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권 제6장 (6/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6장 거대한 운명(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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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시(戌時).

  해시(亥時)까지는 아직 한 시진이 남아 있었다.

  삼월(三月) 십오야(十五夜) 해시 정각!

  천하무림의 흐름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되는 그 시각의 의미를 알

  고 있는 사람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두두두두두!

  천간산에서 얼마 멀어지지 않은  관도(官道) 위를 자욱한 먼지 구

  름을 일으키며 질풍처럼  치달리는 십기(十騎)의 인마(人馬)가 있었다.

  마상(馬上)에는 모두 건장한 체구의 산뜻한 경장 차림의 무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 중 한 무사의 손에는 금빛 찬란한 깃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깃발에는 금박의 글씨가 힘찬 필체로 수놓여 있었다.

  <장군부(將軍府).>

  이 하늘 아래 사는 사람치고 그것이 금릉 대장군부를 상징하는 깃

  발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바로 금릉 대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맨 앞에는 전신에 흑포를  걸치고 우람한 체구에 구레나룻을 무성

  하게 기른 중년인이 타고 있었다.

  일견키에도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용맹한 기운을 전신으로 뿜어내

  는 호걸풍의 모습이었다.

  사도진악(司徒震嶽).

  장군부 주인인  영호대인(令狐大人)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 중 한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무가(武家)에서 자란 전형적인 무인(武人)이

  지만 그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영호대인을 제

  외하곤 아무도 없다.

  사도진악은 지금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인 영호풍을 맞이하러 가는

  중이었다.

  원래 영호풍은 타고난 체질이  병약하며 태어난 이래 하루도 질병

  이 떠날 날이 없는 선천적인 약골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영호대인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영호풍이 세 살 때의  어느 날 영호대인은 한 명의 중(僧)

  이 장군부 근처를 지나치는 것을 목격했다.

  현자(賢者)는 현자(賢者)를 알아본다고 한 눈에 예사 중이 아님을

  감지한 영호대인은 즉시 그 중을 장군부로 불러들였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결과 영호대인은 그 중이 자신이 생각했

  던 것 이상의 능력을 갖춘 고승(高僧)임을 확신했다.

  영호대인은 그에게 영호풍을 맡아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고승의 뛰어난  불력(佛力)을 빌어 영호풍의  체질을 바꿔 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다행히 중은 영호대인의  부탁을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천계(天戒)

  라 칭한 그는 영호풍을 데려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 십삼 년  후, 천간산 불영암(佛影庵)으로 오셔서 영식(令息)을

  데려가도록 하시오.

  두두두두두......

  사도진악 등 십기(十騎)는 어둠을 가르며 쉴새없이 질주해 갔다.

  달리면서 사도진악은 힐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휘황한 만월이 하늘 한복판을  덩그라니 차지한 채 은가루같은 달

  빛을 온 누리에 뿌려 내고 있었다.

  "한 시진 전이다! 좀더 서둘도록 하라!"

  사도진악과 수하들은 말의 복부를 더욱 힘차게 걷어찼다.

  두두두두두두......

  바로 그 시각.

  만월을 응시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선비 기질이 엿보이는 매우 준수한 용모의 은의(銀衣)중년인 이었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과 세 치 가량이나 뻗쳐 간 은빛 눈썹이

  그의 인상을 매우 독특한 분위기로 특징 짓고 있었다.

  그는 만월을 응시하며 계속 오른손을 흔들고 있었다.

  짤랑...... 짤랑......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쇳조각 부딪치는 음향이 규칙적으로 흘러 나왔다.

  "한 시진 후면 해시다."

  오나가나 해시 타령이다.

  도대체 오늘밤 해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단 한 치의 허점도 용납될 수 없다!"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는 중년인의  두 눈은 확고한

  신념의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 제갈천뇌(諸葛天腦)는 제 이(第二)의 영호풍을 탄생시키기 위

  한 이번 일에 모든 총력을 기울였다."

  제갈천뇌라면 혁련소천의 입에서도 한 번 거론되었던 이름이다.

  중년인 제갈천뇌는 문득 흔들던  손을 멈추고 신중한 표정으로 손

  바닥을 펼쳤다.

  손바닥에는 일곱 개의 동전이 기이한 형상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제갈천뇌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늘이 돕는다! 그렇다면 실패는 없다!"

  그는 다시 주먹을 꽉 쥐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남은 것은 여섯째 형 백변귀천(百變鬼天)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

  사찰(寺刹).

  말이 사찰이지 그것은 조그만 암자에 불과했다.

  아마도 무척 오래 전에 지어진 듯 기왓장 하나 담을 쌓은 벽돌 하

  나 하나에서도 짙은 고풍(古風)이 느껴진다.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승(老僧) 한 명만이 살고 있는 이곳의 입

  구에 세워진 바위에는 세 치 깊이의 글씨가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다.

  불영암(佛影庵).

  스스로 천계(天戒)라  칭한 고승이 살고  있다는 문제의 그곳이었

  다.

  향냄새가 짙게 풍겨나는 그리 크지 않은 선방에는 지금 잿빛 가사

  를 걸친 한 노승이 묵묵히 차를 마시며 방 중앙의 포단 위에 앉아

  있었다.

  눈썹은 서리같이 희어 귀  밑까지 늘어뜨렸고 허연 수염이 가슴을

  완전히 뒤덮고 있어 전체적으로 인자하면서도 중후한 기품이 느껴

  지는 노승이었다.

  이 노승이 바로 천계선사(天戒禪師)였다.

  "오늘쯤이면 장군부의 사람이 오겠군."

  천계선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노안에 문득 우울한 그림자가 깔렸다.

  "헛허...... 풍아 그 녀석과도 꽤 정(情)이 들었거늘......."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미타불...... 아직도 수양이 모자라는 도다."

  천계선사는 탄식 어린 불호를 읊조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때 문 밖에서 맑고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선사님!"

  천계선사는 번쩍 눈을 떴다.

  "풍아냐?"

  "그렇습니다."

  천계선사는 빙그레 반색의 미소를 떠올렸다.

  "들어오너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한 소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일견키에도 무척 준수한 미소년(美少年)이었다.

  다만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하고  어쩐지 병약해 보이는 게 흠이었

  다.

  바로 장군부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인 영호풍이었다.

  영호풍은 문을 닫고 천계선사의 맞은편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천계선사는 한동안 영호풍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씁쓸한 고소를

  떠올렸다.

  '쯧쯧... 십삼 년 동안 노력했지만 저 미간 사이의 검은 그늘만은

  없애지 못했으니.......'

  아닌 게 아니라 영호풍의  미간에는 거무스름한 그늘이 깔려 있었다.

  '허나 어쨌든 고질병은 치료했으니 최소한 칠십 세까지는 살수 있

  을 것.......'

  헛고생을 한 건 아니다.

  나름 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래 무엇을 하고 왔느냐?"

  영호풍은 씩 웃었다.

  "책을 좀 읽었습니다."

  "녀석...... 몸이 허약할진대 매사에 무리가 없도록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천계사는 웃음띤 얼굴로 자상하게 말했다.

  "손을 다오."

  "......!"

  영호풍은 그런 일이 몸에 밴  듯 지체없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오

  른손을 내밀었다.

  천계사는 묵묵히 그의 맥문을 짚어 보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진맥을 시작했다.

  잠시 후 천계선사는 영호풍의 손을 놓으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허(虛)한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구나. 앞으로 풍아는 내가 가르

  쳐 준 불문토납진기(佛門吐納眞氣)를 매일같이 수련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계선사는 거기까지 말한 뒤  찻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바닥에 글

  씨를 쓰기 시작했다.

  <풍아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글씨만 보아라.>

  "......?"

  영호풍은 의혹 어린 눈으로 천계선사를 쳐다본 뒤 다시 바닥을 응시했다.

  천계선사의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천기를 짚어 본 즉, 오늘 밤 네 신변에 극히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감지했다.>

  영호풍은 흠칫했다.

  "노선......."

  천계선사의 손가락 하나가 번개같이 영호풍의 입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글씨를 쓰던 그의 손가락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네 뒤쪽 벽의 족자를 밀치면 통로가 나타난다. 그곳에 가면 옷과

  인피면구가 있을 것이니 그것으로  네 모습을 변장하고 직접 혼자

  장군부로 가거라.>

  천계선사는 영호풍의 표정을 힐끗 살펴본 후 다시 글을 이어갔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즉시 실행토록 해라. 이것은 천기에 따르는

  대응책인 즉, 네게 닥칠 화를 미연에 방지코자 함이니라.>

  천계선사는 거기까지 쓰고 바닥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영호풍은 심각한 표정으로 천계선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더니 돌연 영호풍의 얼굴에 갑자기 괴이한 미소가 씨익 피어올랐다.

  "일곱 째의 말대로 제법 하는 중놈이었군."

  천계선사의 눈이 아연 휘둥그래졌다.

  "푸...... 풍아야, 너 지금......."

  "풍아? 제법 똑똑한 중놈인  줄 알았더니 형편없는 돌대가리군 그래!"

  순간 천계선사는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호풍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붕 떠오름과 동시에 그의 우장

  이 벼락치듯 허공을 갈랐다.

  천계선사의 동작도  빨랐지만 영호풍의 동작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헉!"

  천계선사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반사적으로 일장을 뻗어 냈다.

  꽝!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치면서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욱!"

  천계선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미처 신형을 가다듬기도 전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영호풍의 손이 그의 완맥을 갈고리처럼 움켜쥔 것이었다.

  영호풍은 그의 코 앞에 우뚝 선 채 차갑게 내뱉았다.

  "항마금강력(抗魔金剛力)인가? 이제 보니 아미(蛾嵋) 출신의 중놈

  이었군."

  천계선사의 눈은 더할 수 없이 확대되었다.

  "시...... 시주는 누구시오?"

  "백변귀천(百變鬼天), 그렇게만 알아라."

  "백변...... 그렇다면 풍아는......."

  "잘 모셔 두었다. 그리고 너와  영호풍은 이 시각부터 오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줘야만 되겠다."

  천계선사의 얼굴이 온통 경악과 불신으로 뒤덮였다.

  "도대체 당신이 영호풍의 모습을 어찌 그렇게......."

  그 말에 백변귀천은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어리석은 중놈아, 자고로 진정한 변장의 대가들은 외

  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심지어는 관상까지도 똑같이 하는 법이니라."

  "......!"

  "천하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나  백변귀천을 제외하곤 단 한 분밖에 없지."

  영호풍, 아니 백변귀천은 신비스런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비록 네가 천기는 바로 짚었으나 그것까지 짚은 사람이 있으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천계선사는 그 말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짚은 천기를 누군가 역으로 다시 짚었다고......?'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급히 물었다.

  "누, 누가 천하에 누가 그런 능력을 지녔단 말이오?"

  백변귀천은 괴소를 발했다.

  "후후...... 나의 아우 천우신기(天羽神機) 제갈천뇌와 또다른 한 분이시지."

  "또 다른......?"

  "나 백변귀천과 같은, 아니 나보다도 한 수위의 변장 능력을 지닌 그 분."

  이때였다.

  "천계대사 계시오?"

  문 밖에서 돌연 찌렁찌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계선사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장군부에서 왔구나!'

  백변귀천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비웃듯이 말했다.

  "흥분되는 모양이군, 땡초!"

  천계선사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놀랍게도 백변귀천은 온데간데 없고 그의 앞에는 또 한 명의 천계

  선사가 우뚝 서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다른 점은 털끝만치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사 쌍둥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는 없다.

  갑자기 섬뜩한 예감이 천계선사의 머리 속을 스쳐 갔다.

  '음모(陰謀)! 이건 무서운 음모다!'

  내심 부르짖는 그 순간 그는 목덜미와 허리 부근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이 동시에 제압된 것이다.

  "죽기 싫으면 숨도 크게 내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땡초!"

  백변귀천은 속삭이듯 으름장을 놓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곤 문 밖을 향해 조용히  말하는 데 목소리며 그 모습이란 천

  계선사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미타불...... 누구시오?"

  천계선사는 아예 넋을 잃고 말았다.

  문 밖에는 십 기(騎)의 인마가 달빛 아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늘

  어서 있었다.

  바로 사도진악을 위시한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천계선사가 문 밖을 나서자  사도진악 등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섰다.

  사도진악은 천계선사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장군부 사도진악, 선사께 인사드리오."

  백변귀천은 합장하며 인자스런 웃음을 흘려냈다.

  "허허...... 어서 오시오. 사도시주!"

  "제가 온 것은......."

  "허허허...... 알고  있소이다. 풍아는  귀곡천류하에서 밤낚시를

  즐기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 보시오."

  "선사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사도진악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훌쩍 말 등에 올라탔다.

  백변귀천은 웃음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영호대인께 전해 주시오."

  "무슨......?"

  "빈승은 곧  불영암을 떠나 천하를 주유할  예정이니 훗날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잊지 않고 전해 드리겠소. 그럼......."

  사도진악은 다시 포권을 취한 뒤 말고삐를 힘껏 거머쥐었다.

  이어 막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사도시주!"

  "......?"

  사도진악은 멈칫하며 천계선사를 돌아보았다.

  사도진악을 바라보는 천계선사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해시까지는 풍아를 만나게 될 것이니 밤길에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가도록 하시오."

  사도진악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갔다.

  백변귀천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사도시주께서는 풍아의 모습을 알고 계시오?"

  "그건......."

  "인중용봉의 소년이 푸른 낚싯대를 들고 있으니 그가 바로 풍아외다."

  "거듭 감사드리오."

  사도진악은 짤막한 대답과 함께 힘껏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말들은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을 토하며 힘차게 앞발을 내딛었다.

  두두두두두......

  사도진악을 비롯한 십  기의 인마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신태비범한 한 황의노인(黃衣老人)이 우뚝 서 있었다.

  송충이처럼 짙고 시꺼먼 눈썹에  횃불같이 타오르는 한 쌍의 호목

  (虎目)에서 항거할 수 없는  위엄과 냉오한 기질이 엿보이는 인물

  이었다.

  일견키에도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옷은 걸레처럼 찢어지고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첫눈에도 악전고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주위는 전신을 먹물같은  흑포로 휘감은 십 명의 복면인들에

  의해 둥그렇게 에워싸여 있었다.

  전광(電光)처럼 번뜩이는 눈빛과 유연하게 빠진 몸매들이 결코 예

  사 고수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끔찍한 광경인가?

  놀랍게도 사방에는 최소한 백오십여 구는 됨직한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 있지 않은가?

  보이느니 시체의 산이요 밟히느니 피의 강이라!

  지옥(地獄)이 따로 없었다.

  비릿한 피냄새로 가득 찬  공간 속으로 황의노인의 웃음소리가 울

  려 퍼졌다.

  "흐흐흐...... 이 무림에 나 철장마제(鐵掌魔帝) 감천곡을 이렇듯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자가 있었다니......."

  피냄새만큼이나 비릿한 음성이었다.

  철장마제 감천곡은 소름끼치도록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주위를

  쓸어 보았다.

  "대체 네놈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나 감천곡

  을......."

  파파파팟!

  위이이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십  명의 복면인들이 아무 소리도 없이 일

  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劒), 도(刀), 편(鞭),  장(掌) 등의 공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

  다.

  감천곡의 눈에서 시퍼런 불똥이 피어 올랐다.

  "크흐흐흐...... 좋아  좋아! 나 감천곡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다음 순간 그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며 천둥같은 대갈을 터뜨렸다.

  "내관(內官), 외관(外觀), 소부(少付),  합곡(合谷), 철(鐵)의 기

  운을 오지(五指)로 모은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찰나지간에 시꺼먼 쇳빛으로 변했다.

  찌르르르릉!

  괴이하게도 고막을 찢을 듯한  쇳소리가 그의 손에서 뇌성처럼 터

  져 나왔다.

  한창 기세 좋게 덮쳐 들던 복면인들은 갑자기 귀청을 감싸쥐며 일

  제히 멈칫했다.

  감천곡의 입 밖으로 날벼락같은 광소가 터져 나온 것도 그때다.

  "와하하하......  구철마수(九鐵魔手)의 제  일식(第一式) 철륜풍

  (鐵輪風)!"

  츠파파파팟!

  쉬아아앙!

  고막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철편(鐵片)같은 강기( 氣)가 사방으

  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광섬(光閃)을 방불케 하는 그 엄청난 속도!

  피하고 말고 할 생각조차 할 겨를도 없이 철편같은 강기는 복면인

  들의 머리, 목, 배 등을 사정없이 앞뒤로 관통시켜 버렸다.

  열 명의 복면인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은 완전히 한순간이었다.

  구철마수(九鐵魔手)!

  공포(恐怖)의 신기(神技)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열 명의  복면인은 죽는 순간에도 비명을 내지른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감천곡에게도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이놈들은 대체......."

  그는 한 시신에게 다가가 복면을 홱 낚아챘다.

  감천곡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복면 속에 나타난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제멋대로 짓뭉개진  그 얼굴은 잘  다져진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감천곡은 눈살을 찡그리며 시신의 입을 벌렸다.

  입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할 혀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바로 나다!"

  "......!"

  감천곡은 대경하여 빙글 돌아섰다.

  언뜻 만월 속에 하나의 금빛 그림자가 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본 것은 그것뿐이었다.

  꽝!

  감천곡은 미처 영문도 알기 전에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받

  았다.

  "우― 욱!"

  그는 피분수를 내뿜으며 뒤로 거세게 퉁겨 나갔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음산한 한  줄기 음성이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잘 가라, 감천곡! 구천십지만마전의 구천마제(九天魔帝) 중 제일 먼저 죽는 것이다!"

  번― 쩍!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금광(金光)이 무서운 속도로 감천곡을 덮쳐 왔다.

  막 신형을 가다듬던 감천곡은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대력금황기(大力金皇氣)!"

  놀라는 바람에 그는 피할 여유를 놓치고 말았다.

  꽝―!

  "크아아악!"

  감천곡의 앞가슴이 종잇장처럼 터지면서 낙엽처럼 휘날려 갔다.

  멀찌감치 날려 가는 그의 발  밑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천길단애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단애는 감천곡의 몸과 비명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스윽!

  한 인영이 흡사 환영처럼 절벽 끝단에 떨어져 내렸다.

  일신에는 화려한 금의(錦衣)를 걸쳤고 얼굴에는 같은 색의 복면을

  목덜미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절벽 아래를 응시하더니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두고보라! 구천십지만마전! 늦어도 오 년 이내에

  너는 내 것이 되고 말리라!"

  그리곤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해시(亥時)를 정확하게 일각 남겨 둔 시각이었다.

  "해시다......."

  보름달이 폭포의 한쪽 절벽  끝에 걸쳐지는 순간 혁련소천의 눈빛

  이 날카로운 빛을 뿌렸다.

  그는 여전히  귀곡소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낚시는 이미

  관심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시꺼먼 물체 하나가 물기둥에  휩쓸려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다!"

  쉬이익!

  낚싯줄이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는 물체를 향해 쏘아졌다.

  낚시바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물체의 끄트머리를 꿰

  뚫었다.

  휙!

  물체는 낚시바늘에  걸려 정확하게 혁련소천의  옆에 떨어져 내렸

  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구의 시신(屍身)이었다.

  혁련소천은 시신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

  다.

  '됐어!'

  바로 그때,

  "삼공자(三公子)님!"

  한 소리 웅후한 외침과 더불어 십 명의 인물이 혁련소천의 뒤쪽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사도진악을 비롯한 장군부의 무사들이었다.

  그 순간 혁련소천의 눈가로 한 줄기 실낱같은 광채가 스쳐 갔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아.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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