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7화>
서울의 어느 호텔.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며 육아에서 해방된 진유리와 내가 스위트룸에 와 있었다.
진유리 말로는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라는데, 솔직히 모르겠다.
언제는 그런 시간 안 보냈나……
“드디어 배가 부르는 것 같아. 봐봐. 볼록해졌지?”
“시기가 됐으니까.”
“뭔가 신기해. 이 쪼그만 곳에 셋이나 있는 게. 비좁겠다…… 헤헤. 엄마가 조심할게~.”
“말로만 그러지 말고, 제발 좀 조심하자. 내가 너 임신한 채로 중국에 갔다는 말 들었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도하 아저씨도 그렇지. 임신한 아이를…….”
“스탑! 스타압! 또 잔소리!! 봄이 아빠, 이러기야? 그 이야기는 묻기로 합의했잖아욧!”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 내려는 내 입을 뻔뻔하게 자기 입술로 틀어막는 진유리.
이것은 불리하면 일단 입술 박치기다.
약았다니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우리 올리는 완전히 나은 거야?”
“말 돌리는 거 봐라.”
“여보!”
“완전히, 라고 말하면 좀 그렇고 그럭저럭 괜찮아. 점점 나아질 거고.”
“애매하게 말하네?”
“애매한 게 사실이니까.”
진유리가 말하는 올리는 올리버의 애칭이다.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며 여기까지 와 놓고, 결국 한다는 소리가 애들 이야기다.
뭐, 이런 점이 유리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올리버가 뭘 품고 있는지는 말한 적 있지?”
“응, 불가사의라고 했잖아. 내기를 해서 소원을 이뤄준다는 가장 신에 가까운 힘. 솔직히 말해 너한테 듣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는 안 돼.”
“그 정도만 이해했으면 충분해, 애초에 인간이 닿기에는 먼 힘이야.”
어떤 자연 현상이 발생하는 원리는 해석할 수 있어도 왜, 무슨 의미로 만들어졌는가…… 근원에 다가갈수록 해석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명확히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들단 말이다.
불가사의라는 힘이 그렇다.
난 이 불가사의를 가장 신에 가까운, 많은 이들이 말하는 ‘기적’이라고 결론 냈다.
올리버의 치료는 이 기적을 억제하는 데서 시작한다.
“마나 암, 정확한 명칭은 ‘권속의 계약’. 이걸 이용해 올리버 안에 있는 불가사의란 불가해의 힘을 묶어 두는 거야.”
갑에는 올리버, 을에 불가사의.
“그렇게 불가사의의 근원을 억제해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적당한 규모의 ‘기적’을 행한다. 이게 대략적으로 올리버가 불가사의를 다루는 메커니즘이지.”
이제껏 내가 올리버랑 했던 조정 작업은 이 권속의 계약을 어디까지 다룰 수 있나, 그 규모를 측정하는 거였다.
“예를 들면 이런 거야. ‘세 번 공격을 피하면 신체가 치료된다.’ 혹은 ‘선제공격하지 않는 대신 마법 저항력이 상승한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계약을 맺는 거야.”
“올리가 매번 말하는 ‘내기’구나.”
“트리거지. 조정된 기적을 발현하는 트리거.”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계약이고, 내기인 것이다.
“스스로 계약을 맺고, 조건을 달성하면 그에 상응하는 기적을 발현한다. 그럼 소모값은? 코스트는 없어?”
“없어. 놀랍게도.”
“와…… 미쳤어…….”
“내가 몇 번 말했잖아.”
봄이, 헤나, 이스마일…… 모두를 통틀어.
올리버가.
“제일 사기야.”
* * *
이스마일의 목검이 쾌속으로 쇄도한다.
검의 궤적이 어둠 속에 빛살을 그려 낸다.
마구잡이로 이뤄지는 검격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정석에 가까운 움직임. 형이나 기세나, 절대 이 나이의 검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러나.
챙-!
막혔다.
일격도, 이격도…… 이번에도, 계속해서.
막히고 또 막힌다.
그것도 올리버의 맨손에.
불가사의
계약 1
무기를 쥐지 않는다.
‘갑’인 올리버가 무기를 쥐지 않는 대신, ‘을’인 불가사의는 그에게 기적을 발현하니.
철인
鐵人
깡-!!
이스마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명히 그는 목검을 들었고, 올리버는 맨손이지만, 쌓이는 대미지는 이스마일이 훨씬 많은 것 같았고, 이는 사실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를 꽉 깨문 이스마일이 힘을 일으킨다.
잔잔한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이스마일을 중심으로 마나의 기류가 동심원을 그린다.
그리고 단단했던 지면이 출렁이더니.
‘물’로 변한다.
성운
변화의 묘
동심원이 닿은 곳의 대지가 전부 물로 변하고, 연무장은 작은 호수가 된다.
그리고 이 호수는 이스마일의 영역.
유일하게 지면을 유지하는 곳은 올리버의 두 다리가 닿는 저곳뿐.
“후…….”
이스마일이 차오르는 호흡을 수습하며 도약했다.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도약해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가 검을 내지른다.
동시에 검격의 반대편 호수에서 물의 창 십여 자루가 생성, 올리버에게 날아들었다.
이후로도 기묘한 형태로 올리버를 노리는 호수.
시동어도 없다.
시전 속도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마나 파동조차 없다.
검술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빠르며, 유연하다.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마치 마법처럼.
“항상 느껴요. 왕자님의 검은 검이라기보다 마법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비꼬지 마!”
깡!
“비꼬긴요. 이렇게 대단한 힘을 어느 누가 비꼬겠습니까.”
“여기에, 너밖에, 더 있냐아!!”
까앙-!
호수의 물도 모자라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진다. 뇌전과 물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서로의 힘을 증폭시켰다.
이도 모자라 다시 성운이 발현, 이스마일의 검이 공간을 ‘변화’시킨다. 분명 정면으로 날아든 검인데 갑자기 뒤쪽에서 나타나고, 좌측으로 내려친 검이 우측 하단을 베어 냈다.
물질 변화에 이른 공간 변화.
하지만.
그럼에도.
올리버의 몸은 여전히 깨끗했다.
“젠장!! 막기만 할 거야?!”
“어쩔 수 없어요. 내기인걸요.”
불가사의
계약 2
공격할 수 없다.
‘갑’인 올리버가 공격을 포기하는 페널티를 끌어안은 대신, ‘을’인 불가사의는 그에 상응하는 기적을 발현한다.
천년 고목
千年 古木
오른손으로 목검을 튕겨 내고, 왼손으로 뇌전을 쳐 냈으며,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물의 채찍을 마른 팔뚝으로 막아 냈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변화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목처럼.
올리버는 고목이 되어 있었다.
변화무쌍한 이스마일의 공세 속에서도 굳건한 천년의 고목 말이다.
그렇게 수십 합 뒤.
먼저 지친 쪽은 이스마일이었다.
지친 이스마일이 검에 기대 숨을 헐떡였다. 이미 호수는 사라지고, 주변을 현혹하던 변화의 묘까지 모두 걷히고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찾은 지금.
폐허가 된 연무장에서 승자와 패자는 분명했다.
주저앉은 이스마일과, 빙그레 웃는 올리버.
“네 능력…… 사기야…….”
“항상 말하지만 엘의 성운은 제 힘과는 상성이 좋지 않아요. 승패는 명확하지요.”
“재수 없는 사기꾼 자식…….”
“이런…… 최고의 찬사군요. 감사합니다.”
“웃지 마. 짜증 나.”
“훗. 이제 슬슬 올라가죠. 저기 ‘저분들’도 언제까지 세워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도 알거든.”
올리버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민다. 피식 웃으며 내민 손을 잡는 이스마일.
싫으나 좋으나 같은 스승을 둔 형제다.
원래 형제란 치고받고 싸우며 크는 법. 생각보다 둘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다음은 안 진다, 사기꾼아.”
“저런. 학습 능력이 0에 가깝군요.”
아마도……
* * *
올리버와 이스마일이 사라진 연무장.
아무도 없는 공간에 하나둘 사람들이 내려선다. 검은 전투 슈트를 입은 사람들.
왕의 검, 집행인들이었다.
근접 경호로 아이들의 안전을 수호하던 집행인들.
그렇게 숙소 주위로 몇 겹의 보안을 갖췄는데, 뜬금없이 두 아이가 숙소를 나오지 않던가.
이 시간에 숙소를 벗어나?
조금 나이가 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들은 겨우 초등학생.
그런데 더욱 그들을 당황시킨 건, 두 아이 중 한 명이 무함마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이스마일 왕자란 것이다.
그때의 충격이란…….
곧바로 상부에 연락하고 상황을 살피는데, 그새를 못 참고 두 아이가 격돌.
믿기지 않는 신위를 보여 주며 연무장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보면서도 믿기지 않군.”
“봤어? 왕자님 마법 쓰는 거.”
“아직도 이해가 안 돼. 그거 마법 맞아? 도저히 마법 같지 않던데.”
“이해되지 않는 건 왕자님 상대였지. 대체 무슨 힘을 쓰는 건데? 야, 넌 알겠어?”
“파악 못 했다. 넌?”
“나도……
“후우, 저 나이에 저 정도 성취가 가능한 거였어?”
“이걸 마왕이 잘 가르쳤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두 분 재능이 미쳤다고 봐야 하나.”
“둘 다 아닐까.”
“마왕의 제자들은 전부 규격 외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이었어.”
“따지고 보면 마스터도 마왕의 제자잖아.”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군.”
“근데, 마지막에 그 말. 우리 두고 하는 말 같지?”
“그런 것 같더라.”
“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잠행과 은신에는 자신 있었던 그들이기에 퍽 자존심이 상했다.
“팀장님, 귀빈들 전부 마나를 다룬다고 하던데 설마…… 다른 자제분들도 저 정도는 아니겠지요?”
“아마 아닐 거다. 저 정도의 천재가 흔할 리 없잖아.”
“최소 둘은 더 있지 않을까요? 제 말은 그러니까…… 오늘 두 분을 제외하고서라도 마왕의 제자가 두 분 더 있잖아요.”
“그렇겠네.”
“맞아. 두 분 더 있지.”
“이름이 박봄과 박헤나라고 했던가.”
“그냥 제자가 아니야. 마왕의 딸들이라고.”
“팀장 생각은 어때?”
“……아마 맞을 거다.”
팀장쯤 되면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듣는다.
마스터인 한준우가 한국에 다녀오거나 할 때 박봄과 박헤나를 언급한 적이 종종 있었다.
아마 공주님이랑 통화할 때였지?
“웃기지도 않더군. 정말 한계가 없어. 당장 아카데미에 입학해도 되겠던데. 저 나이에 저 정도 성취면 나중에는 어느 정도일지 감도 안 잡혀.”
칭찬이 인색한 마스터가 흥분하며 극찬할 정도면 최소 왕자님과 동수, 아니면 그 이상일 것이다.
곤란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상정 이상이다.
팀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경호 계획 다시 짜야겠다.”
“엑?!”
“팀장!”
“선배!! 무슨 말이에요!”
“무리입니다.”
“몇 주 전부터 준비한 걸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꿉니까!”
“시끄러워. 머리 아프니까.”
누가 무리인 거 모르는가.
거리와 동선 맞춰, 주변 지형을 파악해 인원 배치까지.
몇 주 전부터 경호 작전을 세웠는데 이걸 하루아침에 바꾼다니.
그러나 팀장은 확고했다.
“저쪽에서 우리를 파악했다.”
“그게 경호랑 무슨 상관입니까.”
“맞아요. 들켜도 지키면 되잖아요. 막말로 경호원들이 쫓아다닌다는 것 정도는 알 테고요.”
“알지. 아는데…….”
만약에 말이다.
혹시 말이다.
“저쪽에서 우리의 눈을 벗어나려고 한다면?”
이쪽을 인식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얼마든지 이쪽의 시선을 뚫고 도망칠 수 있다는 거다. 귀빈들이 우리의 경호 영역을 벗어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너희들, 감당할 수 있겠나.”
왕이 친히 내린 특명이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임무이며, 목숨을 걸고 성공시켜야 할 명령인 것이다.
근데 귀빈들, 그것도 마왕의 자제라는 최중요 귀빈들을 시야에서 놓친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집행인들이 턱을 떨어뜨렸다.
“에, 에이…… 설마.”
“그, 그 정도까지 하, 하겠습니까.”
“마…… 맞아요! 그래도 전부 도련님들이고 아가씨들인데, 설마 그런 사고를 칠까요.”
“글쎄…….”
팀장의 미간은 여전했다.
분명히 머리는 수하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불안했다.
“……근데 여보, 봄이가 옛날에는 얌전하지 않았나? 헤나도 점잖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랜만에 봐서인가 봄이하고 헤나, 기혁이를 더 닮았더라고. 아니, 외모가 아니라 생각하는 게 말이야. 어디로 튈지 모르겠던데?”
앞서 말했듯, 팀장은 한준우의 곁에서 많은 것을 들었다. 거기에는 좋은 소식도 있었고, 나쁜 소식도 있었다.
하지만 사건사고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박기혁.
마왕이었다.
“응, 농담 아니야. 완전히 판박이야.”
모든 사건 사고의 중심인 마왕.
그런 마왕과 똑 닮은 두 딸.
이 정도면 합리적인 의심 아닌가?
“뭔가 큰 게 올 것 같아.”
결국 팀장은 자신의 판단을 밀어붙였고, 다음 날 경호 인원은 두 배가 됐다.
충분한 인원 충원에, 그만큼 경호 라인도 두텁고 넓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 *
결과적으로 팀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사고를 치리란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다만 틀린 것은, 겨우 2배의 인원으로 이 악동들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점이었다.
“훗. 괜찮은 도전이었어.”
허리에 손을 얹고 우쭐해하는 봄이.
“어림도 없지.”
손을 탈탈 털며 비죽 웃는 헤나.
“……약속 지켜. 두 시간만 노는 거야.”
반쯤 체념한 임현지까지.
“고고고고!”
“쇼핑은 역시 시장이지.”
“천천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