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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97화 (97/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97화>

정리되지 않은 책상.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서류 더미 속에서 지성철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 셀루티스와 타천사, 함경남도로 결집.

- 위성 관측 불가능. 대단위 교란 마법진 확인.

……

- 셀루티스 ‘신앙 성가대’ 확인.

- 타천사 빙 속성 마법 사용.

- [정정] 마법 아님.

- 조직 검사 결과 타천사 ‘아이스 쉬프트’ 사용 확인.

- 미국 교류단. 챈들러 머레이의 행방 수색.

- 수색 실패. 협조와 납치. 현장 관리자의 의견은 ‘납치’에 무게를 둠.

……

- [긴급] 수호자 박건. 셀루티스 극비 문서 입수.

- [긴급] ‘신전’ 레드 게이트.

- [긴급] 검호, 복귀 통보. 작전 지역……

……

- 검호, 조사대 합류.

- [긴급] 레드 게이트 확인.

……

현 사태를 타임라인으로 정리해 둔 서류.

서류를 모두 읽은 지성철의 솔직한 심정은.

“한숨 돌렸군.”

최악의 재앙이라는 레드 게이트를 확인했음에도, 그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이게 나아.”

분명히 레드 게이트는 재앙이다.

살아 있는 몬스터. 현대의 화기는 거의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이 우리가 사는 사회로 쏟아진다.

그 결과는 붕괴다.

집도, 건물도, 기반 시설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변할 것이다.

몬스터에 의해서든, 몬스터를 막으러 온 초인에 의해서든.

하지만, 이런 끔찍한 재앙임에도 지성철은 레드 게이트가 셀루티스보다는 낫다고 봤다.

지성철, 아니, 집행부장의 입장에서 레드 게이트는 어쩌면 재앙보다는 ‘재해’에 가깝다. 허리케인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 말이다.

반면 셀루티스는 다르다.

이건 범죄다. 그것도 조직화된 범죄. 우리의 일상에 직접적으로 칼날을 들이민다.

설령 피해의 수준이 같아도, 공포의 수준이 다른 것이다.

“안 그래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게이트 봉쇄. 사냥을 가지 못하는 초인들이 여기저기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이걸 ‘레드 게이트’ 때문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면, 대충 그림이 나온다.

속이는 것이 아니냐고? 왜 셀루티스는 쏙 빠졌냐고?

맞다, 속이는 거.

엄밀히 말하면, 현재 발생한 레드 게이트는 셀루티스가 만든 것이니까.

하지만 대중들은 이를 모른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어디에도 셀루티스가 언급된 적이 없으니까.

모르면 문제 될 게 없는 법. 문제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

책임, 책임……

자신이 책임을 논할 줄이야.

수호자 시절, 그토록 혐오하던 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할 줄이야.

이런 스스로가 혐오스러운 지성철이지만.

“후…….”

어쩌겠나, 자리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마냥 깨끗할 수만은 없는 법.

집행부장이란 자리가 이렇다 스스로를 위안할 뿐이었다.

“프로세스대로…….”

평소의 레드 게이트처럼,

초인을 소집하고. 인근의 주민을 대피시킨다. 소집된 초인으로 일대를 봉쇄하고, ‘공략대’와 ‘수비대’를 나누고.

공략대는 레드 게이트 안으로 진입, 수비대는 역류하는 몬스터를 막아 내면.

흠잡을 데 없다.

지극히 정석적인 방법. 지성철이 본인도 ‘만창(萬槍)’일 때 수십 번을 참여했던 레드 게이트 공략법이다.

지성철의 팬이 움직이고, 서류에 사인했다.

이걸로 서류는 모두 검토했다.

이제 남은 업무는.

‘슬슬 올 시간인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양반은 못 되는가 보다. 지성철은 키득대며 왼쪽 뺨을 풀었다.

그의 능력 좋은 후배님은 오른손잡이니, 제대로 풀어 놔야 한다.

잠시 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김연희.

올 게 왔다.

“지성철, 씨X 새끼야!”

다짜고짜 뻗는 주먹.

지성철은 왼뺨을 들이댔다.

퍼억!!

*   *   *

지성철의 해명을 듣고 오는 길.

차량이 도로 위를 미끄러지고, 뒷자석에 앉은 김연희가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조사대가 출진하기 전, 지성철과 김연희는 한차례 독대한 적이 있었다.

이 만남에서 김연희는 지성철에게 한 가지를 약속받았는데, 혹시나 우리 식구들이 셀루티스랑 깊이 엮일 것 같으면 작전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적당히 빼 주기로 말이다.

엄마로서, 내 자식들이, 남편이 그 미친 광신도들이랑 엮인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이건 그들이 강하고 약하고가 문제가 아니다.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래서 약속까지 받아 놨던 건데.

왜?!

공략대 명단에 박건이 들어 있고, 박민지가 들어 있으며, 박기혁까지 들어 있니?

애 아빠랑 딸, 거기에 막둥이까지 포함된 명단을 보는 순간, 김연희의 안전핀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지성철도 이를 알았는지 곱게 맞아 준 것.

김연희는 당시의 대화를 생각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우리 동생 아직 살아 있네? 손이 매워, 아주.”

“네가 믿을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하마. 이거 절대 내가 의도한 게 아니다.”

“서류로 보면 검호 본인의 ‘강력한’ 의사로 참여했다고 쓰여 있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까득-!

알지, 잘 알지.

지성철이 강조한 ‘강력한’ 의사 표현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꼭 가고 싶다며 손을 번쩍 드는 빌어먹을 남편 놈의 모습이.

하지만 이건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그래, 그 정의 바보가 한두 번 이랬나.

어차피, 한 명 이상의 수호자가 공략대에 포함되는 건 기정사실. 거기에 남편 놈이 들어갈 건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민지도 마찬가지야. 우리 쪽 사람이 체력 문제로 말려 봤지만, 무조건 참여할 거라고, 아니면 혼자서라도 들어갈 거라고 했다 들었어.”

까드득-!!

그래, 박민지. 금쪽같은 우리 딸내미.

김연희가 분명히 신신당부했다. 제발 적당히 하라고, 괜히 오바하지 마라고, 너무 신 내지 말라고.

그런데 박민지 네가…….

“……기어코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구나.”

후우, 그래. 가슴 아프지만, 뭐 좋다.

여기까지도 예상한 결과니까

김연희는 엄마였고, 모든 엄마는 자식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안다.

박민지가 빌런을 싫어하다 못해 집착하는 것은 익히 아는 바.

셀루티스가 연관됐으니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에!

“박기혁…… 크흠, 네 막내는…… 참여 의사는 물론이고,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며 신속히 작전을 실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괜찮냐, 너?”

팡!!

김연희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내려쳤다.

우리 막둥이가! 엄마 말이면 죽고 못 사는 막둥이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이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당시에도 어찌나 머리가 어질어질하던지, 휘청거린 김연희였다.

“그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너한테 도움받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나쁜 일로 엮이게 한 거.”

“대신이나마 보상해 줄게. 이번 레드 게이트를 클리어한 수익의 6할을 너희한테 주마. 어때?”

그래도 딜은 딜.

머리가 어지러워도 할 일은 해야 했다.

김연희는 곧바로 흥정에 나섰고, 수익의 1할을 포기하는 대신 ‘보스’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수익의 1할과 보스의 권리를 바꾼다?

굉장히 후한 거래다.

하지만 거래의 이면에는 ‘셀루티스’에 대해 입을 닫는 조건까지 포함됐으니, 그것까지 생각한다면 일방적인 거래는 아니었다.

“……박건 자식. 들어오기만 해 봐.”

이게 망할 남편 놈 때문이다. 아빠가 돼서 애들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그 위험한 곳에 데리고 들어가?

민지도 그래. 누나가 됐으면 중심을 잡아 줘야지.

기혁이도, 애가 철이 든 줄 알았는데 철은 무슨. 아직 한참 멀었어.

“하여튼 이놈의 집구석…….”

호전적이어도 심하게 호전적이다.

싸우는 게 그렇게 좋을까…….

전투라면 환장하니, 한시도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다.

사고 치는 사람은 따로 있고.

마음 졸이는 사람은 따로 있지…… 엄마가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는 사람도 좀 생각해 달란 말이야.”

잠깐이지만 김연희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그래도, 잠깐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 집안에서 자신마저 중심을 잡지 못하면 그때는 정말 파국이다.

짝짝.

자신의 양 뺨을 때린 김연희가 비서실장에게 묻는다.

“언제 도착하죠?”

“곧 도착입니다.

비서실장의 말대로 잠시 뒤 차가 멈추고.

김연희가 손잡이를 잡기 전에 문이 열린다.

누군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녀의 친구, 유해련뿐이니까.

“내리시죠, 희땡 님.”

“오냐, 해쫑아. 에헴.”

굽실거리는 유해련의 시중을 받으며 김연희가 능청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친구의 남편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데.

“오랜만이에요, 도하 씨.”

“오랜만입니다, 연희 씨.”

진룡 진도하.

합류.

*   *   *

한편, 김연희가 진룡산을 오르던 그 시점.

박수혁은 한준우랑 검을 맞대고 있다.

깡!

스치듯 서로를 지나쳐 다시 일격.

깡-!

다시 서로를 등지고, 회전하고.

상단을 노리는 박수혁의 검. 반대로 한준우의 검은 하단을 노린다.

몸을 허공에 띄우는 박수혁. 허리를 숙이는 한준우.

둘은 서로 합을 맞춘 것처럼 그림 같이 서로를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빛살 같이 서로를 노리고 들어오는데.

깡-!

“기본기가 제대로네요.”

“감사합니…….”

말을 끝맺기 전에 왼손으로 검을 뽑는 한준우.

쌍검을 이용해 박수혁에게 찔러 들어가는데.

검이 막힌다.

깡!

같은 검에.

정확하게 검 끝끼리 맞닿아 있는 형태.

찌르기를 찌르기로 막아? 이게 가능해?

한준우가 놀란 눈으로 보는데, 박수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온하게 웃고만 있었다.

“쌍검 좋죠. 저도 좋아해요.”

“한 수 부탁합니다.”

방금 일격으로 실력 차는 확인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한준우가 이를 질끈 깨물더니 혈족을 깨웠다.

엉키는 감각.

한준우가 감각의 격류를 타고 몸을 숨기길 잠시, 박수혁의 등이 베인다. 허리가 쓸리고, 팔뚝에서 피가 흐른다.

“호…… 이게 말로만 듣던 무희군요.”

박수혁이 검을 뻗는다.

정확히 한준우의 어깨를 겨냥한 검. 그런데 궤적이 빗나간다. 검은 어깨는 고사하고 애꿎은 허공만 찌르고 있다.

재차 검격을 펼쳐 본다.

모두 간발의 차로 빗나가는 검격.

박수혁의 검격이 빗나갈수록 한준우의 공세가 거칠어진다.

빠르게, 더 빠르게.

한준우의 검이 춤을 추자, 나비의 날갯짓처럼 우아하던 공세가 바람처럼 변하고, 곧 폭풍이 휘몰아쳤다.

채채채채챙-!

박수혁은 위태롭게 한준우의 검을 막아 낸다.

“정말 재미있어요!”

무희란 능력도 뛰어나지만, 박수혁이 진짜 감탄한 건 한준우다. 검술 하나, 궤적 하나 고심의 흔적이 느껴진다. 보지 않았지만 무수한 노력을 했으리라.

동생이 한준우, 한준우 그렇게 칭찬하더니, 확실히 한준우는 칭찬받을 만하다.

‘마음에 드네.’

아주 마음에 들어.

요즘 이 정도로 정통파 검사가 있는가.

같은 정통파 검사로서, 이 후배가 몹시도 마음에 드는 박수혁이다.

그래서 선물을 줄 생각이다.

깡-!!

“……!!”

패배라는 선물을.

“천천히 움직일 테니, 잘 보세요.”

정신을 집중한다. 오로지 검 한 자루에.

풍경이 지워진다. 적이 지워진다. 내가 지워진다.

하얀 종이 같은 세상. 오로지 검 한 자루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검이 그림을 그린다.

흘러가는 검에 튕겨져 나가는 공격들.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검호의 검술 중 유일의 방어기.

가장 부드럽기에 가장 단단한 검술.

검호류 유검술

수묵화(水墨畫)

*   *   *

잠시 뒤.

엉망이 된 마당 위로 한준우가 쓰러졌다.

털썩.

지친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불태운 것처럼 후련한 미소가 가득했다.

박수혁은 그런 한준우를 향해 빙긋 웃어 줬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갔다 와서 또 붙어 주세요.”

“얼마든지.”

쓰러진 한준우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는 박수혁.

인사를 해야 하니 박봄을 찾는다.

“봄아, 잠깐만 와 볼래?”

메르헴과 놀고 있던 박봄이 “네에!” 하고 똑 부러지게 외치며 달려와 안겼다.

“봄이, 아빠 보고 싶다 했지?”

“응. 아빠 보고 싶어, 호랑이 삼촌.”

빵빵한 볼에 볼을 부비며 말한다.

“삼촌이 아빠 데리고 올게.”

“정말루?!”

“정말! 호냥이 이모랑, 할아버지도 데려올게.”

“손가락 걸고 약속!”

“약속.”

두 사람의 손가락이 걸린다.

산군 박수혁.

합류.

……

“봄아, 할머니한테 잘 말해 줘야 돼.”

“응, 봄이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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