었다. 그의 기원이 용 살해자에서 온다는 것을 안 이상, 샤를은 드래곤을 처음 볼 때부터 백기사를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을 든 백기사는 거대한 발톱을 휘두르는 골드 드래곤의 형체를 뛰어넘어 놈의 어깨에 창날을 박았다.
끔찍할 정도의 괴성이 울려 퍼지고 귀가 얼얼해지는 진동이 퍼졌다.
-이야, 잘 싸우는 구만.
“너 말이야. 너무 느긋한 거 아니냐?”
-이 몸은 황제이며 신이로다. 그런 내가 다급해야할 일이 있던가?
그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알료샤의 가위검이 나타났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아서 회전력을 얻더니, 시문두하의 머리를 반으로 베어내고 그 기세를 몰아 시문두하를 세로로 뚝 잘라버린다.
그러나 죽었다는 뜻인 회귀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으로 갈라진 시문두하는 이상하게도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거 맵구만. 매워. 이런 한 수를 숨겨두고 있었나?
“…….”
-좀 멋있게 싸워보려고 했건만. 내 무기도 빼앗고, 함정도 깔아뒀군. 내 애완 드래곤은 저 용살해자에게 넘겨주고 말이야. 이러면……추잡하게 싸워야 하지 않겠나?
그 말과 동시에 시문두하의 발끝이 이상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 주변으로 검은색 물웅덩이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웅덩이에서 나오는 시커먼 덩어리 같은 것이 발끝에서 시작해서 발목을 타고 올라와 그의 가슴께에 이르렀다.
둘로 나뉘었던 그 시체는 점점 끓어오르는 무언가처럼 변해갔다.
백기사를 불러올 수는 없었다. 저 멀리서 거대한 용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게 본체인가?”
-아직 미치지 않는다니, 필멸자 중에서는 대단한 자로구나. 하긴 그러니 그년이 암살자로 만들어 보냈겠지.
시문두하의 인간 몸뚱이는, 이제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형태에 이르렀다.
아래쪽엔 꿈틀거리는 무언가……에서 팔과 다리들이 튀어나왔다. 마치 사람의 형상을 취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결과물같이 생긴 것들이 끝도 없어 보이는 암흑 위에서 계속해서 올라왔다.
샤를은 놈의 아래, 검은색 웅덩이에서 바닥에서 끝도 없이 기어 나오는 검은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안력에 집중해서 그 어둠을 꿰뚫자, 커다란 팔 하나가 보였다. 그 팔에, 운명의 셉터가 들려 있었다.
‘저기 있었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한다.’
꿈틀거리면서 자신의 거대한 몸집을 불리고 있는 시문두하를 보면서 이미 인간을 끝도 없이 벗어난 것을 느꼈다.
‘시문두하는 자신을 신이라고 칭하지만, 진짜 이계의 신들만큼 강력한 존재는 아니야.’
오스굿에게서 운명의 셉터를 빼앗았을 뿐이고, 심층의 이계에 존재하는 신들을 생각해보면 그들보다는 몇 급이나 떨어지는 신의 위격을 갖고 있었다.
-자, 이제 널 죽이고 고문을 시작해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급의 존재인 것은 분명했다.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다.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치는 데다, 놈을 죽인다고 해도 셉터의 힘으로 과거로 되돌아가 버린다.
압도적인 위용을 간직한 거대한 검은색 팔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샤를은 놈이 깨어나는 동안 준비된 대량의 나비들을 소환했다.
나비들 속에서 크라켄의 촉수 하나가 튀어나와서 검은색 팔과 엉겨 붙었다. 거대한 두 존재가 힘겨루기하는 것을 보면서 정다면체에서 해수 두꺼비의 힘을 빌려온다.
그 틈에, 샤를은 처음 목적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목적지는 검은색 웅덩이였다.
-크하하하. 뭐냐? 죽으러 오는 거냐? 이거 실망이로군.
웅덩이 아래로 샤를이 파고들자, 검은색 타르 같은 것들이 그의 몸을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걸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무저갱 같은 아래쪽에, 보통이라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어떤 ‘공간’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몸이 둔해지면서,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숨쉬기도 불가능해진다.
-내 뱃속으로 어서 오너라.
‘그렇군. 여기가 놈의 뱃속인가.’
그때, 샤를은 알료샤의 가위검을 앞으로 들이밀면서 움직였다. 모노클이 조종하는 가위검은 그 날을 두 개로 나뉘어서 중간에 공간을 남겨둔다.
‘절단.’
쭉 찢어진 공간이, 어둠을 잘라내고 그 아래에 작은 공허를 만들어냈다.
샤를은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곳에는 검은색 타르는 없었지만, 끔찍한 공허가 펼쳐져 있었다.
압도적인 어둠, 그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과 공포가 몰려왔다. 그리고 속삭임이 들려온다.
〔이런다고 성공할 것 같아?〕
〔넌 실패하고 죽는다.〕
〔그리고 널 잡아먹은 시문두하는 석판의 힘까지 흡수해, 현실에 강림하게 될 거다.〕
〔그리고 끔찍한 미래가 닥쳐오겠지.〕
공허에 깃든 무언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머릿속에 끝없는 우울증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끝없는 공포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공허라는 공간 안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들어오기만 해도 미쳐 버리는 그 공간에 발을 들이미는 미친 짓이었다.
샤를도 온전히 정신을 보전하고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는 이 공허라면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고 그건 적중했다.
공허를 타고, 더 깊숙한 아래로 내려가다가 곧이어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팔을 발견했다.
점점 느려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면서 샤를은 손을 뻗었다.
운명의 셉터를 손에 쥐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곧 이 거대한 손아귀가 운명의 셉터를 놓지 않는 것을 느꼈다.
부수고 제거하거나 할 틈이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개들을 훈련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집착적으로 어떤 물건에 손을 대는 개들은, 똑같이 생긴 다른 흥미로운 장난감을 보여줬을 때, 그것을 잡으려고 쥔 물건을 놓고 새 물건에 손을 댄다.
‘흥미로운 물건? 이건 어때.’
괴테의 만년필을 심상 세계에서 꺼내와서 허공에 던졌다. 운명의 셉터나 괴테의 만년필이나 운명을 조작하는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예상대로 거대한 손아귀는 운명의 셉터를 놓아버리고, 괴테의 만년필에 손을 뻗었다. 이것도 봉인재단에서는 봉인물로 지정될 만큼 강력한 유물이다.
‘지배의 권능.’
별로 사용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샤를의 몸을 감싼 검은색 타르들이 처음에는 신체를 느리게 하는 것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의 피부를 녹여버리고 있었다.
[운명의 셉터.]
[분류 : 유물]
[개요 : 오스구나아아텔이 석판 조각의 힘을 사용해 창조해낸 유물의 일각. 시공간을 조작하며 운명을 뒤트는 능력을 갖고 있다.
능력 :
-공간치환 : 시공간을 조작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것으로 뒤바꿀 수 있다. 공간치환이 이뤄지는 동안, 그 공간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사망회귀 : 체크포인트를 원하는 곳으로 지정하고 죽음에 이르렀을 시 체크포인트로 되돌아갈 수 있다.
-????? : ?????
부작용 : 지속적인 영성 소모.]
그때, 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샤를을 잡아먹고, 곧이어 흡수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시문두하는 뒤늦게 샤를이 노리던 것이 운명의 셉터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네노오오오오오오옴! 무슨 짓을 한 거냐!?
거대한 타르에 빨려 들어가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샤를은 미소를 지었다.
[사망하셨습니다.]
[운명의 셉터 효과로 체크포인트로 되돌아갑니다.]
“사실 암살자가 아니라 도둑이었어.”
-이자시이이이익!
눈을 뜨니, 샤를은 운명의 셉터를 쥔 채 처음의 그 장소로 되돌아와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 주체가 샤를 자신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박이 통했군.’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인간 형태의 시문두하는 평범한 인간 수준이었는데, 진짜 모습을 드러내자 말도 안 되는 괴물로 변해버렸다.
샤를은 회중 시계를 꺼냈다. 만약 놈이 자신의 배 속에 있던 운명의 셉터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면, 곧바로 몸을 일으키면서 괴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5. 4. 3. 2. 1.
“잠들어 있나?”
기가 막히는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만심에 가득 찬 놈이었다.
-쭈인? 뭐라고?
-기다려봐, 설명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