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242화 (242/250)

<목을 베다. (8)>

그리고 시간이 멎은 것처럼 앉아 있던 박정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테이블을 짚는다. 하지만 균형을 잃고 테이블과 함께 와장창 넘어졌다.

“아, 아, 아…….”

박정길은 주저앉은 상태에서도 발버둥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입에서는 두려움 가득한 신음 소리가 흐르고 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주, 죽었잖아.”

“저기…… 박정길 씨?”

“죽었어야 하잖아!”

박정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직원이 들어오면, 서진이 이곳에 온 게 김영준 총장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

서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박정길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섰다.

“안 죽었으니까, 조용히 하죠.”

“씨발!”

박정길이 시뻘건 눈을 치켜든 채 욕설을 내뱉었다. 서진이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박정길의 귀에 대고 서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조용히 하자고 말했는데…….”

그 순간, 서진의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 * *

저벅저벅.

박정길이 아파트 계단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5층을 지나 옥상의 문으로 향한다. 잠겨 있어야 할 옥상의 문이 끽 소리와 함께 열렸고 박정길은 옥상에 들어섰다.

음산한 바람이 박정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박정길은 초조한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왜 이런 곳으로 부르고 있어요?”

박정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정길이 천천히 고개를 틀자 서진이 보였다. 서진이 박정길의 앞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원주에 있다면서요?”

“거,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주세요.”

서진이 손을 뻗으며 박정길의 앞에 섰다. 하지만 박정길은 어떤 대답도, 행동도 없이 담배만 피워 댔다. 서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요구 조건이 또 있나? 보상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잠시만요……. 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할 시간, 5분 드리죠.”

서진이 박정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쪽에게 해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생각하세요. 지금 그쪽은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을 치우는 중이에요.”

서진의 말에 박정길이 낮은 음성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네요. 김영준 검사장은 제가 만들어 낸 괴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괴물이었습니다.”

서진의 시선이 옆으로 틀어졌다. 무심한 눈빛으로 박정길을 바라보고 있다. 박정길이 담뱃재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박정길의 알 수 없는 말에 서진의 눈이 찌푸려질 때였다. 옥상의 문이 덜컹 열리며 지저분한 옷을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하다. 딱 봐도 호의적이지 않다.

무심하던 서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채워졌다. 서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박정길을 바라봤다.

“김영준이 시킨 거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네요. 전 평생을 갇혀 살겠죠. 그래도 장부가 있으면 죽지는 않고 연명할 겁니다.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사이 지저분한 옷을 입은 사내들은 어느새 서진의 앞에 서 있었다. 서진은 억지로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슬쩍 고개를 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곳은 저층 아파트의 옥상, 시커먼 아스팔트가 아찔하게 보인다. 서진이 다시 시선을 틀어 앞에 선 놈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담배 하나만 피우자. 영화에서도 담배 피우는 시간은 기다려 주던데…….”

가장 앞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담배와 라이터를 건넸다. 서진은 몸을 틀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문 후 놈들 모르게 슬쩍 휴대폰을 꺼냈다. 이어서 불을 붙이는 척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동남지청에 있는 김서진. 서준경 검사의 성폭행 누명.

모든 것은 단문이다. 최대한 요약하는 중이다. 이 정도만 해도 상대가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신주언 보좌관. 누명을 벗으면 바로 김영준. 부…….

연락처는 놀랍게도 이동영 수사관이었다. 서진은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했고 김영준을 상대할 사람으로 일면식도 없는 서준경 검사를 찍었다.

서준경 검사가 성폭행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사를 받는 중이지만, 의혹이 풀리면 그 칼은 반드시 김영준에게 향할 것이라 믿어서다.

하지만 미처 메시지를 다 작성하기도 전이었다. 담배를 줬던 놈의 손이 쑥 들어왔다.

“……!”

놈의 우악스러운 손이 서진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가소롭다는 눈으로 서진을 보며 끌끌 웃는다.

“공부만 했던 분이라 그런지 잔머리를 쓰네?”

놈의 말투는 어눌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거다.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절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을 뿐이다. 놈의 시선이 천천히 휴대폰의 화면으로 틀어졌다.

“누명을 벗으면 바로 김영준. 부? 부가 뭐야?”

“…….”

“뭐,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

놈이 귀찮다는 듯 말을 내뱉으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서진의 앞으로 남자들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살기 가득한 눈으로 서진의 몸을 틀어잡는다. 서진은 겁먹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꿈에서 보자, 개새끼야.”

박정길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연신 담배만 피워 대고 있었다. 사내들에게 잡힌 서진의 몸뚱이는 너무도 손쉽게 난간 밖으로 집어 던져졌다.

곧 ‘쿵!’ 소리가 들리며 박정길이 눈을 질끈 감았다.

* * *

사이코메트리가 끝나고 서진의 눈앞에 박정길이 보였다. 박정길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몸을 후들후들 떨며 손을 비벼 대고 있다. 살려 달라고 말하는 거다.

서진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박정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끄럽게 굴면, 당장 죽여 버릴 거야.”

서진은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놈이 목숨에 집착하는 것을 봤다. 그동안 깡패로 살며 수없이 많은 목숨을 앗아 갔던 놈이기에 그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알아들었으면 끄덕여.”

서진의 살기로 가득한 목소리에 박정길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진이 박정길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치우며 말했다.

“네가 주기로 했던 것…… 받으러 왔는데.”

하지만 박정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긴장된 숨을 내쉬고 있는 게 전부다. 놈은 이 상황에서도 김영준 총장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 방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도 없고 휴대폰 등 정보를 얻을 만한 기기도 없다. 완벽히 통제된 공간에서 놈은 밖의 상황과 차단되어 있었다.

그럼, 진실을 알려 줘야 한다. 서진이 휴대폰을 꺼내 김영준 총장의 기사를 검색 후 놈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똑바로 봐.”

박정길의 눈이 커졌다.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기사는 모두 김영준 총장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재정건설의 돈을 꿀꺽한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는 중이라는 것. 엄 회장의 집을 압수 수색하며 그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

“이, 이게…….”

박정길의 목소리가 더듬거렸다. 김영준은 시궁창 같은 세상을 기어 오른 괴물이다. 이렇게 무너지고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다.

서진이 박정길의 어깨를 가볍게 쥐며 말했다.

“김영준은 사라질 거야. 네가 그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거지.”

“…….”

“내가 이긴 거야. 그러니까, 이제는 나한테 붙어. 그럼, 목숨은 연명하게 해 줄게.”

* * *

“내일, 원주로 가 주세요. 주소는 보낼게요.”

그날 밤, 서진은 춘천의 한 호텔에 앉아 장지혁 검사와 통화하고 있었다. 장지혁 검사는 이두진 변호사가 있는 특검의 일원이며 김영준 총장을 잡아낼 때, 최일선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서진은 지금 상황에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박정길이 말한 것처럼, 김영준 총장은 괴물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지금은 모든 위험 요소를 염두에 둔 채 움직여야 한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수십 년 전, 김영준 총장은 박정길에게 1억을 받았다.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난 돈, 게다가 토지 보상금으로 받은 것의 몇 배다.

그리고 그때 돈을 받은 통장 사본, 김영준의 이름이 명확히 찍힌 그것이 원주의 한 시골집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서진은 그 정보까지 장지혁 검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은 모든 걸 가려야 할 때다.

“그럼, 조심히 움직여 주세요. 위험하니까, 장석민한테 연락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장지혁 검사와의 통화가 종료됐다. 서진은 긴장된 한숨을 내뱉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는 앞으로 있을 모든 위험 요소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치는 사람이 없어야 해…….’

김영준 총장은 구석에 몰릴 거다. 놈은 자신이 살기 위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서진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번에는 이소희다. 춘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만큼 이소희와 가볍게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퇴근했어. 어디야?

“자주 보던 호프집에서 보자. 지금 갈게.”

-호프집 말고, 프라이빗한 곳으로 가자.

* * *

즐거워야 할 술자리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서진은 이소희와 한정식집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모은 비리는 이은하 기자한테 전해 줬어. 내일부터 하나씩 터뜨릴 거래.”

이은하 기자가 있는 언론사, 그들은 백기호 의원이 무너질 것이란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백기호 의원을 박살 내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을 때 그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서류를 툭툭 넘기던 서진이 시선을 들어 물끄러미 이소희를 바라봤다.

“괜찮아?”

서진은 백기호 의원이 이소희를 찾아왔고 어떤 난동이 있었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스럽게 물었는데, 이소희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엄마한테 계속 전화 오는 거 말고는 괜찮아. 오늘 서른 통은 받은 것 같아.”

지금도 이소희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다. 이소희가 휴대폰을 무음으로 만들어 둔 후 계속 말했다.

“뭐, 어쨌든…… 내일 총장을 벼랑 끝에 세울 거라고?”

“어.”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찾아왔다. 이제 앞으로의 미래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선 주자를 끌어내리고 있다. 검찰총장을 잡으려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에게 칭찬해 주지 않는다. 그 마지막은 유배 또는 옷을 벗어야 할 상황이다.

이소희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건배.”

* * *

다음 날.

무서운 표정으로 신문을 읽던 김영준 총장이 입술을 꾹 씹었다.

“미친 새끼들이…….”

헤드라인에 떡 적힌 것은 ‘백기호 의원, 강직한 판사의 뒷거래’, 그리고 그 아래에 박힌 사진에는 백기호 의원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다.

김영준 총장이 콱, 콱 소리가 날정도로 신문을 구겼다. 최근 되는 일이 없다. 모든 게 일그러지고 있다. 그저 지나가는 파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손을 뻗어 발신 번호를 확인한 김영준 총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홍천의 요양 병원이다.

“말씀하세요.”

-바, 박정길이 사라졌습니다.

김영준 총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라졌다고?”

-CCTV를 돌려봤는데, 새벽에 창문을 넘어 도주했습니다.

“당장 잡아! 지금 당장!”

김영준 총장이 벼락같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갑자기?”

지금껏 얌전히 감금되어 있던 박정길이 도주했다. 그것도 자신의 권력이 태풍에 휩쓸리는 지금 시기다. 그때, 김영준 총장은 장지혁 검사를 떠올렸다.

장지혁 검사는 분명 원주로 가겠다고 말했었다. 불러서 이유를 물었을 때는 그저 여행이라고 했는데, 김영준 총장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바보는 아니다.

‘그놈이?’

김영준 총장은 생각했다. 재정건설을 시작으로 백기호 의원까지, 연이어 쏟아진 폭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장지혁 검사가 조용히 움직였다고.

그리고 그 생각이 끝난 순간 김영준 총장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다급히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장지혁 검사의 연락처를 찾았다.

“장지혁, 너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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