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77화 (177/250)

<위험한 만남 (3)>

***

중앙지검의 주차장. 서진은 차에 앉아 장지혁 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며 차에 앉아 에어컨을 틀어 놔도 피하기 어려운 더위가 시작됐다.

그때 조수석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지혁 검사가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쑥 내밀었다.

“먹어.”

“감사합니다.”

“이건 옥수수니까 가져가고.”

장지혁 검사가 뒷좌석에 비닐봉지에를 던져뒀다.

봉지에는 옥수수가 한가득,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를 만나 잔뜩 사 온 게 분명하다.

“검사님은 노점 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보면 못 지나친다면서요?”

“내가 늦둥이거든. 우리 엄마가 나물 팔아서 나 공부시켰고. 그런데 어떻게 모른 척 지나치냐? 금수저는 모르는 흙수저의 감성이 있는 거야.”

“그냥 그 돈을 어머니께 용돈으로 드리면…….”

“그러고 싶은데, 돌아가셨어.”

“아, 죄송합니다.”

“됐어. 죄송은 무슨……. 그러니까 잘해. 효도에는 시간제한이 있는 거야.”

장지혁 검사가 낄낄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서진은 그를 향해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엄선주 비리요.”

여동수 의원이 전해 줬던 서류다.

타깃은 야당의 황윤성 의원.

놈은 깡패와 손잡았고 뒷돈을 받아먹고 있다. 그리고 그 깡패와 연결됐던 이름이 엄선주였다.

이걸 전하기 위해 일부러 주차장을 선택한 거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 곳.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장지혁 검사가 서류를 꺼내 착착 넘겼다.

깡패들이 연예인 지망생을 꼬드겨 해외 성매매를 한다는 내용과 엄선주가 투자했다는 이야기.

그중에는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저버린 어린 학생도 있었다.

장지혁 검사의 입에서 험악한 목소리가 흘렀다.

“미친 새끼들.”

장지혁 검사는 당장이라도 놈들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국회의원과 돈 많은 큰손이 엮인 사건, 섣부른 행동은 도망칠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법이 평등하다고 누가 그랬냐? 배고파서 빵 훔친 사람은 징역, 돈 많은 놈은 해외에 나가 여자를 팔아도 혐의 없음. 젠장.”

장지혁 검사가 입술을 씹은 후 서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엄선주의 스케줄, 그 여자의 운전기사한테 얻은 거야.”

“운전기사요?”

운전기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엄선주와 함께하는 사람.

혹시 장지혁 검사의 모습이 엄선주에게 드러났다 싶어 걱정됐다.

하지만 장지혁 검사는 손을 저었다.

“걱정할 일은 없어. 기름값이나 세차비 같은 자잘한 것 슈킹해서 룸살롱에 가는 걸 빌미로 잡았거든. 엄선주 귀에 들어가는 게 무서운지 술술 불더라. 하긴, 그건 이해해. 그 아줌마 눈빛이 정상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다행이다.

서진은 엄선주의 스케줄 표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멎었다.

‘한정식집…….’

조만간 엄선주는 한 한정식집에서 부동산과 관련된 사람을 만난다.

‘이 시간을 이용하면…….’

***

며칠 후, 한 한정식집.

엄선주는 그곳에 앉아 한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빌라?”

“그렇다니까. 거기가 싹 다 재개발될 거야. 이미 장관급 인사들은 다 달려들고 있어. 친척 명의까지 빌려서 나오는 매물을 다 계약한다더라. 박 장관은 이미 스무 가구 쯤 손에 쥔 모양이야.”

“그래?”

엄선주와 마주 앉은 친구는 돈이 될 곳이 있으면 전국의 부동산을 싹쓸이하는 사람.

일명 복부인.

그녀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발표 전에 담을 수 있는 만큼 주워야지.”

“그래서, 목표가 몇 장이야?”

“보수적으로 가구당 한 장을 목표로 하고 있어.”

한 장이란 1억, 열 가구를 사면 10억.

엄선주가 고개를 저었다.

“거지새끼들은 그거 올랐다고 좋아하겠지만 푼돈이잖아? 세금 떼고 뭐 하면 남는 게 없네.”

“보수적이라고 말했잖아. 알지? 소문 돌고 때마다 호가 올려 주면 어디까지 오를지 모르는 거. 그 이상을 손에 쥘 수 있는 거야.”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엄선주는 얻을 이득을 계산했다.

최근 창고가 털리며 쥐고 있던 현금 손실이 크다.

그걸 메꾸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부동산은 시간이 걸린다.

재개발이라는 발표가 난 후에도 삽을 뜰 때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다.

장관급 인사가 움직였다면 확실한 정보이기는 하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현금을 땅에 묻어 두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잠깐만, 화장실 좀.”

엄선주는 그렇게 말한 후 몸을 일으켰다.

혼자의 시간을 가진 후 생각을 환기하려는 거다.

엄선주는 방을 나섰고 복도를 걸어 화장실로 이동했다.

그렇게 잠시 후, 손을 씻을 때였다. 안으로 들어오는 두 여성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이소희가 이번에 남자 하나 잘 물었다며? 김윤환이라고 꽤 잘난 집 자식이래. 변호사라나?”

김윤환이라는 익숙한 이름, 게다가 변호사.

엄선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눈동자를 옮겼다.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여자가 화장을 고치며 대화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 남자가 이번에 미국에서 돌아오는데, 바로 결혼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더 웃긴 게 뭔 줄 알아? 얼굴 한 번 못 봤대.”

“진짜? 그 김윤환이라는 애, 하자 있는 거 아냐? 그게 아니면 잘난 집 자식이 왜 이소희를 만나? 첩의 자식이란 것 숨기나?”

“결혼식에 친아빠가 등장하면 분위기 싸해지겠네?”

“오겠어, 그 대단한 사람이?”

그게 끝이었다. 그 여자들은 화장실을 떠났고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엄선주는 굳은 듯이 서 있었다.

‘김윤환, 변호사, 미국?’

높은 확률로 자신의 조카인 김윤환에 대한 이야기다.

김윤환은 지금 미국에 있고 검사를 그만둔 후 대외적으로 변호사라는 명함을 사용한다.

‘……첩?’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첩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언니가 모를 게 분명하다.

그녀의 언니는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과할 정도로 강한 사람, 첩의 자식을 들일 리 없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엄선주의 입꼬리가 슬슬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저들의 목소리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했다.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고딕]-언니, 윤환이 결혼해?

곧 도착한 메시지.

[고딕]-어? 어떻게 알았어? 알리지 않았는데.

엄선주가 휴대폰을 들고 깔깔깔 웃었다.

그 잘난 언니가 첩의 자식을 며느리로 두다니.

언니의 참혹하게 구겨지는 얼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웃던 엄선주가 눈을 반짝이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혼자 앉아 있던 친구를 향해 정말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투자해야지. 임장은 언제 갈까?”

방금까지 엄선주는 투자에 대해 고민했다.

얻을 이득과 손실 그리고 그 시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쩐지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진짜 시원하게 웃던데요?”

한정식집 근처의 호프집.

서진의 앞에 도광현이 마주 앉았다.

“그래?”

“네. 미친 줄 알았어요. 십 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린 것처럼 웃었어요. 한번 따라 해 볼까요?”

도광현은 화장실에서 깔깔 웃던 엄선주의 웃음소리를 흉내 냈다.

걸쭉한 목소리로 내뱉는 그 음성을 견디다 못해, 서진이 한마디 했다.

“그만해. 끔찍하다.”

“그런가요?”

서진은 슬쩍 웃으며 도광현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엄선주가 그렇게 웃었다는 것은 미끼를 물었다는 신호다.

이제는 미끼를 문 엄선주가 어떻게 분란을 일으킬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엄선주는 이소희의 존재를 찾아낼 테고 그 과거를 캐낼 거다.

그만큼의 정보력과 힘은 엄선주에게 있다.

‘그리고 작은어머니를 만나겠지.’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김영준 총장과 작은어머니의 큰 싸움.

‘물론 그것만으로 혼사의 약속이 깨지지는 않을 거야.’

김영준 총장은 목표로 한 게 있다면 끝을 볼 때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

가정의 분란 때문에 권력의 합병을 포기할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김영준 총장에게 타격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때가 서진이 다음 계획을 실행할 순간.

지금은 다른 것을 준비하면 된다.

서진이 도광현에게 물었다.

“연기자들은?”

엄선주가 있던 방을 스치며 이야기를 나눴던 두 여성, 도광현이 섭외한 사람들에 대한 질문.

도광현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100만 원씩 줬고요. 입은 꾹 다물 겁니다. 그게 아니어도 그 내용만으로 김윤환과 이소희가 누군지 알기는 어렵잖아요.”

“고생했어. 마셔.”

***

김윤환이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김영준 총장의 사무실.

김윤환은 멋쩍게 웃으며 김영준 총장을 바라봤다.

“미국에서 혼자 지내면서 생각 많이 했어요. 이제는 말썽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할게요.”

“네 혼사 이야기는 들었고?”

“네, 어머니한테 들었어요.”

“생각은 어때?”

“만나 봐야 알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김윤환은 이런저런 말 없이 곧바로 결혼 이야기부터 꺼내는 아버지가 야속했지만 밝은 표정을 보였다.

김영준 총장이 담배를 입에 물며 계속 말했다.

“큰아버지 회사에 자리 마련해 뒀으니까, 한 일주일 쉬고 출근하도록 해.”

“네.”

김윤환은 최대한 의젓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김영준 총장의 눈에는 변한 것 없이 여전히 철없는 아들이었다.

결혼도 직장도 스스로 잡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는 모습, 물론 김영준 총장이 지시한 것이지만 한 번쯤은 거부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사고 치지 마.”

“말씀드렸잖아요, 생각 많이 했다고.”

“온 김에 서진이 얼굴도 보고 가. 불렀으니까 곧 올 거야.”

순간이지만 김윤환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서진은 한국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하게 만든 원흉, 그 이름이 반가울 리 없다.

지금도 서진에게 당했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김윤환은 이번에는 반드시 서진을 찍어 누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

그 시각, 서진은 대검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있었다.

‘……김윤환?’

놈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가짜 범인을 만들었던 놈.

부모 잘 만난 덕에 죗값을 치르지 않고 외국으로 도망쳤던 사냥감.

놈이 돌아왔다.

지었던 죄의 무게를 저울에 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말 기다렸던 순간 중 하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서진은 저벅저벅 총장실로 향했다.

벌써부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 김윤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됐다.

놈의 성격상 서진을 보면 멱살을 잡고 욕부터 지껄이고 싶겠지만 김영준 총장의 앞이라 그런 행동은 못 할 테고.

‘어떻게 하려나…….’

서진은 김윤환이 무슨 말을 지껄여도 흔쾌히 받아 줄 생각이었다.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와 같은 것, 오늘 서진이 김윤환을 대하는 마음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앉아 있던 김윤환이 벌떡 일어나 서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양팔을 벌린 채 서진을 꽉 끌어안는 게, 아무래도 김영준 총장을 의식한 것 같다.

적당히 친한 척, 보여 주기식의 인사.

“오랜만이다?”

서진은 꿍꿍이로 가득한 놈의 눈빛을 봤다.

분명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일단 놈의 행동에 어울려 줬다.

“얼굴 좋아졌네. 공부 안 하고 놀러 다닌 것 아니야?”

“야, 네가 유학 생활을 알아? 오랜만에 공부하느라 머리에 쥐 나는 줄 알았어.”

공부는 개뿔, 매일 같이 여자를 바꿔 만나느라 힘들었을 거다.

아, 그쪽에서는 김영준 총장의 이름값이 통하지 않으니, 조금은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김윤환이 정다운 척 서진의 팔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유학 생활하면서 생각했는데,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것은 핏줄밖에 없더라. 친구라는 게 없어. 다들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이득을 보려고 어울리는 거지.”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서론이 길까 싶었다.

그리고 나온 말은 역시 헛소리였다.

“우리가 잠깐 싸운 적은 있지만 그래도 김씨 집안이잖아. 내가 큰아버지를 이어서 재정건설을 잘 키워 볼게. 넌 우리 아버지를 이어서 총장에 앉아 봐. 그럼 우리는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네.”

물론 빈말이다.

그렇게 될 리 없으니까.

“시간 비는 날 언제야? 술 한잔해야지?”

“형, 친구들 만나야 하는 거 아니야? 형 시간 될 때 말해.”

“말했잖아. 핏줄이 중요하지 친구라는 것은 없다고. 오늘 어때?”

“안 피곤해?”

“괜찮아.”

김윤환이 서진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소파로 안내했다.

그런데 김윤환의 손이 서진의 등에 닿는 순간이었다.

서진의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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