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10)
보통 이러한 경우….
그러니까, 약탈자들에 의해 작은 마을이 습격당할 경우, 공포감 조성이나 위협의 의미로 일종의 본보기를 보여 주게 된다.
그때 희생되는 이들은 대부분 노인이나 남자들이다.
왜?
전혀 쓸데나 필요가 없거든.
더불어 괜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은 포로로 잡아간다.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부리기가 쉽고, 잡스러운 일을 시킬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흠흠!
아이들은 복불복인 경우가 좀 있다.
그나마 양심이 있으면 살려 두기도 하고, 사악한 놈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고….
샤그란의 역사에 기록된 이 사건에서 정확한 사상자의 이름이나 수는 밝혀진 바가 없다고 했다.
정말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식이가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희생된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죽음을 세세하게 기록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긴 했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사건에서 어쨌든 간에 사상자가 나온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런 참혹한 일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도망이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우리 때문에 꼬여 버린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사건의 발단과 초기 상황은 ‘빼박’이었다.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이러한 미래를 더 알고 있었다.
바로 파스트였다.
우리가 마부투에 도착한 직후부터 오식이는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엔 파스트에게도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오롯이 혼자서 끙끙대며 상황을 파악하고, 헤쳐 나갔다.
그러나 사건의 해결사이자 중심인물인 차크무트는 물론, 7인의 영웅과 신녀조차도 제대로 찾을 수 없게 된 상황이 발생하자, 결국엔 파스트에게 내막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마부투의 족장인 파스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다스리는 마을에서 끔찍한 참변과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참으로 난감할 터였다.
솔직히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상황일 테니 말이다.
만약에 내가 파스트의 입장이었다면, 아마 마을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잠시 피신했을 것이다.
뭔가 꼬여 버린 상황에서 위대한 왕이나 영웅들이 등장할지 말지도 미지수였고,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오래 살아서 목숨에 미련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오식이가 두둔한 것처럼 오크의 드높은 자존심과 긍지를 보인 것인지, 그냥 평소처럼 마을에 남아 있기로 했단다.
물론, 다른 이들은 전혀 이 상황에 대해 모른 채였고 말이다.
‘오래 살았다고 다 현명한 건 아닐지도 몰라. 배짱도 부릴 때 부려야지… 쩝!’
아무것도 모른 채, 어르신이라며 그를 따르는 이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스트가 내린 무모한 똥배짱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론 일행들을 일부러 마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녀석들에게도 이번 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해 주지 않은 상태였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오식이에게 받은 특훈이 녀석들을 크게 성장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겨우 셋뿐이었고, 아직 성인도 아닌 터라 놈들을 상대하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부투의 유일한 전사 타입이 녀석들이니, 그마저도 없다면 상황은 더욱더 어렵고, 최악일 터… 그냥 대놓고 속수무책이 될 게 분명했다.
뭐, 그렇게 하기로 한 것에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역사에 기록된 사건과 조금이라도 일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놈들의 만행이 이어지던 중, 붉은 달과 함께 짜잔 하고 등장한다 했으니, 영웅이든 왕이든 녀석들이 마을에 없는 게 맞기는 했다.
‘하긴, 놈들이 가장 먼저 제거할 대상들이긴 하지.’
어째 이해도 되고, 불만도 생기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녀석들이 지금 이 순간에 마을로 향하고 있는 거지?
‘뭐, 뭐야? 어찌 된 일이지?’
당황스러웠다.
영문이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이 잘 못 됐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재잘거리는 것인지 투덕거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희끼리 얽히고설키며 앞으로 일어날 일도, 파스트와 오식이가 내린 결론과 계획도 아랑곳없이 마을로 향하는 녀석들.
‘잡아야 해!’
그래야만 했다.
닿을 리 없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크게 소리를 지르려 했다.
“읍!”
당장에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어, 코로는 달콤한 향을 뿌리고, 귀로는 살살 녹는 속삭임이 이어졌다.
“쉿! 놈들이에요.”
녀석들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타이밍도 지랄 같지….
이제 막 언덕의 코너를 돌며 정찰조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젠장! 무슨 이런 개떡 같은 경우가 다 있냐?’
린의 손이 입을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새어 나왔을 말을 속으로 해대며, 생각할수록 깜깜해지는 앞으로의 일을 떠올려야만 했다.
….
“젠장! 머저리 같은 놈들!”
낮게 소리 내며 불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한 탓이었다.
어째서인지 마을로 향하던 론 녀석들.
타이밍 좋게 마부투를 발견하고서 말에 박차를 가하던 놈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몸을 숨긴 채 언덕을 내려갔고, 마을 근처… 정확히는 마을 회관 뒤쪽의 울타리 근처까지 숨어들었다.
‘제발, 죽지만 말아라!’
언덕을 내려가던 중에 계속해서 속으로 빌었다.
그래도 정을 통한 녀석들인데, 눈앞에서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기도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아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마을로 쳐들어오는 놈들의 수는 열을 훌쩍 넘었다.
셋뿐인 녀석들이 아무리 용감하게 맞서 싸운다 해도 역부족일 게 뻔했다.
장렬한 전사….
뭐, 운이 좋다면 어디 하나쯤 잘리거나 크게 상처를 입고,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내 기도가 이루어졌다.
참으로 놀라운 일… 이기는 개뿔!
더없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랴! 이랴!”
거세게 말을 달려 순식간에 마을로 들어선 놈들.
그런 놈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론과 녀석들이 용감히 맞서기는커녕,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아대기 시작했다.
“아이고, 살려 주십쇼!”
셋 중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건 론이었다.
비그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머리를 들지도 못했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 주세요.”
린과 내가 차크무트 후보로까지 생각했던 리트는… 눈물에 콧물까지 빼며 엉엉 울어댔다.
“잘못했어요. 뭐든 다 잘못했어요. 엉엉!”
그 모습을 본 린이 ‘헐…’이라 한마디 흘리고는 그대로 벙쪄 버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오식이를 쳐다봤다.
“크르르….”
오랜만에 으르렁거리는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이없는 녀석들의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몸을 숨기는 게 먼저였다.
입구 쪽이나 놈들이 왔던 오른쪽은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울타리를 타고 왼쪽으로 돌았다.
‘썅! 죽지 말라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었잖아?’
속으로 빌고 빌었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은 괜찮았지만, 이런 의미나 상황을 원한 것은 아니었기에 갈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특훈은 어찌 된 거야?”
딱히 죄도 없는 오식이를 향해 따지듯이 말했다.
녀석이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낮게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해서, 한마디를 더 날렸다.
“오크는 죄다 용맹하다며? 저게 용맹스러운 거냐? 그냥 맹한 거지?”
이번에도 오식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옆에 있던 린이 말리듯 거들었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잖아요. 아직은… 이지만.”
어이없고, 황당하고, 화나고, 흥분된 터라 지금 상황이 좋은지 나쁜지도 판단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판단에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살폈다.
론과 녀석들은 무릎을 꿇은 채, 놈들이 겨눈 칼에 목을 맡겨 놓고 있었다.
말에서 내리지 않은 몇 놈 중 하나가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나와라! 숨어 있다가 발각되면 바로 목을 베겠다!”
놈의 외침에 바로 반응하는 바보는 없었다.
머쓱하도록 잠잠한 상황에 놈이 다시금 크게 외쳤다.
“지금부터 셋을 세겠다. 마지막 기회다. 하나! 두울….”
둘이란 외침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몸을 숨기고 있던 울타리 너머의 마을 회관 문이 열렸다.
끼이익….
진심으로 식겁했다.
거기서 누군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저벅… 툭….
저벅… 툭….
느릿한 발걸음과 딱딱하면서도 묘한 소리가 이어졌다.
당장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파스트!’
지팡이를 짚고 느릿하게 걷는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멈추시오.”
제법 힘이 느껴지긴 하지만,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쉰 소리로 외친 파스트가 몇 초쯤 뒤,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말을 탄 놈 하나가 당장에 파스트의 곁으로 다가가 칼을 겨누었다.
목소리를 놈이던 놈이 파스트를 향해 물었다.
“네놈이 이 마을의 족장이냐?”
“그렇소. 내가 이곳 마부투의 5대 족장이오.”
“5대건 6대건 내 알 바 아니고… 당장에 마을에 있는 놈들을 이곳으로 모두 불러내라.”
“이곳은 소박하고, 평범한 마을이오. 게다가 모두 챠큰(일반 오크)일 뿐이라….”
“시끄럽다. 그럼 이놈들은 뭐냐?”
놈이 론 일행을 가리켰다.
거짓말이 바로 들통난 꼴이었지만, 파스트는 굴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도 보시다시피 아직 어린아이들이오. 당신들에게 해코지조차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지 않소.”
파스트의 말에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본 다른 놈… 파스트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놈이 발끈하며 발을 치켜들더니만, 제 몸의 1/3도 되지 않을 힘없는 노인네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퍼어억!
“이 망할 늙은이가 어디서!”
놈의 발길질에 파스트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충격이 컸는지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여리면서도 앙칼진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이 나쁜 놈들아아아아!”
이번에도 목소리만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마부투의 유일한 내 친구 세타니였다.
“파스트님, 괜찮아?”
존칭과 반말의 조화가 웃기면서도 울음 섞인 목소리가 마음을 짠하게 했다.
더불어 세타니의 안위가 걱정됐다.
아니나 다를까….
“뭐야? 이 쪼그만 계집은….”
파스트를 걷어찬 놈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곧장 세타니의 반항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가만히 있어!”
“이잇….”
“아악! 이 버르장머리 없는!”
“꺄아악!”
보이지는 않지만, 상황이 얼추 그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로 미간이 꿈틀거렸고, 마지막으로 세타니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린 순간, 내 이성의 끈도 뚝 하고 끊어졌다.
벌떡!
최대한 숙이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오식이가 흠칫했고, 린도 당황하며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빨랐다.
탓!
눈앞의 울타리를 박차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면서 한 번 더 마을 회관의 벽을 발끝으로 딛고서는 더 위로 날아올랐다.
착!
흡사,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가벼운 몸놀림과 소리조차 거의 없는 착지를 선보이며 마을 회관의 지붕 위에 고이 안착했다.
놈들은 물론이고, 쓰러져 있는 파스트와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발버둥을 치고 있는 세타니의 모습까지 모두 눈에 들어왔다.
‘이 새끼가 감히 누굴…!’
더는 역사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던 다짐과 계획, 약속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허리춤에 찬 아수라 스워드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앙!”
실로, 격정적이고 우렁찬 포효가 천지를 뒤흔들듯 울려 퍼졌다.
‘하, 나 말고 흥분한 놈이 하나 더 있었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