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15)
“흣!”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기만 했다.
피한다거나 반격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주, 죽는다.’
뒤이은 이성적 판단.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반격의 태세를 갖췄다.
허리를 비틀며, 팔꿈치를 힘껏 휘둘렀다.
휘익!
빗나갔다.
허리를 비트는 순간부터 알았다.
자세도 불안정했고, 회전과 동시에 몸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한 번 더!’
전보다 더 불안정한 자세였지만, 기회는 있었다.
억지로 비틀면 한 번쯤은 더 공격할 수 있었다.
물론, 몸에 상당한 무리가 갈 테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제발 성공하기를 빌며, 반쯤 돌아가 있는 허리를 반대쪽으로 틀기 위해 힘을 줬다.
그때였다.
와락!
상대가 내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겉옷과 전투 타이츠를 뚫고 들어오지는 못하지만, 가려지지 않은 손과 목 등으로 느껴지는 싸늘한 한기에 그것이 내 목덜미를 노리던 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잇!”
비틂은 저지당했지만, 아직 팔꿈치 공격은 가능했다.
곧장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주, 주인님!”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이어, 혼란에 빠졌다.
‘…?’
나처럼 눈뽕을 처맞은 다른 녀석들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라 여긴 것이 린이었다.
이 사단의 시작과도 같았던 때에 확인한 린의 마지막 모습은 정말로 심각했었으니까.
그런 린이 이렇게 빨리 회복됐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평상시 포근함과 따스함을 물씬 느끼게 하는 린이 이런 한기를 대놓고 뿜어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다급함이 서려 있어 살짝 갈라진 듯했지만, 분명히 린의 목소리였다.
‘아니야, 목소리쯤은 쉽게 흉내 낼 수도 있잖아? 젠장….’
눈만 제대로 보였어도 쉽게 확인이 가능한 일인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너무나 난감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나름의 묘안을 떠올렸다.
꾸우욱….
일단,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팔에 힘을 주고는 빠르게 물었다.
“린, 너 맞아?”
“네, 주인님. 저예요.”
“그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차 이름이 뭐지? 네가 즐겨 마시는 것 말이야!”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진짜 린이라면 바로 나와야 할 대답이었다.
대답을 못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머뭇거림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에 치켜든 팔꿈치를 내리꽂을 생각이었다.
“로, 로믄 티요.”
힘겨움이 느껴졌지만, 내가 정한 제한 시간 내에 답이 나왔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린이라는 걸 인정했다.
“린, 어떻게 된 거야? 너는 분명….”
“모, 모르겠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아아… 너무 추워요.”
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전히 들고 있던 팔을 내려 린을 안아 줬다.
굉장한 한기… 그냥 냉기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만큼 린의 몸은 차가웠다.
“몸이 왜 이래?”
“아아… 모, 모르겠… 하아아….”
린이 힘겨움을 내비치며 쓰러지듯 내게 완전히 안겨 버렸다.
안타까움에 혓소리를 내고는 급히 린의 몸을 쓰다듬었다.
“치잇!”
열을 내기 위해 린의 몸을 쓰다듬었지만, 오히려 내 손과 팔이 더 차가워져만 갔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어째야 하지? 아아, 그렇지?!’
묘안을 떠올렸다.
즉시 왕울이를 불렀다.
“왕울! 이쪽으로 올 수 있어?”
“크르르… 간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 또렷한 발소리를 내며 왕울이가 다가왔다.
녀석의 동물적 감각이라면 아무리 눈뽕을 맞아 시야가 막혔어도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것쯤은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런 내 생각이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곁으로 다가온 왕울이에게 다시금 말했다.
“린을 감싸 줘, 나보다는 네가 더 나을 거야.”
이번에도 왕울이가 즉각 움직였다.
녀석은 린뿐만 아니라 나까지 함께 품어 버렸다.
무척이나 차가울 텐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뭐, 처음엔 살짝 움찔하기는 했다.
‘됐다.’
이내, 몸이 따뜻해졌다.
린 말고 나 말이다.
린은 여전히 한기에 휩싸여 있었고, 추위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래도 내가 끌어안고 있을 때보다는 좀 더 나아진 듯했다.
‘놈은?’
린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적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놈을 떠올리자마자, 가슴을 묵직하게 타격하고, 몸을 압박하는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린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젠장… 대체, 어떤 놈이기에….’
그저, 강하고 무서운 놈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더불어 우리가 저보다 약하다는 걸 아는지, 여유까지 부리는 놈이었다.
강렬하고, 묵직한 압박만으로 사람을 이토록 질리게 하면서 아직도 우리의 손끝 하나 건들지 않고 있다니 말이다.
하긴, 이 정도로 강하다면, 그만한 여유쯤은 부려도 될 터였다.
‘그래도… 재수 없어!’
짜증이 났다.
회복되지 않은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와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기는 했지만, 일단 시야가 회복되면 어떻게 해서든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두고 봐… 그러니,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좀만 더 참아 주라.’
상대가 듣는다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협박과 애원을 동시에 바라며 얌전히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후.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얼마쯤 더 지나 시야가 완전히 회복된 후.
상대가 아니라 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에 어이가 없어졌다.
“참나….”
….
린과 누님의 겹쳐진 이미지 때문에 문득 떠오른 엉뚱한 상상.
설마 그것이 해답… 사각기둥을 작동시키는 열쇠(?)가 그것이라는 게 지금도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사각기둥의 비밀은 해결이 됐다.
갑작스러운 린의 발작과 눈뽕을 때린 빛줄기.
영문 모를 소리와 진동.
두려움을 절로 자아내게 했던 강렬한 기운.
더없는 한기에 휩싸인 채 내 품에 안긴 린까지….
이 모든 게 사각기둥에 열쇠를 꽂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 결과는….
또 다른 시커먼 사각기둥들이 솟아올라 아무것도 없던 거대한 석실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문제의 사각기둥을 중심으로 무려 열다섯 개나 되는 사각기둥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됐다.
새롭게 나타난 사각기둥들은 높이가 1미터쯤, 가로와 세로는 50센티미터가 안 되는 크기였으며, 역시나 시커먼 색에 반질반질한 광이 났다.
또한, 이제는 열쇠의 구멍인 줄 알게 된 홈 외에 아무것도 없던 중앙의 사각기둥과는 달리, 다른 열다섯 개의 사각기둥 위에는 찬란하고, 화려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최소화 모드의 동물적 감각을 미친 듯이 흔들어 놓고, 나를 극강의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했던 강렬한 기운의 정체도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음흉한 방법으로 작동시킬 생각을 한 것은 대체 누구 아이디어인 거야?’
사각기둥의 둥근 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가 눈을 돌려 왕울이에게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린을 내려다봤다.
변태라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음… 그, 그랬다.
아무튼… 그래, 아무튼!
석실을 가득 채운 열다섯 개의 사각기둥, 그 위에 놓인 엄청난 기운의 것들을 확인해 봐야 할 차례였다.
….
그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석실의 입구 반대편 자리에 줄줄이 있는 다섯 개는 주먹 두 개만 한 크기의 둥근 형태로 붉은색 빛을 찬란하게 발하고 있었다.
눈이 부시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들이 합쳐져 내뿜는 기운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남은 열 개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속판이었다.
형태는 오각형이었고, 두께는 1센티미터쯤 되는 듯했다.
앞면에는 한 쌍의 날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 있었다.
앞서 설명한 붉은빛의 구보다는 작지만, 역시나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흐음….”
차원이 다른 기운의 크기에 붉은색 빛의 구 곁으로는 선뜻 다가가지도 못했다.
대신에 그보다 덜한 기운의 금속판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그러다가는 용기를 내어 검지 끝을 금속판에 살짝 가져다 댔다.
툭… 툭툭….
별다른 느낌이나 반응은 없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손가락 끝으로 금속판을 밀어 봤다.
제법 묵직함을 발하며 금속판이 앞으로 밀렸다.
크게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금속판 위에 손바닥을 올려놨다.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지며, 손바닥에 밴 땀을 날려 버렸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지직거리는 느낌과 함께 머릿속으로 뭔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연속된 물음표들이었다.
실망감에 다시 눈을 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렵구만.”
린이 새로운 스킬 ‘아이템 감정’을 익혔다는 걸 알고서부터 나도 곧장 연습에 들어갔다.
린은 ‘그냥 머릿속에 떠올라서 떠오른 것을 말했을 뿐인데, 어찌 떠오르냐 하시면…’이라며, 평소답지 않은 난해한 스킬의 발동 원리를 설명했다.
난감하고,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것만 가지고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어찌어찌 되긴 되더라.
물론, 아직 정식 스킬로는 추가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해서, 집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막상 뭔가가 된다 싶어도 지금처럼 물음표만 가득하던가, 아니면 시커먼 상태로 끝이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물음표가 이어졌다는 건 나름의 성공.
더불어 이 오각형의 금속판이 어떤 아이템이란 건 분명했다.
아이템이 아닌 것… 예로, 지구의 물건인 배낭이나 던전의 물건이지만 아이템으로 취급하지 않는 과일 따위를 들고서는 아무리 집중을 해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스킬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지직거림 자체가 없었다고 할까?
“흠….”
쳐다보던 금속판에서 눈길을 떼고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린은 여전히 왕울이에게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무리겠지?’
아직은 부담을 주기가 뭐해 보였다.
무척이나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리 급한 것은 또 아니기에 잠시 보류한다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일단, 하나는 챙겨 놓고….’
평소 같으면 열 개의 금속판을 모두 챙길 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배낭을 숙소에 두고 온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더불어 아직은 이게 뭐에 쓰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하나만 챙겨 두기로 했다.
뭐, 린이 조금 괜찮아지면, 감정을 해 보고 나서 나머지를 어찌할지 결정해도 늦지 않을 테고 말이다.
“후우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다가가기조차 꺼려지는 붉은 빛의 구를 쳐다봤다.
장난이 아닌 두려움과 위험함을 느끼는 만큼 기대감과 궁금증도 컸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망설이다가는 끝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고오오오오오….
가까이 다가갈수록 붉은빛의 구가 뿜어내는 기운은 더 강렬하게 내 몸을 흔들어 놓았다.
마치, 다가오지 못하도록 나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절로 미간이 좁혀지고, 입꼬리가 떨려왔다.
이를 악문 채, 억지와 힘겨움을 다해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크으… 장난이 아니네.’
간신히 붉은빛의 구 앞에 섰다.
강렬한 기운의 압박감에 숨이 막히고,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치잇! 이런다고 내가 질 줄 알아?”
오기를 부리며 사각기둥을 붙잡은 채 버텼다.
그 때문이었을까?
더없이 나를 밀어낼 것만 같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슈우우우우욱….
강렬한 기운만 뿜어낼 뿐, 미동조차 없던 붉은빛의 구가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듦은 인지했을 때는 이미 붉은빛의 구가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간 뒤였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뻥 뚫렸을 거라고 예상된 내 가슴을 내려다보기도 전에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이 시커멓게 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