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12화 (112/250)

< 3천 억. -(4) >

***

서초구의 어느 한정식집에 도광현이 들어왔다.

서진의 호출을 받고 온 거다.

하지만 서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도광현이 자리에 앉으며 휴대폰을 꺼낸 후 서진에게 ‘도착했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후 서진의 기사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검찰은 오늘 부운 교를 압수 수색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서진의 원맨쇼.

기사는 물론이고 댓글의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확실하게 조집시다! 김서진 검사 파이팅!

-‘증거 있습니다.’ 할 때 봤어? 개지린다. ㅋㅋㅋ

ㄴ요새는 검사도 얼굴 보고 뽑는 것 같음.

ㄴ존나 멋있어.

ㄴ꺄악!!!

-연쇄 살인범, 형사, 경찰 서장, 검사, 교주... 다음은?

ㄴ다음은 없는 거 아니야? 그전에 유배 가서?

ㄴ유배를 왜 가?

ㄴ저런 애들 서울에 오래 못 있던데?

ㄴ김서진 걱정하느니 연예인 걱정하라고 했음. 삼촌이 검사장임. 아빠가 재정건설 대표고.

ㄴ씹 금수저 ㄷㄷㄷ

댓글을 읽던 도광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급기야 낄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간지 폭발이지.”

함께 일하는 서진이 잘나가는 것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기사를 읽던 도광현은 서진의 동영상을 찾았다.

경찰 간부가 ‘현 시간 부로...’라는 말을 외치는 일촉즉발의 상황, 서진이 신지석과 서동식을 딱 잡아 오는 그 장면.

조회 수가 미친 듯이 올라가는 중이다.

“캬! 사진빨 죽이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즐거워하던 도광현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갑작스레 과거를 떠올린 거다.

‘그때도 이런 검사가 있었다면...’

도광현은 전과자, 어린 나이부터 사기 설계로 이름을 떨쳤다.

범죄에 뛰어들었던 이유는 하나.

‘기업구조조정 전문 투자기업 사모펀드 포이블.’

놈들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그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서였다.

‘하...’

과거를 기억하던 도광현은 술을 따라 쭉 마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경찰서를 드나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제발, 잡아 주세요! 제발! 우리 엄마가... 엄마가 죽었다고요!

많은 증거와 혐의가 있었지만 검찰과 경찰은 그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기다리세요.’라는 차가운 말만 남긴 채, 수사를 덮어 버렸다.

그때, 서진처럼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검사가 있었다면...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도광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진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서진은 약속했었다.

-나도 그놈들이 마음에 안 들어. 없애고 싶고.

당시의 도광현은 서진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믿는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차근차근 놈들의 숨통을 조여줄 게 분명하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서진이 들어왔다.

도광현이 우울한 표정을 감추며 활짝 웃었다.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사이비 애들이 쉬운 놈들이 아닌데요. 하하하.”

“고생은 무슨. 그냥 일하러 갔던 거지. 오래 기다렸어?”

“아뇨, 저도 지금 왔어요.”

서진이 맞은편에 앉자 도광현이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술은 못해. 들어가 봐야 해. 지금도 잠깐 나온 거야.”

도광현이 술병을 내려두고 조심스레 서진을 바라봤다.

이제 서진이 호출한 이유를 들을 시간이다.

그런데, 서진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흘렀다.

“오늘부터 신을 믿기로 했어.”

“네?”

사이비 종교를 잡으러 갔던 사람이 갑자기 신을 믿겠다니.

도광현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서진이 계속 말했다.

“어제 헌금을 냈거든? 3억.”

“미쳤어요?”

도광현의 눈이 커졌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헌금으로 3억이라니!

도광현은 명치에 고구마가 얹힌 느낌을 받았다.

“지난번에는 조우재 그 인간한테 30억을 보내더니, 이번에는 헌금으로 3억? 검사님, 돈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러다가는 다 털려요!”

도광현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생고생해서 돈세탁을 하고 부동산 투기를 했는데, 서진은 마음 편하게 펑펑 쓰고 다니다니.

“검사님!”

하지만 서진의 눈빛은 담담했다.

물컵을 내려두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서동식이라고 오늘 잡힌 목사 있지? 어제 3억을 헌금할 때, 이런 말을 하더라.”

-신이 백 배, 천 배로 보답해 줄 겁니다.

도광현이 황당한 표정과 함께 입술을 씹었다.

“그건 그 사람들이 그냥 하는 말이잖아요! 사이비 새끼들이 무슨 말을 못 해요? 그래서 3억을 냈고 오늘 잡았는데, 신을 믿겠다고요? 아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케이만군도 가 봤어?”

“하...”

도광현이 고개를 저었다.

3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샛길로 새고 있다.

부모님 복수가 훨훨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광현의 입에서 삐뚤어진 목소리가 나왔다.

“가봤겠어요? 못 가봤습니다. 그런데, 왜요?”

“여행 좀 다녀와. 사진도 많이 찍어 오고. 대리 만족 좀 하자.”

“진짜 왜 그러세요? 이유나 말씀해 주세요. 그럼, 케이만군도가 아니라 남극이라도 다녀올게요!”

“말했잖아? 신을 믿겠다고. 진짜 천 배로 보답해 주던데? 3억을 냈더니 3천억을 주더라.”

“네?”

서진이 테이블 위에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도광현의 눈동자가 봉투를 향해 기울어졌다.

잠시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다급히 봉투를 열어 본다.

그리고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건...”

“케이만군도에 있는 은행이야. 필요한 서류는 안에 다 들어 있고. 그 돈 다 가져와.”

케이만군도는 지구 반대편, 카리브해에 위치한 인구 5만 명의 작은 섬나라다.

파란 하늘과 백사장, 옥빛의 바다색이 유명한 곳으로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절경의 휴양지.

하지만 그 이면은 세계 최고의 조세회피처 중 하나, 비밀 계좌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3천억.”

도광현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서진을 향해 물었다.

“이거 신지석인가 그놈 돈이죠?”

“어.”

“조사해 오라는 거죠?”

“아니.”

“그럼요?”

“꿀꺽해야지.”

서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도광현은 심각하다.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불탔잖아?”

부운 교는 처참했다. 모든 게 잿더미가 되었고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이 통장은 비밀 계좌, 그것도 남의 이름으로 만들어 둔 대포 통장이다.

문제 될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도광현이 멍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대박.”

*

서진과 도광현은 한정식집을 빠져나왔다.

검찰을 향해 걸으며 서진이 슬쩍 물었다.

“3천억이 있으면 뭘 할 수 있을까?”

“이 거리에 있는 자동차 전부를 사도 돈이 한참 남고요. 이 라인에 있는 건물을 대출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리고 한강을 내려다보는 펜트하우스도 3천억 앞에서는 껌값이죠.”

“다녀오면 사고 싶은 거 하나 사.”

도광현의 눈이 서진을 향해 홱! 돌아갔다.

눈빛만으로 ‘정말요?’라고 묻고 있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꿈에 조상님이 나왔던 것 같은 게 분명해요. 하지만 싼 거로 살게요. 부가티, 람보르기니... 어디에 앉아야 자세가 나올까요?”

서진이 미소 지으며 앞서 걸었다.

3천억, 시드 머니는 준비된 것 같다.

슬슬 액셀을 밟을 시간이다.

***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서진은 집 앞에 서 있었다.

피곤한 뒷목을 주무르며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긴 하루였다.

어서 씻고 푹 자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영이 나와 있었다.

“안 잤어?”

“어, 형 기다리고 있었지.”

“나? 왜?”

부모님은 이제 막 침실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진영이 손을 흔들며 서진의 방을 향해 앞장섰다.

그리고 침대에 앉으며 가볍게 오늘 있던 일을 전했다.

“낮에 작은어머니 왔었어.”

“그래?”

“엄마가 문 열어 주려고 했는데, 내가 막았어. 얼굴이 화가 난 것 같더라고.”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김윤환을 회사에 넣어달라는 요청.

서진이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안 되겠네.’

점점 선을 넘고 있다.

남의 밥그릇을 탐내는 중이다.

그것도 김윤환이라는 무능력자에게.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서진이 의자를 빼고 앉을 때 진영이 말했다.

“뭐, 작은아버지 오셔서 해결됐으니까 걱정하지는 마.”

김영준 검사장은 자신의 아내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언제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알 수 없어서다.

그런데, 그녀가 오늘 이 집에 찾아왔고 김영준 검사장이 서둘러 끌고 갔다고 한다.

진영이 서글서글 웃으며 계속 말했다.

“뭐, 그건 됐고. 형, 여자 친구 있어?”

“무슨 말이야?”

“이은하 기자. 맞지?”

진영의 표정에 장난기가 살살 올라온다.

이걸 물어보기 위해 안 자고 있었다는 얼굴이다.

서진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친하게 지내는 기자야.”

“에이, 예쁘던데? 그런데, 형 취향 좀 달라졌더라?”

“내 취향?”

“예전에는 가슴 크고 쭉쭉 빵빵한 금발...”

그때, 서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이은하 기자다.

진영의 눈에 힘이 빡 들어갔다.

그리고 다급히 안방을 향해 달렸다.

“엄마! 맞아요! 맞아! 이은하야! 이 시간에 전화하고 있어요!”

서준경일 때는 가족이 없어서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동생은 원수다.

서진이 한숨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이은하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늦게 죄송해요. 다른 게 아니라, 내일 아침에 김서진 검사님 특집 기사를 올리려고 하거든요? 한번 읽어...

“아무렇게나 해주세요.”

-네?

“진짜 괜찮아요. 아무렇게나 써 주세요.”

방문 앞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진영이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아버지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며느리 후보야?”

통화를 이어가기는 무리였다.

***

국내 최대 변호사 집단 중 순위권에 꼽히는 법률사무소 J&S.

강석룡 변호사는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50억?”

“5년 이하로 줄여준다면, 그리고 추징액을 막아 준다면 그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100억이네?”

강석룡 변호사의 시선이 서류로 향했다.

사이비 종교 사건의 교주 신지석의 얼굴이 보였다.

강석룡 변호사, 어떤 논란이 되는 범죄자여도 돈만 많이 준다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가져오기 때문에 범죄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강석룡 변호사가 손가락으로 서류를 쿡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검찰 쪽 선수는 누구야?”

“조우재 부장검사입니다.”

“미친!”

강석룡 변호사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조우재라고? 조우재? 그 병신 새끼?”

“네.”

“한다고 그래. 조우재가 나오면 거저먹는 거지. 그 새끼, 손바닥 비빌 줄만 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새끼야.”

실장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알고 계십니까?”

“알지, 잘 알지. 연수원에 같이 있었어.”

강석룡 변호사가 서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펄럭펄럭 흔들며 말했다.

“한다고 해. 그리고 조우재 쪽 털어봐. 그놈은 문제가 많아. 계좌만 털어도 먼지가 수북이 쌓일걸?”

“네.”

“판사 정해지면 바로 보고하고.”

강석룡 변호사의 스타일이다.

싸움의 시작은 언제나 외곽부터 친다.

검사를 부수고 상대 변호사를 무너뜨린 후 판사를 손에 쥔다.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강석룡 변호사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100억짜리 판떼기, 쉽게 먹겠어.”

하지만 세상일은 쉽지 않다.

곧 들려온 소식.

“조우재 부장검사는 나오는 게 없습니다.”

강석룡 변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럴 리가 없다.

강석룡 변호사의 기억에 조우재는 쓰레기다.

하지만.

“빚만 수십억입니다. 토지에 투기했다가 폭삭 망한 것 같습니다. 그 토지도 다 팔아서 문제 될 것은 없고 빚만 남았으니 흔들기도 어렵습니다.”

“멍청한 새끼... 검사 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데, 빚만 있어?”

“그리고 또...”

실장이 말을 끌었다.

강석룡 변호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서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선수가 바뀐 것 같습니다. 김서진으로.”

“...김서진?”

실장이 다가와 서류를 내려뒀다.

서진의 이력이 보인다.

이제 3년 차 검사, 새파란 햇병아리.

하지만 강석룡 변호사도 서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강석룡 변호사의 얼굴에 흉악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도 쉽지.”

***

그 시각, 서진은 김영준 검사장의 앞에 서 있었다.

김영준 검사장이 서류를 툭 던져두며 입을 열었다.

“놈이 J&S의 강 변호사를 선임했어. 수십 명의 변호인단이 꾸려질 거야. 쉽지 않은 상대지.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

“너를 흔들 거야. 어디까지 건들지 몰라. 그런데, 할 수 있겠어?”

서진이 조용히 웃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네.”

< 3천 억. -(4)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