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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검의 제단.
볼텐은 살짝 쳐져 요염함이 느껴지는 붉은색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벽 한쪽에 비추고 패밀리어의 시선을 쳐다봤다. 화면에 나와 있는 것은 한 명의 검은 머리 청년으로 자신처럼 붉은색 눈을 가지고 있다.
볼텐은 새하얗고 매끈한 다리를 꼬고서 나긋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저 얼굴 본 기억이 있다.
언젠가 아스타로트가 주의하라며 보여준 남자의 이미지와 똑같았다. 이름은 분명 테드 크루시안이었던가.
그가 마을에 나타난 순간부터 판잣집에 있던 데비크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한 번 실험체가 빠져나가는 사태가 벌어진 이후 볼텐이 명령하지 않아도 침입자가 나타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배제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볼텐은 살짝 웨이브진 자신의 붉은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보통의 침입자라면 데비크 2,000마리로 충분할 것이지만, 아스타로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바알을 이길 정도로 강하다고 했다.
아스타로트는 만약 이곳에 테드 크루시안이 나타났을 경우를 상정하며 명령을 내렸다. 볼텐은 그 명령을 떠올리며 자신의 의자 한쪽에 있는 버튼을 눌렸다. 직속 부하들에게 연결된 마법 통신이 이어졌다.
“예! 볼텐님! 무슨 일 이십니까?!”
뻣뻣하게 긴장한 남성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여실히 들려왔다.
“너희들도 침입자가 나타난 건 알고 있겠지? 두 말하지 않겠어. 그걸 내보내.”
“그것이라 하신다면…?”
“말귀가 어둡네. 최근에 만든 그거 말이야. 세 마리 있었지? 전부 내보내.”
“아,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직 제어가 완벽하지 않은데 괜찮으신지?”
“상관없어. 시키는 대로해. 아, 그리고 여기로 침입한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지금 당장 실험체를 죽이고 자료를 없애.”
“당장 행동하겠습니다!”
부하의 씩씩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렸다. 상체가 흔들리며 얇은 천에 감싸인 커다란 가슴이 한 차례 출렁였다.
실험체를 죽이고 자료를 없애라는 것은 아스타로트의 명령이었다. 이미 자료의 대부분은 넘어갔기에 그다지 큰 문제는 없는 일이었다.
볼텐은 단숨에 마법 한 방에 단숨에 박살난 저택의 입구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그리고 저택을 지키고 있던 사탄교도들이 눈 깜짝 할 사이에 학살당한다. 그리고 2,000 마리에 달하는 데비크는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이 연구소는 중요도에 비해서 배치되어 있는 무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근처에 쳐져 있는 결계를 너무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스타로트는 이곳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패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테드 크루시안은 여봐라 라는 듯이 정문으로 나타나 난동을 피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몰래 침입해서 실험 자료를 노리는 것이 정답이다. 아스타로트의 골머리를 썩이게 만드는 장본인이니 그 정도의 생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놓고 활동하는 것은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가령 양동이라던가.
저쪽에는 사이나라는 서열을 가진 악마가 있으며, 최근에 바알이 저쪽에 붙었다는 사실이 확인 됐다. 바알이 저쪽에 붙은 건 절망스러운 정보지만, 대적할 자 없는 바알이 터무니없이 약해졌다는 정보도 같이 있었다.
“도망치는 길에 마주칠지도 모르겠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응.”
볼텐이 중얼거리며 요사스러운 붉은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욕망은 약해진 바알을 만날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바알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없으리라.
볼텐의 몸의 끝에서부터 안개로 변했다. 안개는 허공 속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 ⁂ ⁂
연보라색 머리칼의 소녀는 어딘가 중년 남성같으면서도 시원한 걸음으로 조용한 통로를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소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노출도가 높은 검은색의 핫팬츠와 탱크톱이다. 최근에는 감정 표현이 적으면서도 잔소리가 심한 은발 메이드 때문에 답답하기 짝이 없는 메이드복을 입었으나, 이 옷이야 말로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어울리는 옷이었다.
여유롭게 걸으며 이런저런 방을 확인하며 명령받은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자니, 모종의 소란스러움과 함께 통로의 끝에서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몰려왔다.
“어린아이? 연구소가 어수선해진 틈을 이용해 탈출한 건가!”
그들의 손에는 제각각 검이나 도끼같은 흉흉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날 끝에 묻어 있는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까지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원망하지마라.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을 테니. 조금 빠르고 편하게 죽게 되었을 뿐이다.”
일행의 선두의 선 남자가 피묻은 손도끼를 들고서 곧바로 달려들었다. 바알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향해 수직낙하 하는 도끼날을 손으로 잡았다.
바알은 그저께 악마 계약이라는 스킬 숙련도가 올라 최대 5%의 힘까지 사용이 가능해졌지만, 상대가 워낙 한심해서 1%의 힘으로도 충분했다.
“그걸 잡아?! 설마 각성자인가?!”
사람에게 억지로 사탄의 피를 주입했을 때, 크게 3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자멸하는 자들이다. 말 그대로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이 부작용을 보완할 방법은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아주 조금씩, 미량으로 사탄의 피를 주입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곧바로 데비크가 되는 자들이다. 정신력과 신체가 제법 뛰어난 모험가들이 성공적으로 데비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세 번째가 사탄의 피에 적응한 자들이다. 각성자, 혹은 적응자라고 불리는 그들은 매우 드물며 일반 데비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얻는다.
“각성자는 전원 배출되어 이곳에 없을 텐데?!”
“잠깐! 연보라색 머리의 실험체가 있었던가? 난 오늘 처음 보는데?”
남자들이 소란을 떨며 제들끼리 말하더니 두려움에 찬 눈으로 바알을 쳐다봤다. 도끼로 바알의 머리를 쪼개려던 남자는 손잡이를 놓고서 비틀거리듯이 뒤로 물려났다.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왜 그래? 아까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갔어? 사내새끼가 좆 달고 태어났으면 줏대 있게 행동해야지. 여자아이한테 쫄아 버리면 쓰나? 아, 혹시 동정이냐? 그럼 내가 이해하지. 뭐.”
남자에게 뺏어든 도끼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바알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여 나왔다.
도끼를 빼앗긴 남자, 모욕적인 말을 들었던 남자는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기다려라! 네가 각성자라면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겠다! 볼텐 님도 너를 어여삐 여길 게 틀림없다!”
“볼텐은 또 누구야? 아, 말하지 않아돼. 사실 관심 없거든. 그냥 니들은 지금 내손에 죽는 거야. 그 녀석이 생존자 빼고 죄다 죽이라고 했거든.”
바알이 도끼를 내던졌다. 어마어마한 힘이 서린 도끼는 공기를 찢어내며 남자의 머리를 박살냈다. 피와 함께 뇌수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도끼는 통로 끝의 벽에 박혔다.
“히익!”
“뭐, 뭐야! 보이지도 않았어!”
“제길! 괴물 새끼! 뭐해, 멍청이들아! 흩어져서 도망쳐!”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남자가 외치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는 좁은 통로다. 흩어져서 도망치기에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에겐 최악의 사실이었다.
바알이 움직였다. 이런 약한 놈들은 죽이는 건 재미도 뭣도 없지만, 다르게 말해 개미를 죽이는 정도의 수고 밖에 들지 않는다.
살짝 팔을 움직이면 죽일 수 있는 것들이다.
바알이 다리를 박찼다. 일순간에 가장 뒤에서 도망치는 남자의 등을 따라잡아, 그 후두부를 붙잡는다. 그리고 요령 좋게 머리를 당긴다. 목과 머리가 찢어지면서, 척추가 머리에 딸려 고스란히 뽑혀져 나왔다.
바알 류. 척추 뽑기.
“칫. 이것도 오랜만에 하니 잘 안되네.”
바알은 하얀 척추의 절반가량 묻어 있는 내장과 피를 보며 혀를 찼다. 본래라면 새하얀 척추가 딸려 나와야 했다. 500년이 넘게 사용하지 않은 바알 류(Bael 類)라 그런지 숙련도가 낮아진 것 같았다.
바알은 그대로 손에든 머리를 내던졌다. 허공에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간 머리에 달린 척추는 곧이어 다른 두 명의 남자의 목을 베어냈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달리던 몸은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다가 쓰러진다. 그들은 척추가 아니라 날카로운 검에 목이 베인 것 같았다.
바알은 그대로 다음 목표를 향해 뛰었다.
남자들은 필사적으로 도망가지만 바알의 눈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고, 한 번 발돋움하는 것으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남자의 등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대로 심장을 뽑아냈다.
기술이고 뭣도 없는 단순한 심장을 뽑아내는 기술이었다. 바알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헐떡이는 심장을 무감정하게 쳐다봤다. 손은 피투성이다. 요령 좋은 놈들은 손에 피를 붙이지 않고 심장만 뽑아낼 수 있다고 하는데, 바알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이, 이… 괴물!”
심장이 뽑힌 남자는 그대로 쓰러져 공포에 가득찬 말을 내뱉고서 죽었다. 바알은 괴물이란 말을 종족을 불문하고 질리도록 들어왔다. 정확하진 않지만 숫자로 따지자면 대략 2만 번 정도는 될 것이다. 절반 이상이 자신에게 도전했던 악마들의 입에서 나왔다.
“많이 듣던 말이라 질리는데. 최근에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기억이 잘 안 나네.”
바알이 심장을 던졌다. 심장이 땅바닥에 철푸덕 떨어져 모양을 일그러뜨렸다.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남은 것은 두 명이었다.
그들은 뒤에 느껴지던 인기척이 사라지자 도망치는 와중에도 뒤를 힐끗 돌아봤다. 그리고 통로에 널린 시체를 발견하고 공포에 질려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통로의 끝에는 갈림길이 있었다. 남은 것은 딱 2명. 살아남을 확률이 있을 것이다. 창백한
표정의 그들은 그렇게 헛된 희망을 가졌다.
바알은 제자리에 서서 무릎을 굽히고 그대로 점프했다. 작은 두 발을 감싸고 있는 굽이 한 남성의 등을 그대로 꿰뚫고 바알이 몸이 그대로 통과해 통로의 끝까지 날아간다.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난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바알류 드롭킥.
“으으윽….”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바알을 쳐다보며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바알은 피투성이었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피에 젖어 붉으면서도 몸에 달라붙어있다. 하얀 맨살에는 내장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사람이 아닌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넌 어떻게 죽여줄까? 응? 특별히 리퀘스트 받아 줄게. 아, 자살은 안 돼. 그건 씨발. 너무 시시하잖아? 뭐, 참신하게 자살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네가 그렇게 할 것 같아 보이진 않고.”
바알이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통로에는 방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방들은 물건을 모아두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당연히 비밀 통로같은건 존재하지 않았고, 마땅한 무기도 없었다. 무기가 있다고 해도 눈앞의 괴물에겐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괴물의 양옆에는 길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실헝용 데비크가 있는 곳이 나온다. 그곳에서 데비크를 이용해 이 괴물을 상대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지만, 이 괴물이 떡하니 앞을 지키고 있어서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뒤로 도망친다면? 다행히도 막다른 길이 아니지만 거리가 멀다. 뛰어봤자 곧바로 붙잡힐 것이다.
그래. 뛰어봤자 붙잡힌다. 거기에 사고가 닿자 남자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보통 뭐든지 하면 섹스부터 떠올리는데 말이야. 너 같은 새끼랑 떡치고 싶은 년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 응?”
조소를 담아 말하던 그녀는 문득 테드의 명령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실험 자료를 찾으라는 명령도 있었다.
“야, 실험 자료는 어디에 있냐?”
“그, 그건 연구실에 있습니다! 제가 안내 할 테니 부디 목숨만은…!”
“됐어. 생각해보니 귀찮네. 못 들은 걸로 할게. 실험 자료야 메이드 계집이 알아서 하겠지. 그 년은 악마에 어울리지 않게 성실하니까.”
바알 류. 가죽 먹기.
바알의 다리 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둠이 그의 몸을 감싸자, 남자가 몸을 흔들었다. 땅을 이리저리 구르면서 어둠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몸에 달라붙은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곧이어 어둠이 사라지고 새빨간 근육만이 남아 있는 해골이 드러났다. 그것은 잠시 몸을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바알 류, 가죽 먹기는 아주 옛날에 권능인 폭식의 사용 숙련도를 올리겠다는 목적으로 했던 수련 중 하나였다. 대상의 살가죽만을 먹어치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뼈까지 무심코 먹어버렸으나, 이제는 폭식의 세세한 컨트롤까지 가능해져서 지금처럼 가죽만을 먹을 수도 있었다.
바알은 시체에게 신경 끄고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고민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재미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바알의 눈에 안개가 보였다. 실내, 그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나타난 안개는 이내 사람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 키는 175 정도이고 검은색 짧은 치마와 소매가 없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바알은 커다란 가슴과 잘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와 시원하게 뻗은 양다리를 한 차례 훑어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오. 쌔끈빠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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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류는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아주 강력한 기술입니다. 비록 바알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요.
여담으로 뽑기 시리즈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