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2)>
***
“김서진을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춘천으로 가는 길.
김윤환은 조우재 부장검사와 통화하고 있었다.
조우재 부장검사는 김영준 검사장의 오른팔이며 김윤환에게는 그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조우재 부장검사의 목소리가 떨떠름하다.
-...김서진?
지금껏 서진과 관계되어서 좋았던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김윤환이 허드렛일로 빠진 것도 모두 김서진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놈을 만나러 간다니.
호랑이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하이에나가 떠올랐다.
주제 모르고 까불었다가 한입에 콱!
조우재 부장검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겠어?
“저도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러먹었어요. 제가 받아낸 형량만 계산해도 조선왕조 500년은 훌쩍 넘어가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김서진 만나서 컨트롤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우재 부장검사는 김윤환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오히려 걱정됐다.
하지만 하룻밤 술자리에 큰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김윤환이 김서진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괜찮은 일이다.
김영준 검사장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술은 적당히 마셔. 조바심내지 말고 옛날 관계 회복하는 데 집중해.
적당한 조언으로 마무리 지었다.
*
춘천 버스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34평 아파트.
지검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곳에 서진이 살고 있다.
그리고.
“야, 집 좋네?”
김윤환이 들어왔다.
평범한 34평 아파트인데 김윤환은 거실부터 방까지 슥 둘러본다.
그러다가 서진의 서재에서 걸음이 멈췄다.
기록물에 뒤덮여 너저분한 책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오는 거야?”
김윤환이 서재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기록물을 손에 들었다.
굵직굵직한 사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것 보면 강원도가 괜찮아. 신입한테도 일감을 딱딱 던져주고.”
“서울은 안 그래?”
“이런 하꼬하고 같은 줄 아나? 차장검사만 넷에 부장검사가 마흔 명에 가까워. 그런데 신입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종승이 있지? 그놈 요즘 연필 깎는다. 흐흐흐.”
놈은 낄낄 웃으며 이것저것 기록물을 살폈다.
그러던 중, 놈의 눈에 아파트 추락 사망 사고가 들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벌인 추리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
김윤환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악플러와 씨름하는 자신과 서진이 하는 일이 순간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굵직한 판에서 놀아보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곳은 강원도다.
서진의 사건을 빼앗기는 어렵다.
김윤환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소파하고 식탁은 큰어머니 취향이지?”
마리 앙투아네트가 떠오르는 엔틱 가구.
서진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네가 이러고 사는 것 보니까 나도 자취하고 싶다.”
김윤환은 아직 김영준 검사장과 함께 살고 있다.
나가서 살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유는 여자다.
검사라는 번듯한 직업과 직장인의 월급을 하룻밤에 날려도 괜찮을 정도로 많은 재력.
놈은 매일같이 여자를 바꿔 만났고 최근에는 기획사의 연습생까지 건드는 모양이다.
김영준 검사장과 한집에 살아도 이러는데, 만약 따로 산다면?
시사프로그램에서 ‘성매매 현직 검사’, ‘여성 수십 명을 농락한 현직 검사’등의 제목으로 특집 편성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그대로 내뱉기는 어렵다.
농담은 농담으로 적당히 맞춰줘야 한다.
“그럼, 지방으로 내려와.”
“미쳤냐? 됐으니까 술이나 마시자. 어디서 마실까? 여기? 아니면 아일랜드 식탁?”
서진이 아일랜드 식탁을 가리키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김윤환을 위해 준비한 위스키, 맥켈란 21년을 꺼냈다.
맥켈란 21년, 동생 진영을 통해 알아낸 것으로 김윤환이 평소 즐겨 먹는 술이라고 한다.
주류 도매 업체에서도 수십만 원이 넘어가는 것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돌아왔어?”
술병을 본 김윤환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뭐, 조금씩.”
서진은 어깨를 으쓱한 후 김윤환과 마주 앉았다.
안주는 살짝 익힌 소고기와 감자 칩, 피자 등등.
서진이 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요즘 어때?”
“어떻기는, 너 때문에 죽겠지.”
“나? 왜?”
“새끼가 모른 척하기는.”
서진이 김영준 지검장에게 박상영 부장에 관한 것을 일렀기 때문이다.
“마셔.”
김윤환이 잔을 들었고 맥켈란 한 병이 비워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서진은 곧바로 꼬냑을 꺼냈다.
이어지는 양주에 김윤환의 표정이 밝아진다.
“새끼, 진짜 돌아왔구나? 예전의 넌 소주 같은 것은 입도 안 댔어.”
“그래?”
“얼마나 고급스러운 것만 먹었는지, 왕족인 줄 알았다니까? 하긴 저 식탁이랑 소파 보면 프랑스 왕족이지. 흐흐흐.”
술이 들어갔나 보다.
별것도 아닌 말에 혼자 끌끌 웃고 있다.
게다가 서진이 틱틱대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으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놈은 가출했던 고양이를 다시 만난 것처럼 즐거워한다.
하지만 서진은 취하지 않았다.
녀석의 표정을 살피며 술을 따랐고 녀석의 주량을 조절하고 있다.
만취하는 것은 안 된다.
적당히 흥분된 상태.
녀석은 딱 그만큼만 취해야 한다.
“그래서, 고민이 뭐야?”
김윤환이 술잔을 내려두며 물었다.
“고민?”
“그래, 고민 있다며?”
서진이 준비한 고민.
이십 대 후반의 검사가 흔히 할 수 있는 것이며 김윤환의 마음에 쏙 들어야 하는 것.
그러면서 놈을 자극할 수 있는 것.
“순환 근무 마치기 전에 서울로 갈 방법이 없을까? 형도 오면서 봤잖아. 여기서 할 게 없네.”
“우리 아버지가 서울로 올려준다고 했을 때 오지 그랬어? 거절했다며?”
“빽 쓰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 지금도 빽 있다고 가끔 눈칫밥 먹거든.”
서진이 멋쩍은 표정을 짓자 김윤환은 배를 잡고 웃었다.
“머리 좋은 것만 재능이야? 아니야. 돈 있고 빽있는 것도 재능이야. 눈칫밥을 왜 먹어? 서울에 오면 다 네 눈치 볼 텐데.”
“그러니까.”
서진이 술잔을 만지작거리자 김윤환이 웃음을 그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표정 보니까... 진짜 서울 오고 싶은 거였어?”
“그럼 거짓말하겠어?”
“하, 새끼... 박상영만 아니었어도 내가 어깨에 힘 딱 주고 너 끌어주는 건데.”
이럴 때는 또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
서진이 놈의 술잔에 술을 채우며 고개를 숙였다.
“박상영? 그건 미안했어.”
“됐다. 지난 일이야.”
“그때 신종승이 계속 시비 걸었거든.”
“어? 무슨 말이야?”
“내가 서울에 가면 형 밑에서 시다나 할 거라며 비아냥댔어.”
물론 서진은 신종승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본 것을 떠올리며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김윤환은 순간 멈칫거렸다.
술잔을 꽉 쥐며 중얼거린다.
“신종승이?”
“어.”
삼자대면을 해도 상관없다.
김윤환과 신종승의 비밀 대화였다.
그런데 그것을 서진이 알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떠벌렸다는 것.
당연히 범인은 신종승이 되는 거다.
서진이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게 신종승의 허세였다는 것을 알아. 신종승이 좀 그렇잖아. 괜히 형이랑 친한 척하고. 그런데, 그때는 그걸 알면서도 형이 좀 미웠어.”
“야! 당연히 아니지. 우리는 가족이잖아? 그런데 내가 너를 시다로 부린다고? 날 몰라? 야, 내가 신종승이랑 어울려도 너 기억 잃어버린 것은 입도 꺼내지 않았어. 그런데, 그걸 믿었고? 실망이다.”
김윤환이 갑자기 발끈하며 화를 냈다.
찔리는 게 있어서다.
술을 마시며 중얼중얼 쌍욕을 이어가고 있다.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 내가 오해했어.”
잠시 적막해졌다.
다시 몇 잔을 마셨고 이번엔 와인을 꺼내 들었다.
연이어 나오는 고급술에 김윤환을 만족한 표정이었다.
서진이 와인을 따르며 지나가는 말처럼 툭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사건, 하나만 형이 들고 가서 터뜨려도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을 텐데.”
이제 밑밥은 깔았다.
김윤환의 표정을 살필 시간이다.
놈은 취했다.
사건이라는 말에 놈의 눈동자는 자연스레 서재로 향하고 있다.
서진이 놈의 앞으로 술잔을 내려두며 계속 말했다.
“아, 얼마 전에 재밌는 사건이 하나 생겼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애들인데...”
김윤환에게 서진의 목소리는 첫 사건을 손에 쥔 어린 애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서진의 의도였다.
*
잠시 후, 서진이 방에 들어가 누웠고 김윤환은 와인잔을 들고 서재로 향했다.
책상에 던져진 사건을 보며 김윤환의 눈이 씁쓸하게 변했다.
김윤환은 이력에 도움 되지 않는 허접한 사건만 맡고 있다.
이런 상황에 책상에 깔린 굵직한 사건은 탐이 난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이곳은 강원도.
중앙 지검의 관할과는 너무 멀다.
‘젠장.’
김윤환은 기록물을 손에 들어 살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놈들?”
서진이 말했던 사건이며 처음 들어왔을 때도 눈에 띄었던 거다.
‘아직 밝혀진 것은 어떤 것도 없다고?’
김윤환은 기록을 툭툭 넘겼다.
서진의 추리에 의하면 피고인이 누명을 쓰고 있는 사건.
범인은 그 학교의 양아치였던 놈들.
‘검사란 새끼가 셜록 놀이를 하고 있네.’
검사는 추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놓인 기록물을 보고 그 안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비웃던 김윤환은 어느새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진의 추리와 가리키는 증거가 그럴듯하다.
지금껏 서진이 이런 식으로 미제를 풀어나갔다 싶을 정도다.
‘하...’
김윤환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서진이 이 사건을 해결하면 또 이름을 알릴 것 같았다.
***
그런데, 김윤환에게도 기회가 왔다.
며칠 후.
“강원도 사는 새끼가 여기서 왜 깽판을 치는 거야? 그쪽으로 넘기면 안 돼? 가뜩이나 일이 많아 죽겠는데. 하...”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김윤환과 같은 부서에 있는 검사가 짜증을 내며 통화하고 있었다.
강원도라는 말에 김윤환의 귀가 쫑긋댔고 검사는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이제 스무 살짜리잖아? 이름이 뭐라고? 김용우? 그냥 강원도로 보내!”
김용우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김윤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알고 있는 이름이다.
서진이 만든 추리 소설에 있던 놈.
아파트 추락 사건의 주인공 중 하나.
김윤환의 입이 바짝 말랐다.
‘설마...’
동시에 김윤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는 김서진.
“어, 서진아.”
-형, 그때 내가 이야기했던 일 기억해?
“어떤?”
-고등학교 졸업한 놈들...
김윤환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척했다.
“미안, 뭐였지? 그때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하, 그놈들 중 하나가 서울에서 사고를 쳤어. 복잡해 죽겠네.
서진의 앓는 소리를 들으며 김윤환의 눈이 반짝였고 머릿속의 세포가 빠르게 회전했다.
-서진은 아직 추리 소설을 쓰는 중이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이곳에서 사고를 쳤다.
-즉, 서울에 잡아 둘 수 있다는 것.
-그럼, 김윤환이 뺏을 수 있다.
-가벼운 사건으로 시작해 살인 사건까지 발전시키면?
-김영준 검사장이 인정해 줄 거다.
-역시 너는 내 아들이야.
생각을 마친 김윤환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김윤환은 통화를 종료 후 시선을 틀어 화장실에 있는 검사를 바라봤다.
그리고 검사가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다가가 입을 열었다.
“김용우라는 놈, 혹시 춘천 사는 놈입니까? 재수생?”
“어? 네가 어떻게 알아?”
김윤환은 모른다.
김용우가 이곳에서 사고를 친 것도.
그 검사가 김윤환의 앞에서 사건을 떠벌린 것도.
모두 서진의 손바닥이었다.
*
잠시 후.
조우재 부장검사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앞에서 김윤환이 허리를 굽히고 있어서다.
“허락해 주십시오.”
김영준 검사장은 김윤환에게 사건을 배정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조우재 부장검사는 김윤환에게 제대로 된 사건을 주지 않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겠습니다.”
조우재 부장검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을 텐데 김윤환이 이렇게 의욕적으로 달려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야, 기물파손이잖아? 별것도 아닌데, 왜 그래?”
“악플러 잡는 것은 이제 질렸습니다. 조금이나마 감각을 키우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허락해 주십시오.”
조우재 부장검사가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볼펜을 또각거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는 김영준 검사장도 눈감아 줄 것 같았다.
김윤환의 말대로 이제 슬슬 감각을 돌릴 때도 됐고.
“조잡한 사건이지만 제대로 해라.”
조우재 부장검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김윤환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혔다.
“감사합니다.”
김윤환이 미끼를 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