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언제 겁먹었냐는 듯 빠르게 감정을 숨긴 데오그란트는 자신의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샤를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살짝 내려보면 옆에는 그가 작업하던 여러 서류가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헥센 가문의 여러 사업체를 관리하는 일 같았다.
‘조금 전 데오그란트가 남긴 충고는 뭐지?’
머릿속에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으나. 먼저 물어볼 게 있었다.
“데오그란트. 당신은 이 저택에 얼마나 오래 있었지?”
“23살 때 왔으니 거의 20년이군요.”
“궁금한 일이 있어서.”
“오?”
데오그란트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인님께서는 혹시 누군가 제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협조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대체 그 보물의 정체는 뭐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도 알고 싶다.”
데오그란트는 말로 설명하려다가 말고 방 옆쪽에 있는 선반에서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출판되었는지 얼마 되지 않은 양장본의 책이었는데 관리를 해둔 모양인지 먼지는 없었다.
제목은 『헥센 가문의 일대기.』 직관적인 단어의 나열이고 특별한 수사도 없었다.
“이 책은 저택의 역사에 대해 기록해둔 것입니다. 가져가서 읽어보시면 궁금증이 해결되실 겁니다.”
“…….”
샤를은 책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데오그란트가 문 앞으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해제하며 말했다.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새벽 5시까지는 나오시면 안 됩니다.”
“왜지?”
“뭔가가 나옵니다.”
“뭔가?”
“말 그대로……. 뭔가 나옵니다. 가끔은 유령이, 가끔은 괴물이. 제 충고를 무시하지 마십쇼.”
샤를은 그대로 떠밀리듯 밖으로 나왔다. 다시 친숙해지기 어려운 어둠이 그를 감싼다.
샤를은 일단 데오그란트의 권고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밤에 뭐가 돌아다니는지 확인은 해봐야겠으나, 당장 하루 이틀 만에 보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헥센 가문의 일대기.』를 열어서 첫 페이지를 읽었다.
[기원전 2세기. 비스타 헥센테르프]
‘기원전이면 고 헤르메스 시대군.’
학자들은 여명기 이전의 세월을 고 헤르메스 시대라고 부르기로 했으므로 비스타 헥센테르프는 고 헤르메스 시대의 말엽에 태어난 셈이었다. 모든 신비가 종말하는 시대.
[비스타 헥센테르프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군인이었다. 형제들과 함께 악명 높은 박해자, 에피마네스를 물리친 그는 높은 위명을 쌓고 난 뒤 그곳에 정착해 새 나라를 건국하려 했으나, 에피마네스의 아들 람세스에게 패퇴한 후 추종자들을 모아 바다를 건너 갈리아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갈리아 지방이라면……이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불리던 이름이군.’
페이지를 넘긴 샤를은 비스타 헥센테르프의 이름을 살폈다.
비스타 헥센테르프는 바다를 넘어오는 과정에서 배로 기어 올라온 인어를 죽이고 어떤 ‘보물’을 얻었는데 그 보물에서는 늘 빛이 났으며 소유자에게 어마어마한 지혜와 통찰력을 주었다고 했다.
그 뒤에 갈리아 지방의 여러 야만인을 격퇴하면서 여명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여왕의 즉위를 도운 3명의 공작 중 하나가 되었다.
헥센테르프 공작가는 그 뒤 거의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져 왔다.
샤를은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서 보물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고 했다. 책에는 보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형태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판의 형태를 하고 있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빛이 나는데 촛불이나 가스등 같은 빛이 아니라 누군가 크레파스 여러 개를 손가락마다 끼운 다음 도화지 위에 쭉 그은 듯한 빛의 줄기가 나온다고 했다.
‘흠 만화의 강조선 같은 느낌으로 빛이 나온다는 건가.’
‘척’하니 ‘착’하고 알아들은 샤를은 마지막으로 사라진 게 언제인지 확인하려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보물의 힘 때문인지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던 헥센테르프 공작가는 마침내 여왕의 위치조차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여명기가 끝나고 암흑기가 될 때쯤 너무 위세가 강해졌다고 판단했는지, 여왕은 헥센테르프 공작가를 반역죄로 몰아서 작위를 몰수한다.
그러나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헥센테르프 공작가는 빠르게 영향력을 잃어버렸고 가문의 성씨도 헥센으로 개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혼란이 일어난 때, 헥센 가문의 사람들은 보물의 관리를 소홀히 해서 찾지 못하게 되었다. 저택 내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없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혼란 도중 분실되거나 누군가 들고 달아났다고 생각했다.
이때가 약 300여 년 전. 에단 헥센이 가주로 있을 때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300여 년 전 서적을 찾아야겠군.”
스스슥. 스스슥.
샤를은 그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소리를 듣자마자 시계를 살폈다. 12시.
허리 뒤쪽 벨트에 꽂아뒀던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귀를 기울이면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
방문 앞에, 무언가 기어 다니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아니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게 겨누면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다가가는 소리와 동시에 스스슥 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샤를이 잠금장치를 풀자 더 빠른 속도로 들린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밖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바로 앞에는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복도의 끝. 반대쪽 모퉁이로 돌아가는 길에 무언가 있었다.
‘방금 소리가 났는데 어느새 저기까지 간거지?’
그건 천장 위에 매달려 있었다. 지저분하고 걸레 같은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양팔과 다리가 있다. 천장에 붙어 있었는데 몸통에는 누더기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는데 검은색이었다.
‘뭐야? 사람인가?’
샤를이 총구를 그쪽으로 겨누자 그것은 어둠 속에서 새카만 입을 벌렸다. 치아는 유독 이상하리만큼 하얗고 빛이 났다.
놈은 무언가 말하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거미의 다리 같은 것들이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기어나와 놈의 얼굴을 뒤덮는 거미들을 보고 샤를은 방아쇠를 당겼다.
“!!”
평소엔 별로 겁이 없는 편인 샤를도 지금만큼은 소름이 끼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먼 거리에, 동요한 상태에서 쐈던 탄환은 당연하게도 빗나갔다.
리볼버의 두 번째 탄환을 쏘려는 찰나 놈은 긴 팔을 벌려서 반대쪽 천장으로 뻗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총의 위험을 알고 있는 듯했어.’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런 게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괴물이나, 영성으로 불려온 하수인은 아닌 것 같았다. 형태를 보아하니 어쩌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샤를은 그 녀석이 사라진 자리에서 무언가 발견했다.
‘비늘?’
검푸른색 비늘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대체 왜 비늘이 이곳에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샤를은 혹시 몰라 비늘을 회수하려고 했다.
근데 샤를의 손 사이로 비늘이 물처럼 흘러내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결국 소득은 없었다.
샤를은 여기서 그놈을 더 쫓을지 말지 생각하다가 곧 그만뒀다.
상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싸우는 것도 무리였고 저택 내부의 구조에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으므로, 지금 쫓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을 보완해야겠군. 여긴 적진이나 다름없어.’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샤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자물쇠를 잠그고 곧바로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일반 함정을 설치하고 마법으로 만든 함정, 알람과 동시에 점술에 대한 방벽도 설치했다.
샤를은 이걸로도 안심이 안 돼서 완전무장을 했다. 베개 아래에 총을 두고 누운 다음 모노클을 쓰고 에메랄드 브로치를 끼고 방 이곳저곳에 강철로 된 장검 몇 자루를 배치했다.
파기나레코르를 옆에 두었으나 여전히 자고 있었다. 샤를은 침대에 누운 채로 선잠을 잤다.
*
‘괴물’은 요즘 들어 기분이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잔뜩 들어왔다.
밤에 복도에 나가도 된다고 허락받은지 꽤 되었지만,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누군가와 마주친 것은 오랜만이었다.
늘 하던대로 천장에 매달려서 돌아다니다가 한 남자와 마주쳤다. ‘아픈 철덩이’를 들고 있는 남자였는데 친근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잘 웃는다. 그래서 인사를 하려고 웃으려고 했다가, 늘 입안에서 기르던 새끼거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탕!
그 사람이 ‘아픈 철덩이’를 쐈다. 빗나갔지만 위험하다는 건 알았다.
나는 친해지고 싶었는데, 왜 사람들은 날 싫어할까?
‘괴물’은 천장 어딘가에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쪽 통로를 통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이 통로에서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방금 전에 총을 쐈던 그 남자도 볼 수 있었다.
그에게 ‘아픈 철덩이’를 쐈지만 이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같지는 않다.
*
두 번째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샤를은 문을 똑똑 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난 샤를은 베개 아래의 총을 쥐고 벽 뒤로 숨기고 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사람은 여전히 표정이 없어 보이는 젊은 하인 한 명이었다.
“매일 아침은 같이 드시겠다고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준비해주시지요.”
“그렇게 하지.”
하인을 내보내면서 샤를은 빛으로 이뤄진 나비 한 마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숲을 향해 날려 보냈다. 숲 끝까지 갔을 때 어떻게 되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씻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밖으로 나오자 피곤한 눈으로 문을 연 유마가 보였다.
“어제 들으셨어요? 그 소리?”
“그래. 들었어. 그건….”
샤를은 어제의 총격에 관해서 유마가 말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이어서 말하려 하자 입을 다물었다.
“그르렁거리던 그 소리……. 대체 정체가 뭘까요? 전 들리자마자 곧바로 귀에 솜을 꽂아 넣었거든요.”
“그르렁거렸다고?”
“예……. 귀를 막기 전까지만 해도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거든요. 응? 형님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샤를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라니? 그가 들은 것은 옷자락이 바닥에 스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소름이 끼치는 무언가가 돌아다니는 소리. 직접 정체를 본바, 그건 벽이나 천장을 붙어서 돌아다니는 원숭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아냐, 아무것도.”
귀를 막고 있었다고 했으니 샤를의 총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이해가 간다.
샤를은 입을 다물고 본관 거실로 향했다. 응접실보다는 작은 본관 거실은, 여러 사람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절로 침샘에 침이 고이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오늘 아침부터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을 봤기 때문에 기분이 잡쳤다.
그 자리에는 헥센 가문의 형제자매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가 함께 모여 있었다.
특히 헥센 가주의 부인, 계모 에스텔라는 샤를을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얼굴을 본 비앙카가 고개를 돌리면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어머어머, 너희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와? 이 식사자리에 끼겠다고? 염치를 알아야지.”
유마는 핀잔을 듣고 주눅이 들었으나 샤를이 대꾸 한마디 없이 식탁에 가서 앉자 눈치를 보다가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어? 지금 나 무시해? 이……”
“그만둬. 곧 아버지가 오신다.”
얼굴이 붉어진 비앙카가 무어라 소리지르려고 하자 첫째인 에드워드가 그녀를 말렸다. 에드워드도 결코 샤를을 좋아해서 중재한 것은 아니었다.
“오빠.”
“무시해. 저놈들이 뭐라고?”
거슬리긴 하지만 상대할만한 가치조차 없다는 식의 취급을 하고 있으니까.
다들 식탁 앞에서 앉아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하자 유마는 드디어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샤를에게 말했다.
“형, 괜찮아요?”
“그건 내가 너한테 해야 할 말 같은데.”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샤를은 유마가 고개를 숙이면서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녀석, 정말 남자 맞아?’
머리만 길러놓으면 영락없는 미소녀였는데. 행동거지도 이 시대의 남성들과는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