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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2화 (2/221)

제2화 - 여태까지 일어났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게임 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마지막 부분은 계시의 석판을 손에 넣기 전의 일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템인 계시의 석판. 이것이 어떤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추적해봐야겠지. 게임이 현실이 되면서 심각한 문제가 수두룩해진다.

첫 번째 문제는 이 게임의 장르가 언제나 배드엔딩으로 끝나는… 끔찍한 크툴루풍 오컬트에 어반물이 섞여 있는 백짬뽕 같은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그걸 129번 이상 반복해서 엔딩을 본 게 바로 연수였다. 앞으로의 미래가 훤히 그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착각일까.

‘운명의 날에 도착하면 무슨 짓을 해도 죽어.’

엔딩이 나는 시점을 운명의 날이라 부른다. 모든 세계가 물로 뒤덮여 죽거나, 온 세계가 불타오르거나, 영원한 밤이 끝없이 이어지거나, 이형의 생물로 조각되거나 등등. 어디로 도망쳐도 소용없었다. 이 세계 전체가 멸망하니까.

그러기 위해선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130번째 엔딩을.

‘그러기 위해서 난 여태까지 게임을 플레이해왔잖아. 거의 도착했어. 130번째 엔딩에.’

연수는 굳게 마음먹고 몸을 일으켰다. 키워드는 분명히 계시의 석판일 것이었다. 129번째 엔딩을 보고 나서 그를 이 세계로 끌고 들어온 매개체라고 볼 수 있는 것.

‘하지만 계시의 석판은 대체 어딨는 거지?’

샤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샤를의 저택. 어디에도 계시의 석판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상태창을 열어봤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상태창만큼은 열린다.

‘열리는군.’

* * *

【제5교단 무명 교단의 교주】

【샤를 헥센】

[스탯]

[신체 5, 정신 7, 행운 6, 계몽 3]

[특성]

[카리스마, 경전 연구가, 냉정함, 비신지체 , ???]

[보유 기술]

〔지배의 권능〕 - 이계에 상주하고 있던 마도사 헤르메스와 거래해 얻어낸 권능. 생물, 무생물 가리지 않고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 정신 스탯에 비례해 최대 지배 개수가 증가한다.

▶현재 지배중인 개체 0

* * *

‘역시 초반 스탯은 괜찮네.’

아직 특수 스탯을 개방하진 못했지만, 전반적인 스탯 수치가 상당히 준수했다. 일반인이 신체 1 정신 1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철인 수준이었다.

거기다 시작부터 특성이 이렇게 많은 캐릭터는 없었다. 심지어 다른 교단의 교주들도 그들이 모시고 있는 사악한 신에게서 ‘씨앗’을 받기 전까지는 별 볼일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카리스마는 말 그대로 남들에게 없는, 사람을 압도하는 어떤 매력의 결집 같은 것이었다. 이걸로 타인과 대화하기만 해도 뭔가 압도적인 감각을 심어줄 수 있게 된다.

경전연구가는 샤를 고유의 특성으로, 경전을 ‘제작’할 수 있으며 이미 제작된 경전을 해석할 수 있다.

고 헤르메스어를 비롯한 여러 고대어를 알고 있는 샤를은 초고대 문명의 경전을 해석하는 것도 가능했다.

냉정함은 말 그대로 냉정함이었다. 패닉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능력치가 웬만하면 고정이었다. ‘열정적인’ 특성이 있을 때 운이 좋다면 본인이 가진 능력의 200%를 발휘하지만 냉정함은 100%에서 떨어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달까.

그리고 비신지체. 이것도 괜찮은 특성이다. 비신지체인 존재는 페널티를 받는다. 다른 ‘기괴한’ 것의 주목을 끌기 쉽고 이끌리기도 쉽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괴이한 것들이 몰려드는 수준.

다만 그 덕택인지 샤를은 신비학에 대한 이해도가 탁월했고 강한 영성을 지녀서 마도사로서의 재능을 얻게 되었다. 나쁜 점과 좋은 점이 공존하는 특성이라고 할까.

다만 ???라고 적혀 있는 것이 좀 의문스러웠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샤를은 저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는 역시 게임인 걸까? 아니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이 세계가 원래 게임이었다거나, 혹은 게임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는 세계인데 게임처럼 누군가 포장했다거나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지금 앞으로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난 이제부터 샤를이 되어야만 해. 현대인 김연수의 말랑말랑한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 세계에서 견딜 수 없을 거야.’

아까 냉정함의 효과로 패닉 상태였던 연수의 마음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은 몸에 정신이 영향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세뇌했다. 나는 샤를이다. 나는 샤를이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는 샤를이었다. 수많은 풀다이브 VR게임은 높은 롤플레잉 기술을 요구했다. 고인물이 된 샤를에게 이런 ‘연기’는 밥 먹듯이 쉬운 일이었다.

이제 샤를이 가진 요소들을 써먹을 시간이었다. 샤를은 기본적으로 마법에 특화된 마도사 캐릭터였다.

신체 능력으로 보면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캐릭터를 했어도 이상하진 않지만 비신지체라는 특성 때문에 그렇다. 샤를은 영성이 강해지고 계몽 수치가 치솟아도 사악한 것에 쉽게 침범당하지 않는다는 장점을 살려 마도사가 된다.

그때 샤를의 눈에 선반 위에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꽤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지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

그것은 서양식으로 장정된 책이었다. 겉장은 검은색, 금색 잉크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특이하게도 금으로 된 잠금장치가 있어서 겉장과 겉장 사이를 잠글 수 있게 해뒀다. ‘파기나레코르’. 그것의 이름이었다.

“놓여 있는 위치는 똑같네.”

이건 샤를 헥센으로 플레이하면서 쏠쏠하게 써먹었던 마도서였다. 프롤로그 이전, 샤를이 어렵사리 꿈속 이계를 탐사하다가 구한 물건. 지배의 권능을 얻기 전까지는 저렇게 선반 위에 처박혀 있었다.

샤를을 플레이하는 대부분의 플레이어에게 이 마도서는 초반 완소 아이템으로 권장된다. 대가를 받고 주문을 가르쳐주는, 살아있는 자아를 가진 마도서였다.

마도서를 꺼내자 사악한 아우라가 풍겨 나왔다. 샤를의 영성이 깨어나더니 이 마도서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영성과 맞닿은 마도서에서 자아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크큭. 날 깨웠는가 인간.

-어 그래.

-원하는 게 뭐지? 마도의 지식을 원하는가?

-음. 그건 아니고.

샤를은 손을 뻗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면 이 마도서에게 지배의 권능을 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건 ‘무생물’이라 난이도도 쉽다.

지배의 권능은 아무런 주문도 의식도 필요 없는 순수한 이능력이었다. 그러니 제물이나 마법 시료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게임 속에서 쓰던 감각을 기억했다. 자, 시작하자.

마도서의 사악한 기운이 샤를의 손과 맞닿자 마치 무언가 침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게임속 세계관에서, 비현실적인 것에 접촉하게 되면, 계몽 수치가 오르기 시작한다.

-무, 무슨 짓이냐?! 인간아!

이대로 계몽이 더 올라가면 환각이 보이고 비이성적인 생각에 침범당하며 신비주의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지만 샤를은 그렇게까지 계몽이 올라가기 전에 마도서를 지배할 수 있었다.

-왕위를 계승……아, 이게 아니지. 널 정화하고 있어.

-뭐?

-순순히 내 것이 되어라!

-크아아아악!

알 수 없는 줄이 마도서로 날아간다고 생각되었고 순식간에 마도서와 그에게 보이지 않는 줄이 연결되어 끈끈한 매듭을 짓는 것이 느껴졌다.

파기나레코르는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엄청난 바람을 일으켰다. 샤를의 머리카락도 창틀 옆에 있던 커튼도 이리저리 흩날렸다.

성공이다.

〔지배의 권능〕 - 이계에 상주하고 있던 마도사 헤르메스와 거래해 얻어낸 권능. 생물, 무생물 가리지 않고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 정신 스탯에 비례해 최대 지배 개수가 증가한다.

▶현재 지배중인 개체 1.

[파기나레코르 – 초고대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집필자 미상의 사악한 마도서……였으나 현재 지배당한 상태. 수많은 주문을 간직하고 있으며 달란트를 사용하면 새로운 주문을 깨우칠 수 있다.]

마도사형 캐릭터인 샤를은 이 파기나레코르를 통해서 주문을 습득하기도 할 수 있으며 주문을 모아둔, 일종의 스펠북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이게 뭐야?

근데 말이지. 이런 기능은 없었는데.

눈앞의 파기나레코르에서 갑자기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고딕드레스를 입은 금발 머리의 소녀가 떠올랐다. 크기는 딱 손바닥 사이즈로 상당히 작았지만, 비율은 평범한 성인 여성 같기도 했다.

“이거 뭐지?”

너무 당황해서 육성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너 이런 기능이 있었냐?

-없어!

상태창의 설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떡하고 요정 같은 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건 아마도 마도서의 자아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게임일 적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마도서의 요정(?)이 튀어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너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지랄 마!

걸쭉하게 욕설을 퍼붓는데 크기가 쪼끄마하니 위협적이라기보다는 귀여운 느낌이다. 아, 안 돼. 잡생각이 계속 들어서 샤를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렇게 변해도 마도서의 기능은 제대로 있는 거겠지.

-그, 그렇다.

-흠. 뭐 됐어. 그럼. 주인님이라고 불러볼래?

-꺼져!

치마를 잡고 얼굴을 붉히는 걸 보고 샤를은 머리를 긁었다. 뭐 어쨌든 지배의 권능이 제대로 먹히는 것을 확인했다.

‘생물을 지배하려면 상대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려 있어야만 가능하지만, 무생물을 지배할 때는 그런 제약이 없지.’

스킬의 툴팁에 적혀 있지 않지만, 무생물을 지배할 때는 조금 더 메리트가 있었다. 이 마도서도 일종의 무생물 취급이라 지배가 쉽다.

-파기나, 마도서를 좀 펼쳐줘.

-파, 파기나?

자신을 부르는 명칭에 당황한 듯했지만 파기나레코르는 명령대로 행했다. 저절로 책이 열렸다. 페이지는 완전히 비어있었다.

-전부 비어있네.

-당연하지. 사용자가 바뀔 때마다 초기화되거든. 주문을 얻고 싶으면 달란트를 내는 게 좋을 거야.

-나 주인님인데?

-다, 닥쳐! 주인이고 뭐고는 상관없어. 원래 마도서의 기능이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

역시 그냥 말로 때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나중에 달란트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비밀 세계의 화폐인 달란트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저절로 얻게 되어있었으니까.

뭐하면 재료를 모아서 직접 제작해도 되고. 과정이 좀 험난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자 그럼 마도서에 관한 건 여기까지 하고.’

샤를은 힐끗 문을 바라보았다. 플로나가 떠났던 문틈이 아주 작게 열려 있었다. 그곳에서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플로나의 스토커적 기질이 여기서 발동되는 것 같다. 샤를은 그걸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플로나. 엿보면 어떡하니?”

“아앗! 죄송해요! 혹시나 샤를 님이 도망가실까 봐.”

“도망? 내가 왜 도망쳐? 너의 스승이 그렇게 나약하게 보이느냐? 자 나를 보아라. 내가 누구처럼 보이지?”

샤를의 특성 【카리스마】가 발동되면서 연수는 자신도 모르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얻게 되었다. 고고하고 오만한, 샤를의 일면이 드러난다.

마치 샤를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자 플로나가 달뜬 숨을 내뱉으면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연수를 향해 말했다.

“하―아아. 교주님. 위대하신 무존자의 화신인 유일한 사도님입니다.”

“그럼?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되겠어?”

“죄송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그렇지. 잘했어.”

마치 잘 훈련받은 강아지를 길들이듯이 샤를은 플로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플로나가 배시시 웃었다.

이런 기괴한 인간관계는 경험해 본 적도 없지만, 이제부터 샤를이 적응해 나아가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그간 교단 내부에 있었던 일을 좀 설명해주겠니?”

“네! 잠시만요!”

잠깐 자리를 비웠던 플로나가 자료들을 가지고 왔다. 가지고 온 것은 현재 교단의 상황에 대한 정리표였다. 재무 상태를 보니 수입과 지출이 형편없었다. 둘 다 형편없어진 이유는 프롤로그 이전의 샤를이 혼수상태인 동안 벌어졌던 일 때문이었다.

“헤헤.”

플로나는 비스듬히 기대서 샤를을 보면서 웃었다. 그간 샤를이 쓰러진 동안은 악몽 같았지만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플로나는 샤를의 비서이자 첫 번째 제자였고 샤를은 워커홀릭이었기 때문에 항상 눈을 뜨자마자 전날의 서류부터 받았었다. 마치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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