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줄 (7)>
엄선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얼굴을 붉히며 분노부터 내뱉었다.
“왜? 구경하러 왔니? 구경났냐고!”
서진을 바라보는 엄선주의 눈길이 곱지 않다.
자신의 모습을 살핀 후 김영준 총장에게 보고할 것이라 생각해서다.
엄선주에게 서진이란 사람은 김영준 총장의 애완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죽여!”
하지만 서진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엄선주를 바라보며 그녀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자 엄선주가 다시 노기를 터뜨렸다.
“죽이라고!”
엄선주의 눈빛이 미쳐 있다.
계속 놔두면 제 화를 못 이긴 채 거품을 물며 쓰러질 것만 같다.
서진의 시선이 변호사에게 틀어졌다.
나가 달라는 눈빛.
“그럼…….”
변호사의 눈치는 빨랐다. 고개를 숙이더니 재빨리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끼이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곳에는 서진과 엄선주만 남았다.
서진은 엄선주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서서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론은 막혔을 테고 지라시는 던져 봤자 티도 안 날 텐데, 남은 방법이 있습니까?”
“뭐?”
엄선주는 서진의 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서진의 눈빛이 기분 나빴기 때문이다.
엄선주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자 서진이 다리를 외로 꼬며 다시 물었다.
“남은 방법이 있냐고 물었는데요.”
“하!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나한테 돈 받고 자식 키운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이 움직이면…….”
“이미 끝났습니다.”
“뭐?”
“대법관이 하나, 국회의원이 여섯, 장관이 둘, 차관이 넷…….”
서진의 입에서 줄줄줄 이어진 이름은 모두 엄선주에게 용돈을 받아 왔던 자.
그 명단이 노출됐다는 것은.
“이미 작은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혔다는 거죠.”
“…….”
“그런데 계속할 겁니까?”
엄선주가 눈을 감았다 떴다.
눈빛에 서려 있던 분노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엄선주는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하며 입을 열었다.
“너……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셨지만, 예전에는 재벌 회장들도 우리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선거철만 되면 모든 정치인이 우리 집에 드나들며 고개를 숙였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김영준을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서진이 끌끌 웃었다.
엄선주는 대한민국 사채시장을 쥐락펴락했던 거물 중 하나다.
그런데 그 본질은 아직 어린애다.
그 나이를 먹고서도 결국 쪼르르 아버지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다는 소리가 우습기만 했다.
서진이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한테 이르겠다고요? 정말 무섭네요. 무.서.워.라.”
서진의 이죽대는 목소리에 엄선주의 이마에 심줄이 솟았다.
서진이 엄선주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계속 말했다.
“그런데요, 정말 궁금하네요. 그쪽 아버지께서 엄선주 씨를 도와주실까요?”
“……!”
“아시잖아요? 이 싸움은 검찰총장과 엄선주 씨의 싸움이 아니에요.”
이 싸움은 자매끼리의 싸움이다.
같은 아버지를 둔 자매가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중이다.
서진의 작은어머니가 친정과 인연을 끊었다 해도 딸은 딸이다.
열 손가락 중 안 아픈 자식은 없다.
서진이 또박또박 말을 전했다.
“그리고 대선을 앞두고 있어요. 누가 대통령이 될지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치열하죠. 모든 물주가 눈치를 보고 있어요. 잘못된 곳에 베팅했다가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시기에 정치권을 압박한다고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데?”
서진의 말에 틀린 것은 없다.
지금 시기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잠룡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세상을 살피는 중이다.
상대 당에 조금의 흠집만 보여도 개떼처럼 몰려들어 죽자 사자 물어뜯는다.
“5년에 한 번 있는 시기. 돈 없는 서민이 유일하게 힘을 갖는 시기입니다. 그쪽 아버지는 힘을 쓸 수 없어요.”
“…….”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 아니잖아요? 아직 과거의 영광에 사시나 보네요. 세상은 변했고 이제 그쪽은 감옥에 가야 하죠. 인정하세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엄선주는 살벌한 눈으로 서진을 쏘아보며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하지만 되받아칠 말이 없다.
엄선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몰락을 즐기며 와인 잔을 부딪칠 김영준 총장과 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씹을 뿐이다.
하지만 엄선주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힘이 없음을 인정하고 조용히 끌려가는 것은 말 그대로 수치.
깔깔대며 웃고 있을 언니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을 거다.
자신이 토해 낸 비명만큼 언니도 똑같이 울부짖기를 원했다.
엄선주가 스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김현봉한테 널 죽여 달라고 청부했던 이유가 뭘 것 같아?”
“…….”
“단지 사채시장을 얼어붙게 했다는 이유? 내가 미쳤니, 그것 때문에 검사를 죽이려 하게?”
엄선주가 서진을 향해 천천히 상체를 구부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언니가 널 죽여 달라고 했어.”
“……!”
알고 있던 거다.
하지만 서진은 모른 척,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계산된 상황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어뜯는다.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정없이 덤벼든다.
혼자 죽을 수 없다는 억울함.
지금껏 서진이 파고든 것은 그 심정이었다.
엄선주는 가진 게 많은 만큼 억울한 것도 많은 사람이다.
오랜 시간 작은어머니와 함께하며 그 비리도 한 움큼 들고 있을 게 분명하다.
엄선주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을 주워 담으면 김영준 총장의 앞길에 똥을 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창백해진 얼굴로 엄선주를 바라봤다.
“무, 무슨 말을…….”
“어마, 화내는 모습 보니까 인간적이네. 그런데 정말 몰랐어? 우리 언니가 널 정말 싫어해. 죽이고 싶어 하지.”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마!”
서진은 테이블을 탕, 탕, 탕 내리치며 외쳤다.
이것 역시 계산된 행동이다.
급박한 상황, 흔들리는 마음, 엄선주는 서진을 압도한다고 착각하며 은밀한 비밀을 내뱉을 게 분명하다.
서진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다 생각하며 우월감을 갖게 될 거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서진이 예상했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이 처음일 것 같아?”
엄선주가 미친 것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입꼬리를 죽 끌어당겨 웃었다.
“이미 똑같은 짓을 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어. 그중에 하나 기억나는 게 있는데, 가르쳐 줄까?”
서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 번이나 했다던 행동, 그중 하나.
엄선주가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언니가 형부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있어.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
“미제 전문 검사라고 들었는데, 한번 알아봐. 잘 모르겠으면 강원도의 야산을 뒤져 보는 것도 괜찮고. 어딘가에 잘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그래도 모르겠다면, 우리 회사의 성 실장이라고 있어. 가서 물어봐. 혹시 알아, 과거를 알고 있을지?”
“…….”
“그리고 기억해.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는데, 우리 언니를 잡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네가 될 거야. 얼마나 걸릴까? 내 예상으로 1년도 안 걸릴 것 같은데……. 우리 언니,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이거든.”
서진은 말없이 엄선주를 바라봤다.
그러자 엄선주가 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햇병아리 검사님이 우리 언니를 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지금 내가 당하는 거 봤지? 잘해 봐.”
* * *
서진은 구치소를 벗어났다.
차에 오르던 서진이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들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괴한 웃음소리였다.
“권력도 있고.”
작은어머니는 권력이 있다.
비록 남편 김영준 총장이 가진 권한이지만 그 아내가 휘두를 수 있는 힘도 만만치 않다.
“돈도 있고.”
게다가 돈도 있다.
부잣집 딸내미로 태어났으며 지금은 서진의 아버지 등에 빨대를 꽂아 빨아먹고 산다.
인생을 살며 단 한 번도 어려운 적이 없었을 거다.
“그런데…….”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고 이제는 서진까지 노리고 있다.
도대체 그 탐욕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의식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작은어머니의 화려한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엄선주는 작은어머니를 향해 오르는 동아줄이 될 게 분명하다.
그 시작은 작은어머니의 과거, 옛 남자 친구.
‘그리고…….’
서진의 시선이 조수석의 글러브 박스로 틀어졌다.
저곳에 김윤환의 머리카락이 담겨 있다.
* * *
“감사합니다. 의원님 덕에 수월히 넘어갔습니다.”
소고기 전문점이었다. 완벽한 밀실, 그곳에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이 마주 앉아 있었다.
김영준 총장의 감사 인사에 백기호 의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감사는요. 사돈이 될 분에게 이 정도도 못 해 드릴까요?”
김영준 총장의 힘만으로 단시간에 모든 언론사를 쥐락펴락하기는 쉽지 않다.
백기호 의원이 가세했기에 모든 언론사를 휘두를 수 있었다.
하지만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백기호 의원이 김영준 총장의 잔에 술을 채우며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총장,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여당에 있던 공대출이라고 기억하십니까? 지금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등산이나 다니는 사람이에요.”
김영준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계를 떠난 지 몇 년이나 됐지만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뒤가 구리다는 소문이 있어요. 시민 단체를 움직여서 고소장을 던질 테니, 한번 털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은퇴한 사람이지만 여당에 있으며 적잖은 공을 세웠다.
놈을 털면, 여당이 타격을 받을 게 당연하다.
여당이 가진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것, 대선 게임이 시작되기 전 가벼운 퍼포먼스이며 우위에 서기 위한 행동이다.
김영준 총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백기호 의원이 술잔을 들며 힐끗 김영준 총장을 살폈다.
“그런데 이미 구렸던 냄새를 다 지웠다는 소문도 있는데…….”
김영준 총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의원님, 한배를 타기로 했으면 걱정은 그만하시죠.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게 우리 애들이에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렇게 우려되시면, 서진이를 움직여서 흔들어 보겠습니다.”
국민에게 알려진 서진의 이미지는 꽤 좋다.
말 그대로 스타 검사.
누군가는 서진을 보며 진정한 검사라고 말할 정도.
그런 서진이 나서서 “비리가 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믿을 거다.
해당 의원에게 죄가 있든 없든 일단 돌을 던질 게 분명하다.
김영준 총장이 술잔을 내려 두며 말을 이었다.
“서민들은 정치인이면 무조건 악하다고 여겨요. 서진이 그 정치인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처럼 언론이 움직여 주면, 대중은 열광하겠죠. 이 정도면, 이번 보답으로 괜찮겠습니까?”
백기호 의원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 * *
다음 날.
또 하루를 여는 아침이 시작됐다.
서진은 김영준 총장의 호출을 받고 대검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왜 부른 거지?’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제 구치소에 들렀던 것이 김영준 총장의 귀에 들어갔을까 생각해 봤다.
‘뭐…….’
특별한 문제는 없을 거다.
엄선주의 앞에서 서진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조사할 게 있어 들렀다는 이야기를 하면 무난히 넘어갈 내용이다.
‘그럼…….’
아침부터 부를 이유가 없다.
그래서 김영준 총장의 의중을 계속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김영준 총장의 입장에서 엄선주에 대한 떡밥은 이미 식었다.
언론을 움직이며 김영준 총장의 지지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다.
“부르셨어요?”
서진은 의문을 가진 채 총장실에 도착했다.
인사를 하고 그 앞으로 걸어가는데 김영준 총장이 반갑게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서진이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김영준 총장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사건 하나 맡아.”
김영준 총장이 테이블에 던져 둔 것은 한 사람의 인명부였다.
지난 국회의 국회의원.
여당에서 꽤 막강한 힘을 휘둘렀던 자.
서진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김영준 총장을 바라봤다.
갑자기 과거의 정치인, 그것도 지금껏 조용하던 사람을 쑤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제 백기호 의원을 만났을 테고, 정치적 타깃으로 이 사람을 찍었다는 거다.
서진이 다시 고개를 숙인 후 인명부에 시선을 옮겼다.
서진에게도 사람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힘을 키우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다.
역으로 이 사람을 이용한다면 조금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또 이런 기회를 주시네.’
서진이 슬쩍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