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29. 보랏빛 향기
29. 보랏빛 향기
주권결정전의 대표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각국의 대표들은 주권결정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시스템이 비춰주는 작은 화면을 통해 주권결정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
아스타로트는 굳은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시스템이 보여주던 작은 직사각형의 화면이 있던 곳이었다. 화면은 사라졌으나 그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스타로트의 옆에는 하품을 하고 있는 바론이 있었다. 주권결정전에서 무사히 전송된 바론은 지루한 표정으로 아스타로트를 쳐다봤다.
“언제까지 생각에 잠겨 있을 거야? 슬슬 씻고 싶은데. 가도되지? 응? 간다?”
바론이 멋대로 밖으로 나갔다. 아스타로트는 막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사소한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다. 바알이 졌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생사불명이다.
본래라면 자신의 앞에 나타나야 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었기에 죽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나타나지 않는걸 생각해보면 죽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거기다 바알을 상대하는 테드 크루시안도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위안이 되는 것은 그가 입고 있는 데미지는 충분히 중상이라 할 수 있는 치명적인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바알은 필요가 없다.”
아스타로트는 항상 최악의 수를 먼저 생각했으며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과 잃는 것을 계산했다.
그녀가 일신에 가지고 있는 무력은 분명히 두려울 정도였다. 곁에 있으면 든든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녀는 제어가 불가능했다. 자신에게 까지 해를 끼치는 까다롭고 위험한 힘이었다.
자신에게 사탄의 힘이 있는 이상 바알의 무력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더 나았다. 적어도 바알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사탄의 힘과 제물이 넘쳐나 악마를 소환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바알의 무력은 있으나 마나였다. 소도시 하나는 서열이 없는 악마 한 마리만을 보내도 멸망시킬 수 있었다.
지금 사탄교의 전력을 생각하던 아스타로트는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음을 알았다.
“신경 쓰이는 것은 테드 크루시안이다. 주권결정전이 무산되어 유토피아를 얻지 못한 건 아쉽지만…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겠지.”
바알이 나타나지 않을 걸 알았으면 구태여 천계의 문을 열지 않았을 텐데, 하고 아스타로트가 혀를 찼다.
“천사놈들은 성가시지만, 사탄의 힘이 없는 그것들은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지. 이제 계획을 시작하자.”
아스타로트가 천장을 쳐다봤다. 본래 거기에는 사탄의 심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을 뿐이었다.
“사탄의 부활을 위한 전주곡을.”
⁂ ⁂ ⁂
테드와 바알은 보라색 초원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나타나서 몇 시간을 지난 뒤에 알게 된 것인데 하늘에 떠있는 해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해가 저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날씨가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긴 던전일 가능성이 높지. 어딘가에 출구는 있다는 뜻이지.”
“야. 우린 벌써 1시간이나 걸었거든? 이 정도로 넓은 게 던전이라고?”
바알의 말대로 보라색 초원을 해가 떠있는 방향으로 1시간이나 걸었다. 그러나 출구는커녕 특이한 무언가도 보이지 않는다. 간혹 가다가 풀 사이를 기어 다니는 벌레같은 걸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던전이라면 으레 있을 몬스터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던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흔히 알고 있는 동굴 형태의 작은 던전이나, 시스템이 만든 대규모의 왜곡된 공간의 대규모 던전이나. 지금 같은 경우는 후자라고 할 수 있겠지.”
“주권결정전의 섬처럼 허수 차원 같은 거 말이지? 그냥 그렇게 설명하면 될 것을 뭘 그리 길게 말해. 병신아.”
바알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테드를 쳐다봤다. 테드가 입가에 조소를 담아 개처럼 걸으라는 명령을 담았다. 바알이 그대로 엎드려 양손바닥을 땅바닥을 짚어 2분 동안 네발짐승처럼 걸었다.
“멍! 멍멍! 멍멍멍멍!”
바알이 짖었다. 테드가 내린 개처럼 이라는 명령 때문에 언어도 개소리로 바뀐 것 같았다. 테드는 개의 언어를 알아듣는 능력따윈 없지만 분위기 상으로 바알이 욕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알. 네가 욕을 하지 않는 건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내게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어.”
“멍! 멍멍멍!”
“내 명령은 겨우 2분 밖에 통하지 않지. 하지만 말이야. 다르게 생각하면 2분마다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거야.”
“…….”
자신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을 파악한 바알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테드는 칭찬을 해줄 생각으로 바알의 연보라색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알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물었다.
“이년이!”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은 테드는 침 범벅의 손을 허공에 털었다. 그리곤 으르렁 거리는 바알을 보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긴 허수차원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던전은 공간을 왜곡해서 만드는 거니까. 허수 차원이면 여러 가지로 힘들 거야. 대표적으로 진입의 이유라던가.”
솔직히 허수 차원에 대해선 테드도 자세히 알고 있지 않다. 차원은 테드가 마법으로 다루는 공간이란 개념과 아예 다르고 연구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테드가 얻은 고대 지식 중에서도 차원에 관한 것은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인 지구와 이곳 네메스가 각각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만약 차원 이동 마법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낸다면 지구로 돌아가는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 해본적은 있었다.
“아, 씨발. 모르겠고. 넌 나중에 내 손에 뒤진다. 진짜 뒤진다.”
개에서 영장류로 진화하는 것에 성공한 바알이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테드는 코웃음치며 가볍게 그녀의 협박을 무시했다.
“여기가 던전이면 출구는 반드시 존재해. 너무 넓어서 아직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이야. 솔직히 이건 시스템의 실수라고 할 수 있는데…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스템 알림창이 안 뜨는 걸로 보아 해결해줄 생각은 없어 보여. 시스템인 주제에 은근히 일을 대충한다니까.”
테드가 시스템에 불평을 쏟아냈다. 완전무결할 것 같은 시스템은 의외로 빈틈이 많았다. 그건 바알이 아스타로트의 권능이라는 편범을 이용해 중간계에 찾아올 수 있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야.”
“응?”
“배고파. 밥 내놔.”
“……맡겨 났냐?”
“네가 내 주인 행세를 할 거면 밥 정돈 당연히 챙겨줘야 할 건 아니야?!”
“위대한 마왕님이라 수명도 무한하시지 않나. 어차피 굶어도 죽지 않을 텐데.”
“평소 상태였으면 달라고도 안했어. 아니, 공복도 느끼지 못했지. 지금은 에너지가 부족해. 이대로 있으면 굶어 죽는 것도 농담이 아니라고. 알겠냐?”
테드는 거만하게 말하는 바알을 향해 아공간에서 종이에 감싸인 음식을 꺼내 던지듯 건넸다. 그의 아공간에는 몇 년을 넘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먹을 것이 넘쳐난다. 겨우 음식 하나가지고 바알과 입씨름을 할 이유는 없었다.
“응? 뭐야, 이건.”
“햄버거도 모르는 건가. 그냥 종이를 벗겨서 먹어. 특별히 불고기 맛으로 줬으니까 감사하라고.”
바알은 서툴게 햄버거 종이를 벗겨냈다. 빵 사이에 야채와 고기가 들어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미심쩍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어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바알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씨발! 핵존맛!”
“……도대체 그 말은 어디서 배운거냐.”
“언제 인간의 요리가 이렇게 발전했지?! 내가 옛날에 중간계에 나타났을 때만해도 존나게 미개했는데!”
우걱우걱 햄버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게 눈 감추듯 햄버거를 순식간에 처리한 바알이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봤다.
테드는 틀림없이 그녀가 더 달라고 말할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테드의 예상을 넘어섰다.
“술 없냐? 갑자기 술이 땡기는데. 아니, 그 아공간에 분명히 있겠지. 술 내놔. 술!”
“없어! 없다고! 바지 당기지마!”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테드는 결국 술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술을 즐기지 않은 테드지만, 아공간에 아무거나 집어넣는 버릇이 여기서 도움이 되었다. 술병을 입에문 바알은 거짓말처럼 고분고분해져선 테드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온 제법 큰 마을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하나 네메스 대륙에 위치한 마을과 비교하자면 조잡한 마을이었다. 대충 지어진 목책은 마을 경계에 군데군데 지어져 있으며, 입구에는 경비병 하나 없다. 언뜻 보이는 주택들은 나무와 돌로 만들었으며 전부 1층으로 2층이상의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규모로 보자면 150~200 명 정도가 생활하는 건가. 아니. 사람이 던전에서 생활할 리가 없지. 이봐, 바알. 전투 준비다.”
“전투? 웃기지마. 아까도 말했잖아. 지금 내 전투력은 지나가는 고블린과 싸워도 진다고.”
“그건 아까의 경우겠지. 지금은 또 다르지. 바알. 난 널 계속 주의하고 있었어. 날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쯧. 눈치 하난 기가 막히네.”
바알이 혀를 찼다. 그녀는 본래의 자신과 비교도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에 말한 고블린과 붙어도 진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는 테드에게 받은 햄버거와 술을 받아 아주 적지만 에너지를 흡수했다. 그리고 아주 느리지만 착실하게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고블린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기는 것 까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권능을 사용한다면 또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근데 내가 나설 필요가 있나? 네 마법 한 방이면 그대로 산화할 마을이잖아.”
테드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을을 노려봤다. 조잡한 목책을 투시하고 내부를 살폈다.
“방금 말은 취소다.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어엉?”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건 몬스터가 아니야. 처음 보는 종족이다. 생활하는 것으로 보아 지능을 사람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 희소종족이야.”
겉모습은 인간과 매우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부와 머리카락 색깔이 보라색이라는 점이다.
“나쁜 소식은 여기가 던전이 아니라는 거지. 대충 돌아다니면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라졌어. 여기가 어딘지 저들에게 알아내야 해. 정보가 필요해.”
“잡아서 심문하겠다는 거네. 좋은거 가르쳐줄까? 본보기로 한 10명 정도만 죽이고 시작하면 알아서 받들어 모실꺼야.”
“그딴 짓은 안 해. 설령 한다고 해도 쉽지 않을걸. 저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나, 마을 중심에 설치되어 있는 마법진을 보자면 말이야.”
“그렇게 말해도 내 눈에는 안 보이거든?”
“……쉽게 말해서 저들은 베테랑 모험가 수준의 장비를 가지고 있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다르게 말이야.”
멀리서 확인한 마법진의 경우 보호 결계용이 아니라 생활용 우물 마법진이다. 한 번 설치하면 유지하기 위해서 상등급의 마석이 필요해서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면 사용하지 마법진이다.
테드와 바알은 마을의 안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사방에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경계와 함께 호기심이 섞인 눈초리였다. 다행히도 살의나 적의는 없었다. 테드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전투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했고, 바알은 주위를 둘러보며 시시하다는 듯이 손에 쥔 빈 술병을 만지작 거렸다.
“마을의 대표자는 누구지? 너희들을 해칠 생각은 없어. 내 말을 알아들 수 있나? 대표자와 이야기 하고 싶다.”
“…….”
테드는 사방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크게 냈다.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의 구조가 인간과 다르지 않다면 분명히 머리옆에 달린 귀로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검은색, 갈색, 파란색 등의 제각각 다른 색깔의 눈동자로 테드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대표자와 대화를 하고 싶다!”
테드가 다시 외쳤다. 네메스 대륙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원시부족, 문명과 발길이 끊어져 있으면서 자신들만의 언어를 구축하고 있는 경우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통역 마법을 사용해야 하나… 아니, 말뜻은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한데.’
자신이 말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2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을 힐끗 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우연일 수도 있으나 언어는 통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한…!”
“그만! 시끄럽군. 마을에 와서 큰소리로 고함치는 건 첫인상에 좋지 못하지. 다음 부턴 조심 하도록.”
2개의 문이 열리고 늙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늙었다고 해도 얼굴과 목소리만 그럴 뿐이고 얇은 천에 감싸인 몸은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탱탱한 근육질 몸이다.
“역시 말이 통하는군요. 다짜고짜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여기가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피부를 보고 예상했다만, 역시 외부인인가.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있군.”
노인은 테드와 바알을 살펴봤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방어구도 없었다. 특히나 어린 여자아이의 경우엔 저게 옷인지 천조가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어딜 보나 전투와는 거리가 먼 자들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우리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선조들은 이곳에 하스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너희들은 근 30년 만에 보는 외부인이군. 특별한 재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