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209)
며칠만 더 머물까도 싶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이번에는 나오겠지.’, ‘그동안 다 꽝이었으니까, 다음번엔 분명히 나올 거야!’ 같은… 마치, 도박에서의 보상과 기대 심리 같은 거 말이다.
그게 무서운 거다.
좌절과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수렁이나 늪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는 어리석은 과오를 저지른다.
분명히 나도 그랬다.
나를 따르는 녀석들은 말리거나 다른 의견도 내놓지 않는다.
그냥 내가 하자면 무조건 하고, 말자면 말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런 우리를 구원(?)해 준 것이 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한참을 쉬면서도 내일의 사냥과 득템을 간절히 바라던 그때!
“어? 주, 주인님… 저게 뭐죠?”
로믄 티를 마시며, 밤하늘을 구경하던 린이 약간의 호들갑을 떨며 나를 찾았다.
혼자서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던 나였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내비치며 린을 쳐다봤다.
이어, 린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이제 막 어둠이 깔린 밤하늘.
얼마나 높은지 가늠도 되지 않는 거대한 산 너머로 또렷한 하얀색의 빛기둥이 쭉 뻗어 있었다.
몇 초쯤의 의문에 이어 곧장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신호!’
때가 됐음을 알리는 신호가 확실해 보였다.
“얘들아! 서둘러!”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생기의 미약이니, 보상의 기대 심리 같은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 * *
이틀 후.
여전히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산세의 험난하기가 첫 번째 산을 능가했다.
그나마 안전한 루트를 따른다면 산을 넘는 것이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었다.
해서,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거나 묘기에 가까운 절벽 타기도 서슴지 않았다.
“저기 툭 튀어나온 곳 보이지? 나뭇가지인지 뿌리인지 보이는 곳, 그쪽으로 던져!”
“알았다, 형님!”
“시, 실수하지 마!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다아아아!”
“크으읏!”
오식이의 힘을 이용해 허공을 날아 불안하기 그지없는 곳에 착지하거나 매달리기도 했고….
“끌어당겨!”
“알았다. 하나, 둘! 하나, 둘!”
“좋아! 잘하고 있어. 하나, 둘! 하나, 둘!”
밧줄 하나에 의지해 깎아지는 절벽을 오르기도 했다.
녀석이 있고, 봉인과 소환의 스킬이 있었기에 가능한 참으로 위험천만하고, 지랄 같은 산행이었다.
그러한 노력과 인내의 결실로 두 번째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그동안의 경험으로 인한 노하우와 요행, 더불어 목숨을 내놓은 듯한 깡으로 마침내 두 번째 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무리한 일정의 강행으로 심신이 모두 지쳐 버렸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젠장! 벌써 나흘이나 지났어.”
정확히 말하자면 닷새였다.
몇 시간 후면 동이 틀 것이고, 닷새째의 날이 밝을 터였다.
때의 기간은 일주일이라 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는 그냥 그렇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에 와서는 조금 애매하다는 생각이었다.
때를 알리는 신호인 빛기둥을 발견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저녁 7시에서 8시쯤으로 날이 바뀌기 불과 서너 시간만을 남겨 둔 시각.
이 부분에서부터 문제는 시작됐다.
일주일이라 정해진 때의 기간이 처음 빛기둥이 치솟던 날부터 시작해 하루가 소비되는 것인지.
아니면, 빛기둥의 신호를 시작으로 168시간을 계산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신호라는 걸 개막식이나 전야제의 의미로 두고,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이어지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게 또 옳은 것 같은 모호함에 초조함과 조바심까지 곁들여지며, 나를 헷갈리게 하고 괴롭혔다.
“뭐가 됐든 간에 더 서둘러야 해!”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왕울이의 등에 올라타고는 미친 듯이 질주했다.
컴컴한 밤이라 그렇고, 너무나 멀기도 하여 가늘게 뜬 눈을 최대한 당겨도 지금으로써는 보이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그곳에 있을 목적지 방향으로였다.
때를 알리는 신호가 확실한 빛기둥은 하루쯤 지나자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내려다봤지만,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조금 더 가까운 듯한 형태와 그 중심 부근에 너무나 익숙한 것이 떡하니 자리 잡은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피라미드.
그랬다.
그곳에 한동안 어디 갔나 싶었던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었다.
‘저곳에 있겠지? 그래, 있을 거야!’
솔직히 풍선처럼 부푼 기대만큼이나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개고생을 하면서 그토록 보고 싶다고 외치는 ‘그것’과 코앞에 다다랐나 싶다가도 몇 번씩이나 멀어지기만 했던 피라미드가 그다지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보통 피라미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삼각형, 스핑크스, 투탕카멘, 파라오, 미라 등과 더불어 금으로 만든 관이나 보물 같은 것들 말이다.
뭐, 앞서 말한 것들은 일반적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얘기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답변이지만, 던전… 피라미드의 콘셉트를 그대로 따온 형태의 던전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전설이니 저주니 하는 것들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피라미드형 던전에서는 앞서 말한 것들이 괴물로 등장한다.
너저분한 붕대를 칭칭 동여맨 미라들이 달려들고, 개의 얼굴을 한 ‘아누비스’나 하반신이 뱀처럼 생긴 ‘이시스’는 물론, 온몸에 금칠을 한 파라오가 온갖 저주의 술수를 부리기도 한다.
또한, 거대한 스핑크스가 살아 움직이고, 딱 봐도 보물상자 같은데 막상 다가가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괴상망측한 것들도 다수 존재한다.
뭐,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경험한 이들이 말하는 얘기들이 그랬다.
아무튼.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도 딱 그런 피라미드였다.
그렇기에 ‘그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얼핏 비슷한 유형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그래서 불안했다.
하지만, 던전 마을에서 얻은 정보는 이곳에 그것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일단은 그들의 말과 정보를 믿었고,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었다.
‘제발… 이 지랄 같은 고생이 헛짓거리가 아니기를….’
드디어 눈에 보이기 시작한 피라미드.
더없이 부풀고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실망으로 물들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타이밍 좋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휘익!
왕울이의 등에서 날 듯이 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내 다그침에 미친 듯이 내달렸던 왕울이는 완전히 지쳐 버렸는지 배를 깔고 쓰러져 헉헉거렸다.
녀석에게 시선을 힐끔 주고는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멀리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있어 보이는 도심… 그것의 경계를 굳건하게 지키는 드높은 돌담의 벽과 화려함보다는 단단하고 묵직함이 더해진 거대한 문이 보였다.
두근두근….
가슴이 뜨겁게 요동쳤다.
울컥하는 기분도 들었다.
크고 깊은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오식이와 린을 불러냈다.
‘소환!’
눈앞의 전경에 오식이와 린도 잠시 말을 잊은 채 침묵했다.
한참 만의 침묵을 깨며 앞으로 나섰다.
“들어가자!”
거대한 문을 향해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녀석들도 왠지 비장한 기운을 풍기며 내 뒤를 따랐다.
거대한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딱히 그 앞을 지키는 보초도 없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고, 별다른 제재 없이 나올 수 있는 구조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벅저벅….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두어 발걸음쯤을 옮겼을까?
고막이 아닌 뇌로 전달되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금껏 여러 가지 것들을 알려 주던 신비한 목소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조금 더 성숙하고, 차분하며, 섹시한 느낌마저 드는 그런….
[어서 오세요.]
[성지 발할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폭죽이나 팡파르 같은 것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일단은 환대하는 느낌이라 괜찮았다.
“평화롭네요.”
“그렇지? 나름 안전지대라더니, 그 말이 맞았나 봐.”
이곳에 대해 알려 준 이가 그랬다.
그것… 엄연히 따져 괴물로 분류해야 하는 그것이 있음에도 이곳 안에서만큼은 싸우거나 전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안전지대와 같다고 말이다.
분위기가 그랬다.
평온하고,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특별히 느껴지는 살기도 없었다.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조금 더 마음을 놓고서 편하게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사실, 지금 상태는 최악의 컨디션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나름으로 구역을 나눈 듯한 울타리와 꽃, 나무, 여러 가지 장식들이 즐비한 곳을 지나니, 꽤 넓은 터가 나왔다.
그곳에는 여러 무리로 나뉜 ‘여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주인님, 아이들이에요. 뭐 하는 중인 걸까요?”
“글쎄….”
그냥 보기에는 놀이를 하는 것도 같았고, 어떤 것을 연습하는 것도 같아 보였다.
무리마다 제각각이라 정확하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시큰둥한 투로 말을 이었다.
“수업이라도 받는 모양이지.”
뭉뚱그려 수업이란 표현을 썼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포장해 놓으니 딱 그와 같이 보였다.
터가 하도 넓어 아이들을 피해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중앙을 가로질러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곧 내가 내린 선택에 후회하고 말았다.
빙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가까웠지만,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도 제법 긴 거리였고, 주의와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만만치 않은 민망함을 감수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힐끔힐끔….
역시나 아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나름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고 의식했지만, 턱밑부터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질 만큼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주인님, 아이들이 너무 예뻐요.”
나와 달리 린은 아이들과 눈을 맞추거나 주위를 둘러보며 걷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오식이와 왕울이도 별다른 문제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야? 나만 긴장한 거야?’
어쩐지 어이가 없어졌다.
꽤 많은 수이긴 했지만, 고작 이런 꼬맹이들의 시선에 민망해하고, 잔뜩 긴장한 것이 우습기도 했다.
“후우우….”
티가 나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쉬며 뻣뻣해진 어깨와 몸을 풀었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걸었다.
아직은 살짝 어색했지만, 주변과 아이들도 눈에 담았다.
‘온갖 인종이 다 모인 것 같네….’
아이들의 외모는 정말로 각양각색이었다.
바깥세상에서 크게 셋으로 분류한 황, 백, 흑의 피부색은 물론이고, 녹색과 적색, 파랑과 보라색 등의 특이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도 있었다.
헤어스타일과 머리카락 색도 정말 가지가지였다.
신의 능력 이상을 가진 헤어디자이너가 와도 전부 소화해 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아이들의 생김새가 하나 같이 예쁘다는 것이었다.
파랑 또는 보라색의 피부나 반삭, 펑키하고, 난해한 헤어스타일의 아이가 눈에 익거나 평범해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잘 빚어 놓은 예술작품 같다면 이해가 될까?
특이함이 아니라 어울림… 아니, 그것을 넘어선 딱 맞춤의 조화가 어여쁨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흐흐… 점점 더 기대가 되는데?’
다음 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