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0장 대장군부(大將軍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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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장군부
는 물론 금릉 전체를 굽어보는 십팔 층(十八層)의 고루거탑(高樓
巨塔)!
그 전체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용(龍)이 승천하는 듯 웅장하고도
장엄했다.
뿐인가? 편액(扁額)에 씌인 글씨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시키고
있었으니 가히 사사로운 설명이 필요 없음이었다.
<승룡무후전(昇龍武侯殿).>
이곳은 바로 천위대장군 영호대인이 기라성같은 장군들과 더불어
대명(大明)의 정사(政事)를 의논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일단 이곳에서 결정되는 사항은 황제의 황명(皇命)과도
같은 권위를 발휘하게 되니, 이곳은 부(富)와 명예와 권위의 상징
인 동시에 또 하나의 자금성(紫禁城)이기도 했다.
영호대인은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국사(國事)만을 의논했다.
허나 사 년 전 부인(婦人)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거의 모든 생활
을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갖가지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한껏 만발해 있는 장군부 내 넓은
화원(花園)은 짙은 향기 속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도진악은 혁련소천과 함께 화원 사이로 난 청석대로(靑石大路)
를 묵묵히 걷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저만큼 환상처럼 우뚝 서 있는 승룡무후
전이 두 사람의 시야를 가득 메우며 들어왔다.
문득 사도진악의 나직한 전음성이 혁련소천의 귓전에 잔잔히 들려
왔다.
(대종사, 오늘 절대 한 푼의 허점도 드러내선 안 됩니다.)
전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련소천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사도진악은 두 눈 가득 은은한 긴장된 빛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입
술을 달싹였다.
"사 년 전 제가 사도진악으로 변신하여 이곳에 잠입한 이후 영호
대인을 볼 때마다 항상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
"조심하십시오. 그는 설혹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일점의 기색조
차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위인입니다."
혁련소천은 묵묵히 사도진악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사도진악 역시 그에게 눈길을 던졌다.
순간 혁련소천은 사도진악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불안
감을 엿볼 수 있었다.
허나 여전히 혁련소천의 눈빛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깊숙이 가라앉
아 있을 뿐이었다.
문득 혁련소천의 입가에 눈빛만큼이나 신비한 미소가 피어 올랐
다.
"그대는...... 비바람에 흔들리는 태산을 본 적이 있소?"
혁련소천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 한 마디에 사도진악은 움찔하는
충격을 느꼈다.
전방을 쳐다보며 유유히 걸음을 옮겨가는 혁련소천의 뒷모습을 바
라보는 사도진악의 두 눈엔 그의 모습이 태산보다 더욱 커다란 산
으로 비쳐 들었다.
― 비바람에 흔들리는 태산을 본적이 있소?
그 한 마디는 사도진악의 불안감을 쓸데없는 노파심으로 일축해
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난 지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종
사...... 그는 정녕 태산이 아니었던가?'
그는 안색을 활짝 피며 황급히 혁련소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혁련소천과 사도진악은 화원을 벗어나 승룡무후전의 문
앞에 당도했다.
맨 아래 층 입구의 육중한 철문(鐵門)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매사에 자신이 있다는
뜻...!'
혁련소천은 내심 생각하며 느릿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말이 십팔 층이지 밑에서는 아예 그 끝도 보이지 않았다.
뿐이랴? 만년흑오강석(萬年黑烏剛石)을 통째로 깎아 세운 듯한 각
층의 벽면에는 수십 마리의 용(龍)이 한꺼번에 승천하는 문양이
생생하게 양각되어 있어 그 위엄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
다.
여느 사람이라면 그 모습만 봐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과연 대단하구나......!'
혁련소천은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바로했다.
혁련소천과 사도진악이 막 문 앞에 들어서려는 순간.
"천성(天性)!"
돌연 냉막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 안에서 불쑥 터져 나왔다.
순간 사도진악의 입에서도 지체없이 한 마디의 대꾸가 터졌다.
"절적(節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 냉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대인께서는 지금 휴식 중이오. 술시(戌時)까지는 외인(外人)을
배견치 않으시니 그때 다시 오도록 하시오."
사도진악은 그 말에 위엄 있게 대꾸했다.
"나는 사도진악이다. 천간산의 삼공자께서 지금 막 도착하셨다."
"......!"
안으로부터 잠시 응답이 없었다.
"통과하시오."
잠시 후 예의 냉막한 음성이 한층 누그러진 채 흘러 나왔다.
사도진악은 혁련소천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이어 그는 성큼 앞장서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일 층(一層)은 탁트인 하나의 대전으로써 매우 넓고 화려했다.
이상스러운 건 넓고 화려함과는 달리 사람의 그림자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그러할 뿐, 혁련소천은 대전 안으
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대전에 숨어 있는 고수들의 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모두 삼십육 명(三十六名)...... 한결같이 어느 수준을 넘어선
고수들이다......!'
단장을 뚫어 보는 눈(眼)이라도 가졌는가?
혁련소천은 사도진악의 뒤를 따라 이 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유유
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팔 층(八層)까지 올라오는 동안 두 사람을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사도진악은 좌우를 한 차례 쓸어 본 뒤 다시 계단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같은 한 인영이 돌연 사도진악의 오른쪽에 불
쑥 나타났다.
사도진악은 일순 흠칫했으나 이내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나타난 인물은 양 손을 소매 깊숙이 넣고 서 있는 한 백의(白衣)
중년인이었다.
목상(木像)인들 이러할까? 마치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백의인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무표정했다.
어떠한 감정도 나타내지 않은 채 백의인은 사도진악의 얼굴을 똑
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사도총관이시오?"
억양도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지독한 무심(無心)의 음성이었다.
순간 백의인을 바라보는 사도진악의 얼굴에 한 가지 의혹이 일었
다.
"그대는 누구인가?"
백의인은 무감동하게 대꾸했다.
"이름은 피요궁( 搖穹), 보름 전 대인의 부름으로 이곳에서 일하
게 되었소."
"......!"
"사도총관, 당신에 대해선 대인께 많이 들었소. 차후 많은 가르침을 바라오."
백의인 피요궁은 마치 글을 읽듯 빠르게 말을 마치더니 혁련소천
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올렸다.
"피요궁, 삼공자께 인사드리오."
혁련소천은 미간만 약간 찌푸렸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 피요궁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예의 무심한 음성으로 말
했다.
"대인께서는 구 층(九層)에 계시니 올라가 보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요궁의 신형은 벽 속으로 스며들 듯 신비
하게 사라져 버렸다.
피요궁이 사라진 벽을 잠시 응시하던 혁련소천은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공자님, 구 층으로 오르시지요."
이때 사도진악의 공손한 음성이 혁련소천의 정신을 일깨웠다.
"음......!"
혁련소천은 급히 벽에서 시선을 떼고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가면서 그는 전음으로 물었다.
(그가 누군지 알겠소?)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무림에 피요궁이라는 고수는 없습니다.)
혁련소천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허나 그를 보니 연상되는 사람이 한 명 있소.)
사도진악은 움찔 했으나 묻지는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어느새 구 층 입구를 막아선 문 앞
에 당도해 있었던 것이다.
사도진악은 그 자리에 공손히 부복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인, 분부하신 대로 천간산의 삼공자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여 보내라."
곧장 안으로부터 조용한 음성이 들려 나왔다.
사도진악은 혁련소천에게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이어 그는 문을 향해 다시 한 번 머리를 읊조렸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했다."
조용한 대답이 흘러 나오자 사도진악은 연기가 흩어지듯 그 자리
에서 떠나갔다.
홀로 문 앞에 서 있던 혁련소천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어 그는 마음을 다진 듯 천천히 문쪽으로 손을 뻗혀갔다.
헌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혁련소천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지는 것
이 아닌가.
'음......!'
혁련소천은 실내 광경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오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겉모습이나 팔 층까지의 화려한 내부와는 달리 그가 본 실내는 매
우 소박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의 자줏빛 자단피(紫檀皮), 호피(虎皮)를 씌운 푹신한 태사의
가 그나마 화려한 물건으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태사의에는 전신을 깊숙이 파묻은 채 한 노인이 문 쪽
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책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눈보다 더 흰 백의(白衣), 반백의 머리는 뒤로 단정하게 빗어 넘
겼고 불그스레한 얼굴에 짧은 수염이 보기 좋게 자란 청수한 인상
의 노인...... 대명(大明) 최고의 명문 장군부를 이끌어 가는 천
위대장군 영호대인이 바로 이 노인이었다.
놀랍게도 천위대장군이라는 당당한 명호에도 아랑곳없이 그에게선
눈곱만큼의 무인(武人)다운 기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으나 영호대인은 이미 실내에 들어선 혁련
소천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책 위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
다.
혁련소천은 한동안 영호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어
천천히 바닥에 엎드렸다.
"소자 풍아, 아버님께 인사드립니다."
혁련소천은 공손히 세 번 절한 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호대인은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음, 십 년 만이구나."
그의 음성은 그저 담담했고 눈길은 여전히 책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했다.
"십삼 년...... 무척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음, 고생이 많았겠다."
영호대인은 대답과 함께 책장 한 장을 넘겼다.
이게 바로 십삼 년 만에 만난 부자지간의 대화라고 어느 누가 믿
겠는가.
"아버님은 여전하시군요."
담담히 흘러 나온 혁련소천의 말은 냉담할 정도로 감정이 없었다.
"뭐가 말이냐?"
"아버님은 지난 십삼 년 동안 소자에게 단 한 통의 서찰조차 주시
지 않았습니다."
"......!"
"사 년 전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천계 선사에게만
서찰을 주셨을 뿐 제게는 기별조차 안 하셨습니다."
영호대인은 묵묵히 또 한 장의 책장을 넘겼다.
"아버님은 무(武)를 숭상하시는 분, 그렇기에 선천적으로 허약하
고 보잘 것 없는 체질의 소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셨습니다."
혁련소천의 음성은 차츰 고조되어 갔다.
"해서 소자의 장래가 장군부의 명예에 오점을 남길 것을 염려하신
아버님은 저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복 아래 세 살밖에 안 된 저를
천계선사에게 떠맡기셨던 것입니다."
이때 영호대인은 책을 덮고 느릿하게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말이 많아졌구나."
혁련소천은 냉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님 덕분이죠."
"소견이 좁다."
"아버님만큼이나 좁을 것입니다."
"......!"
영호대인은 문득 혁련소천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돌연 시종 물처럼 고요하던 영호대인의 눈빛이 일순 독수리처럼
예리하게 번뜩였다.
허나 그것은 찰나였을 뿐, 영호대인은 예의 그 잔잔한 눈빛을 회
복하며 조용히 말했다.
"십삼 년 전과 달라졌구나, 너는."
혁련소천은 내심 뜨끔했다.
허나 전혀 내색치는 않았다.
영호대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느끼지 못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예랑을 많이 닮았어."
예랑... 그것은 이미 타계(他界)한 부인의 이름이었다.
"풍, 너는 알아야 한다. 이 아비가 장군부의 주인임을......!"
"......!"
"듣기로는 천계가 네게 무공을 전수했다고 하던데......!"
혁련소천은 고개를 저었다.
"소자는 익히지 않았습니다."
영호대인의 얼굴에 언뜻 의혹이 기색이 스쳤다.
허나 묻지는 않았다.
그는 혁련소천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어 조용히 말했다.
"강(强)해져라."
"장군부의 명예를 위해서 말씁입니까?"
"너를 위해서."
혁련소천은 영호대인을 똑바로 마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강해질 것입니다, 소자는.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 이미 한 분의 사부를 모셨습니다."
"사부?"
영호대인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그는 의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냐? 네 사부는......?"
혁련소천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감천곡이란 분입니다."
순간 영호대인의 안색이 확 변했다.
"...... 구천십지만마전의 군마천주 감천곡이 네 사부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영호대인은 일순 복잡한 눈빛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느릿하게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한 조각 편월(片月)의 잔광이 은은하게 창문 안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다시 옆으로 시선을 돌린 영호대인은 수중의 책자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갔다.
그는 책자를 천천히 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혁련소천은 영호대인의 두 눈 깊숙한 곳에 어떤 우수의 그늘이 스
쳐 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는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일까? 이 마음은.......'
기억하기에 혁련소천이 성장하면서 지금처럼 갑작스럽고 묘한 감
동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을 읽고 있는 영호대인을 묘한 감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혁
련소천은 곧 그런 생각을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물러가도록 해라."
혁련소천은 영호대인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어 그는 천천히 문 밖으로 물러 나왔다.
불씨를 안고 시작된 운명(運命)의 만남......
그들의 첫 대면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