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 샤를은 파기나레코르에게 간단하게 여태까지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는, 시문두하를 감시하게 한 뒤에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남쪽의 입구로 계속 걸어갔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복도가 화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붉은 비단이 깔려 있었으나, 가면 갈수록 장식은 사라지고 오직 시커먼 복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석재로 되어 있는 데 벽면은 물론, 바닥이나 천장도 시커먼 색이라서 걷고 있으면 마치 끝없는 어둠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서, 설마 이 끝에 그 아마조네스들이 있는 건 아니겠지?’
숲속의 여사냥꾼이 살던 마을로 들어갈 때도 이런 느낌과 비슷했었는데.
그 우려는 조금 더 걷자 다행히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끝에는 박살 난 복도가 있었다. 복도 끝에는 마치 나뭇가지의 끝인 것처럼 저 끝에 둥지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고 나머지는 우주 공간이 보였다.
입구에서 걸어오면 보이는 천장 쪽에 보이는 우주 공간처럼 영롱하고 오색 빛깔로 빛나는 별들이 알알이 박혀 있는 공간이 보인다.
공기가 전혀 없을 것 같은데도, 별로 숨쉬기 어렵거나 춥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근데 왜 둥지가 있지?’
샤를은 계속해서 걸어가다가 곧 둥지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새가 수 천마리는 들어갈 수 있겠어. 아, 설마!?’
이 둥지는 그 황금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의 레어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 있었다. 조금 전에 태양을 등지고 저 멀리 날아가 사라졌던 점. 그리고 이 복도에 천장도 없고 바닥도 듬성듬성 파괴되어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둥지 안에는 뭐가 있을까?’
다가가려다가 문득 샤를은 섬뜩한 느낌을 받고 둥지 앞에서 걸어가지 않았다. 저 멀리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안에 알이 있어.’
보통 드래곤의 알에 손댔다가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한 인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샤를은 곧 둥지를 무시하고 중앙으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조금 빨리 왔는데 이유가 있었다.
‘파기나레코르가 시문두하가 깨어날 것 같다고 얘기했었지. 그게 내 체감 시간으로는 30분가량이었어.’
샤를은 이번 회귀 때에는 처음부터 회중시계로 시간을 재고 있었으므로 시간을 헷갈릴 리는 없었다.
-어? 쭈인 왔어?
-그래.
-나보고 죽이라매?
-놈이 언제 깨어나는 지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야.
지금까지 딱 15분이 지났다. 15분을 더 기다려서, 놈이 깨어날 것 같으면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다.
틱. 틱. 틱.
초침이 딱 정확하게 30분에 위치한 순간, 시문두하가 끄으응 거리면서 기지개를 켜려고 했다.
-쭈인!
-쏴!
탕탕탕! 화르르르륵.
이번에도 무방비한 상태에서 습격당한 시문두하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사망하셨습니다.]
[운명의 셉터 효과로 체크포인트로 되돌아갑니다.]
역시, 언제나 거기에 있다.
‘썩을, 운명의 셉터.’
그러다가 문득, 샤를은 오히려 이게 기회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거 잘만하면…….’
아무래도 이 회귀 꿀을 좀 더 빨아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시간 전쟁에 관한 내용이 적힌 책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분류 구분 안 하고 싹 다 심상 세계에 털어 넣었다.
몇몇 책들은 심상 세계로 집어넣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대부분의 책은 쏘옥 들어갔다.
“흐음. 이 책은 안 들어가네.”
『시간 전쟁에 대한 기록서.』
예전부터 시간 전쟁에 대해서 알아둬야 할 필요성을 느꼈었다. 샤를은 이미 이 전쟁이 고대 시절 신들끼리 벌인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지식이 들어 있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흐음.”
읽어보면, 신들끼리 패를 갈라서 서로 싸운 것 같다. 그 원인이 되는 대상은 ‘시간’
“시간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신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였군.”
신이라는 존재들은, 시간마저 소유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신들은, 각자 이계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고 독특한 형태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리고 동맹을 늘리고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한쪽이 다른 쪽에게 전쟁을 선포하자, 마치 세계대전처럼 줄줄이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기에 이른다.
이 시간 전쟁의 끝에, 승자 측은 패자 측을 몰살하고 그들의 ‘개념’을 빼앗아와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추가로 24시간을 쪼개어, 서로가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그렇군.’
샤를은 바다왕과, 수몰왕을 떠올렸다. 원래 물을 상징하는 것은 바다왕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수몰왕이 시간 전쟁에서 승리한 측에 소속되어 있었고, 수몰왕은 바다왕에게서 ‘물’이라는 개념을 빼앗았다.
샤를이 가진 정다면체에 봉인된 해수 두꺼비는, 수몰왕에게 복종하지 않고 바다왕에게 복종했었으니, 유물에 봉인되는 것으로 처벌을 받게 된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전대의 신들에게 붙어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처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메트로폴에서 난리 치는 4대신들도 시간 전쟁에서 승자의 측에 있었군.’
샤를은 그쯤 읽었으면 된 것 같아, 책을 내려놓았다.
“근데 넌 뭔데 대체 안 들어가는 거냐?”
막, 딱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마도서라면 그럴듯하다. 어떤 인지를 초월한 위대한 존재에 대한 기록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이건 아니다.
『맛있는 포도를 기르는 방법.』
“이거 왜 안 들어가?”
책을 펼쳐서 읽어보니, 어떤 식으로 포도를 기르는지에 대한 내용이 쭉 적혀 있었다. 뭐, 겨울에도 온실에서 포도를 기르는 방법이라던가, 온도를 얼마나 맞춰야 원하는 방식의 당도를 조절할 수 있다던가, 이걸 사용해서 포도주를 담그는 방법 등이 적혀 있었다.
“뭐야?”
샤를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걸 심상 세계에 집어넣으려고 굳이 낑낑대야 하나 싶다가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었다. 온갖 비상한 책들이 가득한 이런 공간에, 턱하니 포도를 기르는 방법이라니.
정상적인 책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쭈인, 얘 깨어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응? 그럴 리가. 아무튼 죽여!
샤를의 회중시계는 아직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깨어나려면 5분이 남았을 터인데.
-이미 죽였따해.
정신을 차리니 샤를은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와 있었다.
“역시, 그렇게 편리할 리가 없지.”
아무래도, 샤를이 회귀를 반복할수록, 시문두하가 깨어나는 텀이 짧아지는 모양이었다.
샤를은 그 즉시 달려서 중앙 홀에 도착, 파기나레코르에게 시문두하가 깨어나면 죽이라고 설명하고 다시 동편에서 책을 쓸어 담았다.
포도 농법에 관한 책은 쭉 읽어서 완전히 머릿속에 암기했다. 혹시 모르니까. 어쩌면 암호같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서쪽으로 가서 금은보화가 가득찬 공간을 보고 점프, 금화 위에 착지한다.
“이야. 이거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금화 속을 헤엄치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딱딱한 기분이군.
샤를은 중얼거리면서 금화 속에 손을 대서 심상 세계로 욱여넣었다. 산더미 같은 보물이 샤를의 몸에 닿자마자 증발하듯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 방식으로 서쪽 창고를 작살 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운명의 셉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역시 남쪽인가.’
-쭈, 쭈인 얘 깬다!
-쏴버려 쏴버려!
-이미 했어!
시계를 재자 정확히 5분 더 일찍 깨어났다. 샤를은 다음 루프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달려서 동쪽과 서쪽의 문제를 해결하곤, 다시 남쪽으로 내달렸다.
“드래곤은, 없는 것 같군.”
황금빛 그 드래곤은 샤를이 루프를 한 시점에서 몇 분 되지 않아 하늘을 날아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러니 이 레어 안은 당분간은 상대적으로 무방비 상태일 것이다. 드래곤보단 약한 파수꾼이 안을 지키고 있을 테니.
‘용아병은……. 없나?’
샤를이 둥지에 발을 들여놓는데도 파수꾼은 일절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드래곤들이 자신의 레어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방어 장치를 잔뜩 설치해 두는 것에도 불구하고.
샤를은 둥지 중앙에 심장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그란 구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생물의 알이라기보단, 마치 거대한 금속이 살아서 숨 쉬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우주에서 들어오는 빛이 알의 중앙에 있는 핵에 빛을 비춰서 아름답게 보였다.
“용의 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생명의 태동이 느껴졌다. 드래곤이라는 생물은 이계에서도 손꼽히는 무시무시한 존재인바. 그런 존재를 잉태시키기 위한 알은 이 세계의 것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일단 시선을 돌려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셉터는 안 보이는데.”
운명의 셉터가 틀림없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샤를의 예상이 틀렸다. 그럼 어디에 있는 거지?
‘다른 위상에 있는 건가?’
어쩌면 메트로처럼 같은 공간의 다른 위상에 존재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샤를은 그러긴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문두하의 궁전에, 다른 위상까지 겹쳐서 옮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운명의 셉터는 시공간을 뒤바꾸는 능력이 있지. 지금 이 공간은, 다섯 번째로 현대로 치환될 공간.”
거대한 지진이 울려퍼지고, 암모나이트 석판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다섯 번째 순서에 총독부 건물과 시문두하의 궁전이 곧 뒤바뀌게 될 것이었다.
오스굿의 도움으로 샤를은 중간에, 순서를 건너뛰고 제일 마지막으로 온 것이다.
“그럼…….”
몇 가지 선택지가 남는데 샤를은 시문두하가 깔고 잠드는 그 거대한 침대를 떠올렸다.
“결국 깨워야하는 것 같은데.”
일단 샤를은 자신이 루프할 수 있다는 이점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용의 알을 훔쳐 볼까? 어떻게 될지 궁금한데.”
마음속에서 악당 샤를이 외치고 있었다.
‘털?자!’
그리고 오른 쪽에서 천사 샤를이 외쳤다.
‘털!자?’
손을 뻗어서 빛을 쬐고 있는 용의 알을 손에 들었다. 손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오오.”
이 알은, 온갖 영성이 담긴 물건의 재료가 될 수도 있고, 고대의 존재나 이계의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도 될 것 같다.
‘심지어 알을 깨서 먹더라도 능력치를 올려줄 것 같은데.’
용의 알이 이 정도까지 무방비하게 날 가져가라고 외치고 있는데 터는 것이 인지상정.
샤를은, 그 순간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생물의 울음이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다. 우주 공간이 쫙 갈라지면서 마치 웜홀을 만든 것처럼, 허공에서 거대한 금빛 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흐음. 알을 터치하고 나서 거의 30초 만에 나타나는 건가.”
이 정도 텀인 것을 확인했으니 충분하다. 그리고 때마침 파기나레코르가 말했다.
-쭈……
-죽여!
-호오. 반응이 빠르군. 알았다 쭈인.
말하자마자 곧바로 대답하니 파기나레코르가 왜인지 흡족해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사망하셨습니다.]
[운명의 셉터 효과로 체크포인트로 되돌아갑니다.]
샤를은 되돌아오자마자 아스트롤라베를 집어넣고 빠르게 앞으로 달리면서 파기나레코르에게 여태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을 설명했다.
-오? 그래!?
그리고 중앙에 파기나레코르를 두고, 동쪽과 서쪽을 싹 다 털어먹은 다음 남쪽에는 가지 않고 중앙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놈을 깨울 시간이네.”
-난 준비 됐다구 쭈인.
“좋아.”
샤를은 잠들어있는 시문두하를 죽이지 않고, 라지킹 사이즈 침대를 발로 걷어찼다. 드디어 황제를 깨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