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98화>
‘Super Agent’라는 게임이 있다.
줄여서 S.A
플레이어가 에이전트 대표가 되어 세계 유명 초인들을 영입 및 이적시키며 자신만의 스쿼드(Squad)를 구성해,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임.
여기 은빛나는 S.A의 골수팬이다.
업데이트되는 모든 시리즈를 다 플레이해 본 것은 물론이거니와 옵티멈 채널에서도 게임 방송을 할 정도.
S.A의 유저들은 한 번쯤 꿈꿔 본다. 자신만의 스쿼드, 가장 이상적인 나만의 팀.
전원 수호자로 구성한 스쿼드는 얼마나 강할까?
전열에 ‘검호’를 채워 넣고 후열에 ‘진룡’을 가득 채우면 어떨까?
탱커부터 딜러, 모든 전열 포지셔닝을 소화할 수 있는 검호와 딜러군.
물론 골수 유저인 은빛나도 있다.
전원 검호로만 이뤄진 전열 라인.
탱커부터 딜러, 모든 전열 포지셔닝을 씹어 먹는 검호로 전열을 모두 채워 놓으면 어떨까?
항상 꿈꿔 왔던 팀이었고.
은빛나는 지금, 꿈을 현실로 마주하고 있었다.
“와아…….”
박건이 선두에서 달려 나간다.
그 뒤로 따라붙는 박수혁, 박민지, 박기혁 검호 3남매.
상대 몬스터는 검은 사냥꾼이라 불리는 ‘다크엘프’.
다크엘프들이 거리를 벌리며 화살을 쏘았다. 정령의 가호가 깃든 화살이 유도 미사일처럼 네 사람을 노리는데.
네 사람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찢어졌다.
박건은 망토를 휘날리며 존재를 지우고, 박수혁은 황금빛 광체를 내뿜으며 화살을 쳐 낸다. 박민지는 섬광처럼 화살을 피하며 지나가고, 박기혁은 아예 신경 쓰지도 않고 돌격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에 맞게 다크엘프들을 유린했다.
박건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흑색과 백색의 단검, 흑아(黑牙)와 백아(白牙)를 휘두르며 다크엘프를 베어 낸다. 박투와 검술을 결합한 전투 방식.
때문에 과격하고, 때문에 역동적이다.
관절을 꺾고, 그 자리에 단검을 찔러 넣고, 끊어 낸다. 무력화된 적을 방패로 이용하기도 하고, 검을 쓰다 안 되면 발차기로 하체를 으스러뜨린다.
이렇게 짐승처럼 적을 처리하다가도 조금만 공세가 집중된다 싶으면 또 영리하게 존재를 숨긴다.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완벽히 사라지고, 적의 가장 연약한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공세를 펼칠 때는 배고픈 야수처럼.
수세를 취할 때는 교활한 인간처럼.
이처럼 박건은 일방적인 피해를 강요하는 전투를 이어 나갔다.
그에 비하면 박수혁은 그야말로 검사의 정석이다.
황금 광체를 너울너울 뿜어 대며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간 박수혁이 검을 뽑는다.
그의 전용 병기 ‘천하(天下)’.
중2병스러운 이름에 S.A에서 각종 드립을 자아내는 검이지만 은빛나는 단언컨대, 박수혁이 ‘천하’를 든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드립 따윈 입에 올리지 못할 거라 믿는다.
압도적.
천하를 든 박수혁은 압도적이다.
모든 것을 막아 낸다.
그게 화살이든, 마법이든, 정령이든, 모든 공세가 무(無)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공격을 막고 나면, 박수혁의 검은 어김없이 적의 숨통을 끊었다.
막고, 벤다.
그야말로 검사의 정석이었다.
박민지는 그녀의 주특기 속도전을 펼쳤다.
감히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적진을 누빈다. 그녀는 방어하지 않는다. 아니, 방어가 필요 없다.
반격?
그것도 보여야 할 수 있는 법이다. 공격이 닿기 전에 사라지는데 무슨 반격인가.
압도적인 속도 앞에 모든 공격은 무의미하다.
하얀 섬광이 번쩍이면 두셋이 쓰러졌다. 눈 깜짝할 새 적진을 가로지르고, 다시 눈을 깜빡이면 섬광이 한 줄기 잔상을 남기며 반대편으로 이어진다.
줄기줄기 이어지는 섬광들.
전장이란 종이에 섬광이란 선이 그어지면, 피가 채색됐다.
폭력의 끝을 보여 주고 있는 박건.
기교의 극의를 펼치고 있는 박수혁.
속도의 정점을 보여 주고 있는 박민지.
각자의 본능을 깨운 검호는 강렬하고, 치명적이었다. 유린(蹂躪)이란 단어와 이보다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
과연 앞으로 살면서 이것보다 더 대단한 전투를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은빛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박기혁을 보기 전까지.
얘는 정말 괴물이었다.
보통 사람은 들지도 못할 크기의 대검으로 다크엘프를 내려친다. 머리부터 정확히 두 동강 나는 다크엘프들. 터져 나오는 피를 시원하게 뒤집어쓴 박기혁.
환하게 웃는다.
진심으로 즐거워한다.
“좋아!”
콰직!
“좋다고!”
콰직!
찍어 없앤다.
실드? 마법?
그냥 다 깨부수고 한 번에 한 마리씩 다크엘프를 다크와 엘프로 나눠 준다.
상체와 하체로 사이좋게. 때로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그 잔인한 모습에 몬스터인 다크엘프조차 몸을 사린다.
그래서인가, 다른 세 사람에 비해 많은 공격이 박기혁에게로 몰렸다.
하지만.
막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그냥 맨몸으로 화살의 파도에, 마법의 폭격 속으로 몸을 던졌다.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무모한 돌격.
그때.
박기혁의 몸에 둘러져 있던, 갈기처럼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빛을 발하는 순간.
화살의 파도가 덮치는 순간이며.
마법의 폭격이 내려쳐지는 그 순간에.
멈춘다.
말 그대로 모든 공격이 멈춰 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세상. 오직 박기혁만이 질주하고 있다.
평원을 질주하는 박기혁의 뒤편으로 스켈레톤이 생성된다. 박기혁과 비슷한 대검을 든 스켈레톤이 푸른 안광을 뿜어내더니, 주인을 뒤를 따라 맹렬히 질주했다.
박기혁을 선봉으로 쐐기 진형이 구성되고.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려 나가는 스켈레톤 무리는 다크엘프 진형에 닿기 전, 완벽한 군대가 되어 있었다.
“다 죽여!”
주인을 따라 대검을 내리쳤다.
비록 주인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팔이 떨어져도, 허리가 잘려 나가도, 몸이 부서져도 한 번이라도 더 많은 대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부서지는 다크엘프 진형.
수천에 다다른 다크엘프 진형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은빛나가 넋을 놓고 이 장면을 본다.
“쟤는 정말…….”
찢었다.
아빠인 박건과는 또 다른 폭력.
형인 박수혁과는 또 다른 기교.
누나인 박민지와는 또 다른 신속함.
완전히 찢어 버렸다.
끝내 무너지는 다크엘프의 진형.
엄정했던 군기가 사라진 자리, 혼란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학살의 시간.
네 마리 검호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며 감탄하는 사람이 또 있었는데.
* * *
땅에서 검호들과 다크엘프 군대가 맞붙고 있었다면, 하늘 위에서도 타천사와 신앙 성가대에 맞선 전투가 펼쳐지고 있다.
아이스 쉬프트가 온갖 형태로 변형하고, 신앙 성가대의 ‘독 주문’이 뿌려지는 전장.
이 치열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진도하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맺힌 것은, 박기혁과 박기혁의 스켈레톤.
“벌써 깨달은 건가.”
마나에게 말을 걸어라. 마나를 사랑하라.
조언을 건넸던 게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깨달았다?
“하, 하하…….”
진짜 천재였구나.
하늘이 내려 준 천재.
“아니, 아니지.”
천재가 아니지. 천재라는 표현은 너무 평범하다.
마법이, 세계가 선택한 인간.
진리를 마주한 진짜 ‘마법사’다.
천재라는 수식어로 대충 넘어간다면 그건 마법에 대한 모욕이며, 수치다.
탐난다.
겨우 조언만으로도 저렇게 성장하는데, 함께 토론하고 연구한다면 얼마나 더 성장할까.
십 년 후, 이십 년 후…… 박기혁의 마법적 성장을 상상하자 진도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양이 놈이 부러워질 정도군.”
자신의 딸 진유리도 가능성의 총량은 밀리지 않지만 박기혁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
일찌감치 ‘가마치’를 꿈꾸며 독립한 아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뭐, 딸이랑 잘되고 있다고 하니.
“사위라…….”
함께 ‘진리’를 토론할 수 있는 사위라…….
“나쁘지 않을지도.”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번지는데.
그 순간, 딸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빠아! 뒤!!”
진도하의 뒤를 노리고 날아오는 얼음 창.
아니, 크기만 보면 창보다는 전봇대에 가까운 얼음이 진도하의 등 뒤를 노려 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러나.
“호들갑 떨지 마라.”
진도하의 시선은 여전히 박기혁을 향하고 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그저 부채를 펼치고 허공을 휘젓기만 했고.
순간.
얼음 창이 불꽃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얼음 가시, 얼음 화살, 얼음벽, 얼음으로 만들어진 늑대와 독수리, 뱀인지 도마뱀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파충류 등등.
얼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이 진도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진도하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여전히 박기혁을 눈에 담고서 ‘사위가 되면 뭐부터 연구해야 할까.’ 미래 고민 중.
들이닥치는 ‘아이스 쉬프트.’
다시 불꽃이 타오른다.
정확히 아까 얼음 창이 타오른 그 지점에 다다른 아이스 쉬프트들은 모두 불꽃에 휘말렸다.
화르르륵-!!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아이스 쉬프트.
그 많던 공세들이 한순간에 덧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진도하의 관심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다.
“쯧, 한창 감상 중인데.”
부채를 접고서 주변을 본다.
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타천사와 검은 사제복을 입은 신앙 성가대.
몬스터와 광신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쓰레기다.
“가치 없는 것들.”
촤륵!
부채를 펴는 진도하.
그 순간 진도하의 주변으로 검붉은 마나가 모여들더니, 스파크를 튀기며 뭉치고.
검붉은 원뿔형으로 완성됐을 때.
진룡 7식
용각(龍角)
‘용의 뿔’들이 쏘아졌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용의 뿔. 목표는 저 비루하고 가치 없는 쓰레기들.
적들을 추적해 꿰뚫는다.
당연히 이를 목격한 타천사와 신앙 성가대는 나름대로 방어 수단을 펼치고 대비하는데.
결론적으로 소용없는 짓이었다.
용의 뿔이 실드에 닿는 순간.
일말의 저항도 없이.
통과한다?
푹-?
“……??”
뜬 눈으로 가슴이 뚫린 신앙 성가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아래로 추락했다.
실드를 뚫는 게 아니다. ‘통과’하는 공격.
마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용각(龍角).
용의 뿔.
대(對)마법전 전용으로 만들어진 마법이 아닌 마법.
마법이 아닌 이유는 마법의 발현 과정인 술식, 마나, 발현에서 ‘술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법인 이유는 ‘마나’가 의지를 띠기 때문.
술식 없이 마나에 의지를 심는, 오직 ‘진룡’만이 가능한 마법.
그래서 용의 뿔, 용각(龍角)이리라.
진도하를 중심으로 용의 뿔이 퍼져 나간다. 유도 미사일처럼 적을 꿰뚫는다.
육체를 100퍼센트 활용할 수 없는 공중전에 무투계 초인이 투입됐을 리 없다. 비효율적이니까.
공중전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마법전을 펼치겠다는 의지.
이 하늘 위에 떠 있는 이들은 아군도 적군도 전부 마법사란 말이고 다시 말해, 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용의 뿔’을 막을 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 그분…… 커억!!”
“실드ㄱ…….”
“모두 피하세요!! 막을 생각하지 마시고 피해야 합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지는 적들.
마법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몇몇이 몸을 빼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용의 뿔은 귀신같이 그들을 쫓아가 척추를 꿰뚫었다.
“순교하라!”
“그분의 뜻대로!!”
이처럼 반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오는 놈들도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용의 뿔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많았다.
그리고, 빨랐다.
진도하의 영역에 켜켜이 쌓이는 용의 뿔들.
마법사가 할 수 있는 공격이 마법뿐인데, 마법을 무시하는 용의 뿔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미 그들의 미래는 정해졌다.
“커헉!”
신앙 성가대들이 벌집이 되어 추락했다. 셀루티스를 대표하는 전투 집단치고는 초라할 정도로 비참한 최후였다.
“그래도 쟤들은 낫군.”
허무하게 무너진 신앙 성가대와는 다르게 그래도 버티고 있는 타천사.
어떻게 어떻게 얼음을 겹치며 겨우 막아 내는 중. 아이스 쉬프트가 마법이 아니라 혈족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진도하가 무심한 눈으로 뭉쳐 있는 타천사들을 바라봤다.
보니까 기억난다. 박기혁이 요즘 저것들 연구하는 데 푹 빠져 있다는 거.
“선물해 줘야겠군.”
부채를 젓는다.
사방팔방 돌아다니던 용의 뿔이 갑자기 방향을 전환, 상공으로 솟구쳤다.
위로, 위로, 구름보다 위로 솟구친 용의 뿔.
진도하가 부채를 접어 타천사들을 가리키는 순간.
메테오
Meteor
유성의 빗줄기가 구름을 뚫고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