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38화 (38/250)

<비밀스럽게 -(4)>

그렇게 도광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으로의 계획과 실행 날짜 그리고 필요 경비.

5분 정도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래, 고생해.”

통화가 종료됐다.

조금 있으면 자유롭게 사용해도 되는 수십억의 돈이 생긴다.

그것도 로또를 몇 번이나 맞춰야 할 정도로 큰돈.

비싼 아파트에 좋은 자동차, 명품 재킷을 입고 비싼 시계를 손목에 올려도 남는다.

월급으로 생활하던 공무원에게 수십억의 돈은 가늠도 어려운 액수다.

하지만 서진의 눈빛은 담담했다.

꿈을 펼치기엔 작은 액수다.

자칫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머리를 차갑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서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소희가 부탁한 메로나와 월드콘을 사기 위해서다.

아이스크림뿐만 아니라 음료도 몇 개 넣었다.

그리고 카운터 앞에 섰는데 먼저 계산하는 손님이 있다.

손님이 구매하는 것은 비타민 음료.

누군가를 면회 온 것 같다.

그리고 그 손님이 몸을 돌렸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어?’

서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익숙한 얼굴, 3년 전 이 병원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던 남자.

당시는 검사였지만 지금은 포르쉐 오너 강치하 변호사.

서진이 다급히 고개를 틀었다.

강치하 변호사와 마주한 적이 없다.

하지만 ‘세상을 본다’가 어제 방영되었고 그간 서진의 얼굴이 나름 알려졌다.

관심 두고 봤다면 알아볼 수도 있다.

다행이다.

강치하 변호사는 서진의 옆을 슥 스쳐갔고 서진은 긴장된 한숨을 작게 내뱉었다.

그리고 시선을 틀어 강치하 변호사의 뒷모습을 쫓았다.

‘뭐지?’

갑자기 왜 이곳에 나타났을까.

이유가 무엇일까.

서진은 비닐봉지를 들고 강치하 변호사를 향해 움직였다.

*

“7층.”

“어?”

“아이스크림은 나중에 먹자.”

서진이 아이스크림과 음료가 든 비닐봉지를 건네며 말했다.

이소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서진을 봤다.

“차근차근 알아듣게 말해봐.”

하지만 서진은 이미 앞서 걷고 있었다.

이소희가 달려와 옆에 서자 서진이 입을 열었다.

“강치하 변호사가 이 병원에 와 있어. 7층에서 내렸고 어느 병실인지는 모르겠어. 이제 찾아봐야지.”

“강치하 변호사가?”

서진과 이소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곧 7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병실의 열린 문틈을 살피며 강치하 변호사를 찾았다.

그렇게 어느 1인 병실에 도착했다.

이소희가 걸음을 멈추고 문에 걸린 환자 이름을 가리켰다.

“오윤석 검사님 병실이네.”

오윤석, 이번에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다.

그 덕에 형사 3부와 이소희의 일거리가 확 늘어났다.

이소희가 말을 이었다.

“여기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서진이 고개를 끄덕인 뒤 문에 귀를 갔다 댔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변호사 생활은 어때?

-동남에 있을 때가 좋았어. 할 일도 없고 있어도 안 했고.

-바쁘다고 자랑하는 거야?

서진이 이소희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맞아. 여기야. 그런데 오윤석 검사님, 심하게 다쳤어?”

이소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열흘 정도면 퇴원한다고 들었는데.”

서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울에 있는 사람이 병문안을 올 정도면 세 가지다.

-정말 친하거나.

-심하게 다쳤거나.

-지나가는 길이거나.

그런데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서진이 생각한 그 세 가지 이유가 아니다.

-요즘 시끄럽더라?

-이번에 입사한 애들이 열정적이야. 지청장님도 목적이 있는 것 같고.

-목적? 지청장님이?

-어, 중앙으로 나갈 생각인 것 같아.

강치하 변호사는 계속해서 동남 지청의 분위기를 묻고 있다.

갑자기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냐.

지청장이 서울에 갈 확률이 높을 것 같냐.

등등등.

뭔가 찝찝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잠시 조용하더니 문 바로 앞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흡연장 없지? 밖으로 나가야지?

서진의 인상이 콱 구겨졌다.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강치하 변호사는 손만 뻗으면 문고리가 닿을 거리에 서 있다.

걸릴 게 분명하다.

찰나의 순간, 서진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상대는 변호사다.

친하지 않은 검사의 문병을 왔다는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을 거다.

게다가 서진의 이름과 얼굴이 알려져 있다.

편의점에서는 스쳤지만 이번엔 알아볼 거다.

최악의 상황에는 서진이 이 병원을 쫓고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도 있다.

‘어쩌지?’

서진의 표정을 이소희가 봤다.

그녀가 다급히 달려와 문고리를 콱 잡았다.

안에서 열 수 없도록.

동시에 덜컥! 덜컥! 문이 흔들렸다.

이소희가 빠르게 속삭였다.

“가!”

이소희의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다.

프리하다.

게다가 오윤석 변호사와 같은 형사 3부, 문병의 명분은 충분하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인 후 복도의 끝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뭐야? 왜 안 열려?

-응? 안 열린다고? 비켜봐.

병실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이소희가 한숨을 내뱉으며 힘을 빼자 그제야 문이 스르륵 열린다.

“열리잖... 어?”

“안녕하세요?”

이소희가 활짝 웃으며 허리를 굽혔고 오윤석 검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같이 당기고 있던 거야?”

“그런 것 같아요.”

이소희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오윤석 검사가 허허 웃으며 물었다.

“그래, 어쩐 일이야?”

“퇴근하는 길에 들렀습니다. 괜찮으신가 해서요.”

“난 괜찮지, 그런데 이 검사 얼굴 보니까 괜히 미안하네. 일 배울 시간에 일주고 도망친 것 같아서.”

조용히 있던 강치하 변호사가 오윤석 검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구야?”

“아까 말했지? 열정적인 신입 사원.”

“아...”

강치하 변호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만큼 예쁜 사람을 보는 게 흔치 않은데 직업이 검사.

말 그대로 대박인 거다.

이소희가 강치하 변호사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소희입니다.”

“이런 예쁜 후배가 들어올 줄 알았으면 나도 계속 여기 있었을 거야. 총장을 목표로 최선을 다했겠지.”

“너 있었으면 안 왔을 거야. 그래서 고오맙다.”

강치하 변호사와 오윤석 검사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강치하 변호사가 이소희의 손에 있던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

살짝 안을 살핀 그가 큭큭 웃었다.

“센스 있네. 올 때 메로나.”

오윤석 검사가 픽 웃는다.

“몇 년 전 개그야? 올 때 메로나라니.”

***

“조심해요. 지청장이 미쳤으니까.”

그날 밤, 강치하 변호사는 룸살롱에 앉아 있었다.

강치하 변호사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앞을 바라봤다.

한 남자가 보인다.

두꺼비처럼 생겼고 토실토실 살이 찐 돼지.

그가 꼬아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올리며 입을 열었다.

“씨발, 다 끝난 일 아냐?”

강치하 변호사가 남자의 잔에 술을 채우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엎어진 사건이라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병원이라는 게 쉽게 건들기 어렵거든요. 검사가 병원 일을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터지면 임팩트가 좋아. 병원이라는 게 예민한 문제니까요. 그러니까 지나친 걱정은 아니어도 긴장은 좀 합시다. 오케이?”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강치하 변호사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희소식도 있어요.”

“뭔데?”

남자가 눈동자를 틀어 강치하 변호사를 향했다.

“요즘 이 시골 바닥이 시끄러운 이유 중의 하나가 까부는 신입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대단한 줄 알았는데 그냥 귀여운 애들이에요.”

남자가 이해한다는 듯 큭큭큭 웃었다.

“나도 동네가 흉흉해서 알아봤어. 동남에 들어온 신임 검사, 김서진. 그놈 용하데.”

평가는 딱 거기까지였다.

용한 놈.

남자가 술잔을 손에 쥐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소 뒷걸음질에 쥐가 밟혀 죽으면 누구 잘못이야?”

“쥐가 병신인 거죠.”

“그래,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휘둘리는 게 웃긴 거지. 조심은 할게. 그런데 딱 거기까지. 그럼 되는 거지?”

“네.”

강치하 변호사가 빙긋이 웃었다.

그러자 남자가 테이블에 놓인 벨을 꾹 눌렀다.

문이 열리고 마담이 들어온다.

“어머, 벌써 마셨어요? 아가씨들이랑 같이 드시지.”

마담의 뒤로 룸살롱의 아가씨들이 쭉 섰다.

그런데 남자는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고 가운데 선 머리 긴 여자를 손으로 짚었다.

“됐어. 난 민희밖에 없어. 그러니까 내숭 떨지 말고 와서 앉아.”

민희라고 불린 여자가 남자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요새 왜 이렇게 안 왔어?”

“바쁘니까 안 왔지!”

남자가 실실 웃으며 여자가 들고 온 손바닥만 한 가방을 가리켰다.

“그건 뭐야? 뭐가 들었어?”

“이거? 립스틱하고 휴대폰, 담배. 왜? 담배 줘?”

“됐어. 술이나 마셔. 강 변호사, 어서 초이스해!”

“그럼, 난 저기 끝에 빨간 원피스.”

남자가 낄낄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

“나 화장실 좀.”

민희라고 불린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에 술병이 나뒹굴고 강치하 변호사와 남자도 만취했을 때다.

웨이터가 왔고 그녀의 귀에 속삭여서다.

-지명. 두 테이블 돌 수 있겠어?

여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방을 나와 바로 옆방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자 20대 초중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서진이었다.

여자가 활짝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 처음 보는데, 날 지명했다고?”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 이런 잘생긴 오빠 지명도 받아보고. 담배 하나 피워도 될까?”

이번에도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며 말한다.

“그런데, 술은? 안 시켜?”

서진이 품에서 백만 원 한 묶음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툭.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뭐야? 비싼 술 시키라는 거야?”

서진이 백만 원 하나를 더 던졌다.

툭.

이백만 원.

여자가 억지로 웃었다.

“미치겠네. 뭘 원하는 거야? 변태 학생이었어?”

서진이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옆방에 네 파트너. 누구지?”

“어?”

서진은 강치하 변호사가 병원 이사장을 만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서진은 그 남자가 궁금했다.

여자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비꼬듯 이어졌다.

“내 파트너는 알아서 뭐 하려고?”

“......”

“심부름센터야? 마누라한테 지시라도 받았니? 이 돈 받고 손님 정보 팔라고?”

“......”

“술 따르는 년이니까 만만해 보여? 여기가 우습게 보여? 죽고 싶어?”

여자가 옆방에 있는 남자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자에게 남자는 물주다.

지금 이백을 받는 것은 돈 주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서진이 백만 원 하나를 더 던졌다.

툭.

삼백만 원.

그러자 그녀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야!”

쾅! 문이 열리고 무섭게 생긴 덩치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이 서진을 죽일 듯 노려보며 상황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자가 빠르게 설명했다.

“이 새끼 심부름이야! 여기 와서 손님을 묻고 있어. 미친 새끼!”

곧바로 덩치들이 윽박질렀다.

“심부름?”

“양아치 새끼가 확!”

“야, 나가! 가!”

살벌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지만 서진은 느긋했다.

“선택해라.”

그 말에 덩치들이 크게 웃었다.

“와, 새끼. 영화 봤네.”

“이제 우리 막 얻어맞고 그런 거야? 삼류 영화처럼?”

능글맞은 목소리에는 곧 폭력이 일어날 것 같은 살기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팔을 걷으며 천천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조용히 돈 챙기고 정보를 팔래 아니면.”

“아니면?”

서진이 테이블 위에 신분증을 던졌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신분증으로 향했다.

-검찰.

이죽대던 덩치들의 목소리가 음 소거 된 것처럼 사라졌다.

분위기는 서리가 내린 것처럼 싸늘하다.

덩치들의 시선이 서진에게 옮겨졌다.

그들은 서진을 순한 청년으로 생각했다.

이제 막 심부름센터에 입사해 열심히 일하는 청년.

그런데 그 청년의 표정이 돌변했다.

순한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사악하고 무서운 악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의 귓속에 서진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아니면, 오늘부로 가게 문 닫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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