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권 제11장 (11/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1장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재녀(才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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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우헌(千宇軒).

  천우헌은 장군부의 좌측에  위치한 아담한 소축(小築)으로써 이전

  까지는 누구의 거처였는지 모르나 지금은 혁련소천의 거처로 정해

  진 곳이었다.

  혁련소천이 장군부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났다.

  천우헌 주위를 감싼 온갖 기화이초들이 만발한 정원(庭園)은 그야

  말로 또 하나의 별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중앙에는 꽤 넓은 인공(人工)  연못이 있고, 그 옆에는 하나의 팔

  각정자(八角亭子)가 운치 있게 지어져 있었다.

  하나의 흑오목 탁자 앞에 한 소년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관옥(冠玉)같은 얼굴에 햇살같은 이마가 돋보이는 그 소년은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초하(初夏)의 양광(陽光)이  따사롭게 쏟아져  내리는 오후, 그는

  책에 온통 혼을 빼앗긴 듯 잠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흠, 서천책략(瑞天策略)을 읽고 있군. 아우는 진성공의 웅지(雄志)를 좋아하는가?"

  이때 매끄러운 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혁련소천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어느새 나타났는지 경장 차림의

  한 청년이 우뚝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안색이 창백한 이십팔구 세 가량의 그 청년은 일견

  키에도 강직, 대쪽같은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딱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멋진 조화를 이룬 그의

  체구는 마치 화강암으로 빚은 듯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그를 보는 순간 뜻밖에도 혁련소천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혀...... 형님!"

  "핫핫...... 아우, 사흘 전 얼굴만 내비치고 훌쩍 사라졌던 이 우

  형을 용서해라."

  혁련소천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을...... 소제는  형님이 다사다망한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일은 벌써 잊은 지 오래입니다."

  "후후후...... 녀석!"

  청년은 혁련소천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거린  후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바로 이 청년이 영호대인의 첫째 아들인 환우공자 영호환도였다.

  도감책 수령(首領)을 맡고 있다는 신비(神秘)의 고수!

  혁련소천은 사흘 전 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었다.

  당시 그는 영호환도의 기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남에 저

  으기 놀랐었다.

  "장군부에 사람은 많으나 우형은 그 동안 무척 쓸쓸했었다."

  "......."

  "허나 네가 돌아왔고 곧  있으면 둘째도 돌아온다 하니 이제야 집

  안에 활기가 넘치겠구나."

  영호환도는 연신 껄껄 웃으며 기쁨을 금치 못했다.

  혁련소천은 그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유쾌해짐을

  느꼈다.

  "헌데...... 둘째 형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혁련소천의 웃음띤  질문에 답하듯 영호환도  역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 년  전에 둘째는  해남검유문(海南劍儒門)의 제자로 들어갔단

  다."

  "아......!"

  혁련소천은 짐짓 탄성을 발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기실

  이 순간 혁련소천이 받은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해남검유문......!'

  노랫가락처럼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이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도 바로 이때였다.

  강북(江北)에는 검천(劍天)이......

  강남(江南)에는 검유(劍儒)가 있으니......

  그대여!

  함부로 빠름을 자부하지 말라.

  검천의 검영(劍影)은 귀신도 쫓아내고......

  그대여!

  함부로 강함을 장담하지 말라.

  검유(劍儒)가 하늘에서 웃고 있지 않는가!

  강북의 검천(劍天)!

  강남의 해남검유문(海南劍儒門)!

  검(劍)에 관한한  사상 최강(史上最强)으로 손꼽히는  두 개의 단

  체.

  검천.

  쾌(快)와 살(殺)과  동(動)을 주맥으로  삼으며, 문하생을 거둠에

  있어 출신 내력이나 숫자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해남검유문.

  변(變)과 유(柔)와 정(靜)을 위조로 하며, 철저히 일 인(一人) 직

  계를 고수해 오기 때문에  문파라고는 하나 실상 일대(一代)에 한

  명이 문맥(文脈)을 계승하고 있었다.

  영호환도는 혁련소천의  얼굴에 서린 감탄의  기색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우, 장군부가 비록 무림세가(武林世家)는 아니나 해남검유문보

  다는 훨씬 뛰어난 정통 무가(正統武家)임을 잊지마라."

  그 말에 혁련소천의 낯빛이 가볍게 붉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결국에는 너도 무(武)에 뜻을 세워야 함도 잊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영호환도는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우는 어떤 무학을 배우길 원하느냐?"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윽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조만간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핫핫핫...... 좋다! 아우의 그 기상이 마음에 들었다!"

  영호환도는 엄지를 곧추 세우며 호탕하게 말을 이었다.

  "타인은 너를 보고 유약하다고 말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 너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이다."

  "무슨 말씀을......."

  "아버님께 보여 드려라. 네가 이 우형보다 뛰어난 무인(武人)임을......!"

  "......노력하겠습니다."

  영호환도는 문득 혁련소천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주어 말했다.

  "아무튼 반갑다, 아우!"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일순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 중에서 뜨겁게 뒤얽혔다.

  잠시 후 영호환도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혁련소천의 어깨에서 손

  을 떼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오마. 그리고......  잠시 후면 옥소저가 너를 찾아올 것이다."

  "......!"

  "비록 이번이 첫대면이겠지만 그녀는 분명한 네 약혼녀다."

  "음......."

  혁련소천은 무겁게 신음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영호환도는 그의 그런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기억해라. 천하에 쌓인 것이 여인이다. 또한 영웅은 결코 여인의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

  혁련소천은 흠칫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영호환도는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허나 그의 음성은 분명히 혁련소천의 귓 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록 그녀가 네 약혼녀이고 뛰어난 미인일지언정 애정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두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파...... 파혼(破婚)을......?"

  (뒷일은 이 우형이 책임진다.)

  혁련소천은 멍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영호환도는 싱긋 웃었다.

  "아우, 장군부의 후예는 모두 호랑이와 용(龍)이다. 넌...... 위대한 영웅이 되어라."

  말이 끝나는 순간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영호환도는 이미 작은 점

  이 되어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영호환도가 사라진 방향에서  한동안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영호환도...... 예상 밖의 걸물, 아니 거목(巨木)이다......!'

  '영호대인이 도감책의 수령을 맡긴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구나......!'

  혁련소천은 내심 중얼거리며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순간 혁련소천의 눈빛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정자 밖에 한 여인(女人)이  그림같이 서 있음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 그는 여인이 정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날 때부터 그녀

  의 출현을 감지했었고, 영호환도 역시 그것을 눈치챘기에 불쑥 전

  음을 펼쳤던 것이다.

  그가 지금 이토록 놀라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햇살같은 광휘(光輝)를 휘몰고 나타난 여인의 얼굴!

  도저히 속세의 사람이라곤 여길  수 없는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그

  얼굴 때문이었다.

  천만 명의 여인에게 나누어 줄 미(美)를 모조리 한 몸에 간직하고

  나타난 듯한 이 여인.

  혁련소천은 일시에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만약...... 저 여인을  한 번 보고 외면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

  면...... 내 그를 결단코 첫번째 수하로 삼으리라!'

  웃을 텐가?

  천하의 천기개천  사사무같은 인물도 다섯째  수하로 삼으려 했던

  그가 아닌가!

  그 정도로 눈 앞의 이 여인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눈, 코, 입 등의 부분을  꼬집어 흔해 빠진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다면 오히려 그녀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녀의 그 어느 부분에서  흠을 찾아내느니 차라리 백사장의 모래

  알을 헤아리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

  이 하늘  아래 어찌 미녀(美女)가  한둘이겠냐만은 이토록 완벽한

  미(美)의 조화를 이룬 사람은 오직 이 여인뿐일 것이다.

  옥산랑이라 불리는 이 여인...... 그녀는 바로 혁련소천, 아니 영

  호풍의 약혼녀였다.

  대명(大明)의 정계(政界)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들며 과거 영

  상까지 지냈던  무관천자(無冠天子)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인물.

  어사대부(御史大夫) 옥부상을 부친으로 모시고, 당금 황제의 누이

  동생인 혜운군주(慧雲君主)를 모친으로 모신  더 이상 오를 수 없

  는 명예와 부(富)와 미모를 한 몸에 지닌 최고의 재녀(才女)!

  옥산랑은 그런 여인이었다.

  지금 옥산랑은 정자를 향해 천천히 옥보를 내딛고 있었다.

  흰 고양이를 품에 안고 머리에는  붉은 작약 한 송이를 꽂은 채로

  찬란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구름을 밟듯 사뿐사뿐 내딛어 오

  는 신비스럽고도 화려한 매력이여.......

  '흠.......'

  혁련소천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도 않을  초인적인 정력을 지닌 그가 아니었던가?

  이윽고 옥산랑은 혁련소천과 다섯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옥보

  를 멈추었다.

  이른 새벽 이슬 맞은 난초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천박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은,  그래서  더욱  신선하게  느껴지

  는.......

  옥산랑의 몸에서 풍겨 나온  육향(肉香)이 혁련소천의 콧 속에 은

  은히 스며들었다.

  일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조용히 맞닿았다.

  옥산랑은 몇 차례 봉목(鳳目)을 깜벅거리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듯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곳은 천우헌...... 당신이 영호삼공자이신가요?"

  짤랑짤랑 흘러 나오는 이런  류(類)의 음성을 일컬어 천상의 옥음

  (玉音)같다 하던가!

  혁련소천은 담담히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소, 옥소저!"

  순간 옥산랑의 봉목이 커졌다.

  "어머! 어떻게 소녀를......?"

  혁련소천은 짓궂게 히죽 웃었다.

  "소저가 나를 알고  있으니 나 또한 소저를  알 수밖에 없지 않겠소?"

  옥산랑은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허나 그녀는 곧 그런 표정을 지우며 화사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있는 말씀이시군요."

  만약 방금의 미소를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대번에 사고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리라!

  그녀가 무의식 중으로  짓는 그 미소는 그  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것이었다.

  옥산랑은 문득 봉목에 이채를 떠올렸다.

  "그 분이 뭐라 하시던가요?"

  "천하에 소저보다 아름다운 미인은 없다 하셨소."

  옥산랑은 입술을 앙증맞게 삐쭉거렸다.

  "피...... 영호대공자님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에요."

  혁련소천은 문득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천하에 쌓인 게 여자이니 구태여 옥소저의 환심을 사

  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소."

  옥산랑은 갑자기 엄숙해진 혁련소천의 표정이 우스웠던지 옥수로

  입을 가리며 나직이 웃었다.

  "후훗! 과연 영호대공자님다운 말씀이에요. 그래서...... 삼공자

  께서는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혁련소천은 여전히 엄숙하게 말했다.

  "환심을 살 필요는 없으나 구태여 무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속이 허옇게 들여다보이는 말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네가 좋으면  나도 좋고, 네가 싫으면 나도 싫다'

  그런 뜻이 담긴 말이었다.

  '후훗......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옥산랑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문득 탁자에 놓인 책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책은 진성공이 연 나라에  연금 됐을 때 사방의 모든 적에 대

  처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아는데...... 소녀가 틀렸나요?"

  "맞았소."

  옥산랑은 생긋 웃었다.

  "저 책을 읽는 목적을 여쭤 봐도 실례가 아닐는지......?"

  혁련소천은 의식적으로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생(生)이란 형극(荊棘)을 뚫는 게 아니겠소?"

  "그럴까요?"

  "아마 그럴 것이오."

  옥산랑은 문득 야릇한 시선을 혁련소천의 왼쪽 어깨에 던졌다.

  그 순간, 우연이었는가?

  문득 바람에 실린 꽃잎 하나가 혁련소천의 왼쪽 어깨에 살랑 내려앉았다.

  바로 그 시각, 천우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한 나무 위에

  한 인영이 굵은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누운 채 오래 전부터 혁련소

  천에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의 일신에 걸친  옷은 허름한 마의(麻衣), 뚜렷한 오관(五官)에

  옷 밖으로 드러난 살결은 희다 못해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나이는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인영의 가슴에는  한 자루의 목검(木劍)이  비스듬히 품어져 있었

  다.

  "저 녀석이 셋째인 모양이군."

  멀리 혁련소천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는 뜻밖에도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후후......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야...... 천하의 옥

  산랑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니......."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했다.

  "헌데...... 옥산랑이 언제부터 저렇게 얌전해졌지? 아니야......

  저러다가 불끈 본성을 드러내면 셋째의 갈빗대 하나는 쉽게 부러질 걸?"

  그는 씨익 웃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이 영호검제(令狐劍帝)가 저 옥산랑 엉덩이의

  살점을 두 근은 도려내고 말 것이다."

  그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듯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렸다.

  "셋째 저 녀석...... 장군부의 자식으로 부끄럽지 않은 놈이다."

  그는 문득 콧구멍을 후벼파며 두 눈을 야릇하게 빛냈다.

  "흐흐흣...... 어쨌든 기분 좋군. 집에 오자마자 저런 아우를 보게 되다니......."

  그 말...... 자칭 영호검제라 말한 이 청년......!

  한순간 영호검제의 신형이 누운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흐흐흣...... 이 꼴을 아버님께서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 지

  궁금하군......."

  그는 멀리 보이는 승륭무후전을 향해 비스듬히 쏘아져 갔다.

  허나 그 순간 영호검제가 미처 알지 못한 시선이 있었다.

  바로 한 쌍의 눈이 사라져  가는 그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선의 주인이 바로 혁련소천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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