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니 소환수가 생겼다 (103)
마을의 가장 끝에 있는 통나무집 앞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통나무집의 문이 열렸다.
끼이익….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저벅… 툭….
저벅… 툭….
느릿한 발걸음과 지팡이 소리가 어우러지며, 문 너머에서 깡마른 몸집에 허리가 반쯤 굽은 노인 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조그마한 여자아이 오크도 보였다.
‘아하!’
여자아이 오크를 보는 순간, 상황이 이해됐다.
마을에 막 들어설 즈음, 우리를 발견하고는 급히 줄행랑을 치던 아이가 하나 있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손목에 차고 있는 붉은 천은 기억에 남았다.
당시에는 그저 우리가 낯설거나 무서워서 피한 것이라 여겼는데, 소식을 전하러 이곳까지 뛰어간 모양이었다.
해서,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린 것이리라.
“나오셨습니까, 어르신!”
키 큰 놈이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작은 놈과 뚱뚱한 놈도 꾸벅하며 허리를 굽혔다.
이어, 키 큰 놈이 후다닥 뛰어가 노인 오크에게 뭔가를 한참이나 속닥거렸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 노인 오크가 우리에게 눈길을 줬다.
그에, 오식이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우리도….”
린에게 낮게 속삭였다.
린은 이미 인사 중이었다.
제일 늦었지만, 예의를 갖춰 허리를 구부렸다.
그 사이, 키 큰 놈이 말을 마치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이어, 노인 오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말을 전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마을의 5대 족장인 파스트라고 합니다.”
잔뜩 쉰 목소리에 힘겨움까지 더한 노인 오크… 파스트가 한 템포를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행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누추하지만, 편안히 쉬다가 가십시오.”
파스트의 호의적인 말에 우리도 다시금 그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론!”
“네, 어르신.”
파스트의 부름에 키 큰 놈이 즉각 대답했다.
파스트가 말을 이었다.
“손님들께 쉴 수 있는 자리를 내드리거라. 세 분이시니 마을 회관이 좋겠구나.”
“네, 어르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그.”
“예, 어르신!”
이번엔 뚱뚱한 놈이 크게 대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너는 손님들께 드릴 음식을 챙기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뚱뚱한 놈 옆에 서 있던 작은 놈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는 손을 번쩍 들었다.
“어르신! 저는 무엇을 할까요?”
“아아, 리트도 있었구나. 허허… 그래, 너는 여기 세타니와 함께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손님이 오셨음을 알리거라.”
“네, 알겠습니다.”
크게 대답한 작은놈이 여자아이 오크에게 손짓을 했다.
“세타니, 가자!”
여자아이 오크가 우리를 새침하게 힐끔거리고는 작은 놈을 따라나섰다.
이어, 뚱뚱한 놈도 자리를 떴다.
키 큰 놈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는 파스트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섰다.
그러자 파스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손님들부터 모시거라.”
“아,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키 큰 놈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가시죠. 마을 회관은 저쪽입니다.”
놈이 걸어왔던 길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오는 도중에 본 가장 큰 통나무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길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오식이가 말했다.
“먼저 가 있어라.”
“응? 너는?”
“나는 할 얘기가 있다.”
“누구….”
누구냐고 물으려다가는 말을 멈췄다.
녀석의 시선이 파스트에게 꽂혀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어, 그래. 먼저 가 있을게.”
그러라 하고는 발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갈 수가 없었다.
키 큰 놈의 반응 때문이었다.
“….”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키 큰 놈의 눈빛과 표정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파스트와 오식이만 남기고 가는 것이 문제인 듯했다.
그것을 알아챈 파스트가 인자한 투로 말했다.
“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니 어서 손님들을 모시거라.”
“예….”
마지못해 대답한 키 큰 놈이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파스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놈에게 파스트가 다시금 인자한 미소를 건넸다.
결국엔 놈이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천천히 놈을 따라나섰다.
“저기….”
마을 회관으로 가는 도중에 린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니라 키 큰 놈을 향해서였다.
“론 씨?”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도 그렇고, 오식… 아니, 미르다스 씨도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린의 말에 키 큰 놈… 론은 따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 거들려고 근질거리는 입을 애써 참았다.
‘진짜 나쁜 놈도 제 입으로 나는 나쁜 놈이라 하지는 않지….’
….
잠시 후.
예상했던 바로 그 통나무 건물 앞에서 론이 말했다.
“여기가 마을 회관입니다.”
린이 건물 쪽으로 한발 다가서더니, 약간의 오버를 담아 반응했다.
“와아, 굉장해요. 이렇게 크고 멋진 통나무집은 처음이에요.”
린의 오버에 움찔했다.
‘이렇게 크고 멋진 집이 처음이라고? 그럼, 저주받은 저택은? 하물며 그것도 목조 건물 아니었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건물로 향하는 다섯 개의 나무 계단을 올랐다.
린이 바로 뒤를 따랐고, 그 뒤로 론도 따라왔다.
처억….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문을 힘 있게 잡아당겼다.
오래되고 비틀린 탓에 제법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곧장 안으로 들지 않고, 열린 문 너머를 잠시 둘러봤다.
‘음… 마을 회관이라더니, 역시나 아무것도 없군.’
특별한 가구나 집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넓기만 한 곳이었다.
게다가 좀 지저분한….
“아차, 주무실 때 필요한 침구가 있어야겠네요.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아! 제가 사는 곳은 저기 저 천막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찾아 주세요.”
“네, 그러도록 할게요.”
등 뒤에서 린과 론의 대화가 이어졌다.
딱히 관심을 두지 않고는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네. 천천히 하셔도 돼요.”
론이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린이 곧장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제법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청소부터 해야겠네요.”
론과 대화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과도한 친절과 상냥함이 빠진 채였다.
‘갈수록 내숭이 느는군.’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아서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곧장 청소를 시작한 탓에 먼지가 한가득 휘날렸기 때문이었다.
….
린이 청소를 하는 동안, 이불과 베개 등을 챙겨 든 론이 왔다.
“왜 밖에 나와 계십니까?”
론의 물음에 막 답을 하려는데, 린이 등장했다.
“어머, 오셨어요.”
“아아, 네!”
“지금 청소 중이라서… 그것들은 이쪽에다가 잠시 내려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론이 린의 말대로 이불과 베개를 내려놨다.
“더 필요하신 게 있나요?”
“아직은 없어요.”
“네… 아, 청소 중이라고 하셨죠?”
“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
론의 친절에 린이 당황의 반응을 보였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익숙한 반응이었다.
청소가 주특기인 린은 혼자서 하는 걸 즐겼으니까.
아니, 도와준다고 옆에서 걸리적거리는 걸 싫어한다고 해야 하나?
린과 서약을 맺은 초창기, 남자로서의 의무감과 아량으로 호감을 좀 살까 싶어서 되지도 않는 친절을 고집했다가 단번에 까이는 수모와 민망함을 경험해야만 했었다.
‘으으으….’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그때의 기억과 함께 곧 있을 론의 민망함까지 몽땅 내게 전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이어졌다.
“그럼, 도와주시겠어요?”
“네. 뭐부터 할까요?”
“이것들 좀 먼저 치워 주세요.”
너무 의외의 전개라 고개를 돌려 둘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뭐지? 오식이처럼 린도 뭔가 영향을 받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 그건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아아, 그만! 일을 더 크게 만들면 어떻게 해요? 됐어요! 제가 할 테니까, 그냥 두세요!”
더없이 친절하고, 상냥했던 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내가 겪었던 것보다 더 크고, 강한 꾸지람과 귀찮음을 동반한 핀잔이 쏟아졌다.
청소를 도와달라고 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킥!’
겉으로 내색지는 않고 속으로만 키득거렸다.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이 된 론은 한껏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
“하아, 이제 좀 사람 사는 곳 같네요.”
린이 청소를 마쳤다.
린은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내 기준에서는 더없이 훌륭했다.
“수고했어.”
미소와 함께 린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러고는 막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건물 밖에서 괴상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맛있는 고기! 언제 먹어도 좋은 고기! 내 고기는 내 것! 네 고기도 내 것!”
노랫소리는 점점 커져 왔다.
이쪽을 향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활짝 열려 있는 문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기다렸다.
커다랗고, 봉긋한 실루엣과 함께 뚱뚱한 놈… 비그가 나타났다.
“맛 좋은 고기가 왔습니다.”
분명, 제 것이 아닐 텐데도 무척이나 신이 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은 모양.
어째, 오식이보다도 고기를 더 좋아한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린이 나서서 커다란 쟁반을 받아들었다.
“아, 무거워….”
“어이쿠! 그러다 아까운 고기를 다 흘리겠어요. 제가 들게요.”
약간의 소란에 이어 내 앞에 수북이 쌓인 고기가 놓였다.
‘헐… 이걸 다 어찌 먹으라고….’
오식이 것까지 준비했을 테지만, 그래도 엄청난 양이었다.
나와 린은 때려죽여도 다 먹지 못할 만큼이나 많았다.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뭐, 고기는 늘 맛있지만요.”
비그가 나와 린이 아닌 고기에 시선을 꽂은 채 말했다.
그러면서 애써 자리를 뜨는 듯 미적거렸다.
“비그 씨, 함께 드실래요?”
“아, 저는 따로… 그럴까요?”
느릿하게 뒤로 물러나던 비그가 쏜살같이 앞으로 다가와서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어, 양손으로 뻗어 고기를 잡았다.
“고기는… 찌이익… 우적우적… 항게 머거야… 우적우적… 꿀꺽! 맛있는 법이죠.”
해맑다.
아니, 행복해 보인다.
어쩜 이리도 행복하고, 즐거워 보일 수가 있을까?
‘헐….’
비그의 고기 먹방 쇼를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린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오식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쪽! 쪽!”
양손에 든 고기를 모두 먹어치우고 손가락을 빨아대던 비그가 한없이 행복한 표정과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혼자서 먹을 땐 더 맛있고요. 히히!”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양손으로 고기를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가는 비그를 쳐다보던 린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빠르게 속삭였다.
“주인님, 어서 드세요. 이러다가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아요.”
나 역시, 엄청난 양이라고 생각했던 고기가 이제는 모자랄 것 같다고 여겨졌다.
….
결국엔 그 많던 고기들을 전부 먹어 치웠다.
물론, 대부분이 비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편히들 쉬세요.”
만족한 표정으로 빈 쟁반을 챙긴 비그가 떠나갔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린이 떠나는 비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 대단하네요.”
“그러게, 오식이랑 한 번 붙어 봤으면 좋겠다. 누가 더 잘 먹는지….”
“저는 비그 씨요.”
“응?”
“비그 씨한테 걸게요.”
“야, 그러면 내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 나도 비그가 이긴다는 쪽에 걸 생각이었거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해 버렸다.
“그나저나 오식 씨는 언제 올까요?”
“그러… 어? 저기 왔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했던가?
문 옆으로 난 커다란 창에 오식이의 실루엣이 비쳤다.
“야, 거기서 뭐 해? 얼른 들어와!”
크게 소리쳤다.
그에, 실루엣이 움찔하며 놀랐다.
그러더니 냅다 도망쳐 버렸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