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37화 (37/250)

<비밀스럽게 -(3)>

이소희의 눈동자가 다시 서진이 내민 종이로 향했다.

-동남 중앙 병원.

10년 전, 서울에서 내려온 장용민 이사장이 부도 직전의 정형외과를 인수하며 시작됐다.

처음에는 30평 대의 작은 병원이었지만 지금은 임상 7개 과, 12명의 전문의를 갖춘 종합 병원으로 성장해 동남군의 랜드 마크가 되었다.

그렇다해도 도시의 대학병원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다.

하지만 의료 시설이 부족한 시골에서는 가뭄의 단비같은 곳이다.

그리고 지역민들은 동남 중앙 병원을 향해 친절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착한 병원이라며 칭찬한다.

하지만 서진은 이 병원을 문제 삼을 생각이다.

“...이걸 왜?”

3년 전, 경찰이 제보를 받고 수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당시 경찰이 낸 자료를 보면.

-입원할 필요가 없는 환자를 입원시킴.

-거짓 진료 영수증을 발급하고 진료 차트를 조작.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보험금이 약 25억 원.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은 요양 급여비가 약 10억 원.

그런데 동남 중앙 병원의 이사장 장용민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경찰의 수사가 억측이었다며 무혐의 처분을 받은 거다.

그 처분을 내린 것은 당연하지만 동남 지청의 선배 검사다.

그런데 신기하게 경찰 측도 조용했고.

이소희가 입을 열었다.

“3년 전 사건이잖아. 그리고 선배들이 무혐의 처분 내렸던 사건이고. 그런데 다시 끄집어낸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선배들을 무시하는 거다.

그들을 향해 주먹 꽉 쥐고 맞붙겠다는 뜻이며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 검사들은 이미 옷 벗었어.”

무혐의 처분을 내렸던 검사들은 사건이 끝난 후 약속한 것처럼 옷을 벗었다.

이소희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지청에서 옷 벗는 검사가 한둘이야?”

이곳은 유배지다.

옷 벗고 그만두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만뒀다고 끝이 아니잖아. 그 사람들의 동료, 동기가 남아 있어. 좋게 보지 않을 거야.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있어.”

“뭐?”

“그러니까 같이 하자.”

서진이 엷게 웃었다.

그리고 이소희는 고민했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 또 눈에 띌 수 있다.

동남군을 벗어나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거다.

이소희의 눈동자가 태블릿PC를 향해 기울어졌다.

백기호 의원을 검색했던 그 태블릿PC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이소희가 마른침을 삼켰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빠질래. 할 일이 많아. 가뜩이나 오 검사님이 교통사고로 입원하면서 더 많아졌어.”

서진의 시선이 이소희의 책상으로 옮겨졌다.

서류가 이소희의 키보다 더 높이 쌓여 있다.

처리해야 할 일이다.

일일이 읽어보며 법리를 찾아 기소와 불기소를 구분하고 취조도 해야 한다.

집에도 가져가고 주말에도 출근해야 할 정도다.

물끄러미 서류를 보던 서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까?”

“됐어. 너도 할 일 많잖아.”

책상 위에 놓인 서류가 어마하지만 신입인 것을 배려해 업무량을 조절한 거다.

고참 검사들이 봤을 때는 ‘저만큼만 있으면 오전 근무만 하고 찜질방 가겠네.’ 라고 할 정도.

하지만 상대는 서진이었다.

껍데기만 신입.

“할 일은 많지만 도와줄게.”

“야, 됐다니까.”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잖아. 출근할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서진은 이미 이소희의 책상에서 서류를 뭉텅뭉텅 들어 나누고 있었다.

‘이만큼은 내가 할게.’ 라는 말과 함께.

이소희가 서진을 말렸다.

“너 지금 술 먹고 오버하는 거야.”

“오전에 끝내고 점심에 국밥 먹으러 가면 되겠네.”

이소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코웃음 쳤다.

“오전에 끝낸다고? 이만큼을?”

“어.”

“그게 가능하다고?”

“물론.”

“그래, 그럼. 한번 해봐.”

이소희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서진이 뛰어나다 해도 불가능하다.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과 경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기 ㅤㄸㅒㅤ문이다.

경험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서진이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손으로 툭툭 치며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국밥 먹으러 갈래?”

“...어?”

이소희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아직 반도 더 남았다.

그런데 서진은 정말 오전에 끝내 버렸다.

이소희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대충했지? 대충하면 큰일 나는 거 몰라?”

검사들에게 서류는 업무다.

하지만 저 서류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걸려 있다.

피의자에서 피고인이 될 수 있고 피 말리는 법정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검토하고 또 검토해야 한다.

이소희가 도끼눈을 뜨고 서진을 노려봤다.

그리고 책상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향하더니 서류를 착착착 넘겼다.

‘어?’

그런데 다 맞다.

유심히, 그것도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이소희가 생각해도 맞는 것 같다.

다른 기록물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다.

이소희의 눈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미쳤어.’

이소희가 눈을 크게 뜨고 서진을 향했다.

“어떻게 한 거야?”

서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딱 보면 알잖아? 기소인지 아닌지.”

“말도 안 돼.”

이소희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검토하던, 복잡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던 사건 하나를 서진에게 건넸다.

“이것도 해봐.”

“이런 거 계속해주면 안 되는데.”

서진이 웃으며 서류를 툭툭 넘겼다.

그리고.

“기소.”

단호한 목소리에 이소희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서류를 읽는 것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서진은 대충 읽더니 답을 내버렸다.

“줘봐.”

이소희가 다시 검토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서진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시선이 서진을 향해 틀어졌다.

동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이무기가 거만하게 웃고 있는 느낌이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대박.”

“별거 아니야. 하다 보면 너도 할 수 있어.”

너도 할 수 있다니...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재수 없었다.

하지만 서진은 실력을 보여줬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과 로스쿨까지, 이소희는 단 한 번도 경쟁에서 뒤쳐본 적이 없었다.

이유가 있어 동남군까지 밀려났지만 스스로의 실력을 의심한 적은 없다.

그런데 감탄할 정도의 괴물이 나타났다.

자신이 오랜 시간을 고민해서 답을 내는 동안 대수롭지 않게 결과를 뽑아내다니.

이소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내가 바보 멍청이였구나.”

이소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하는 것을 보며 서진이 입을 열었다.

“병원, 같이 하는 거지?”

“그래, 하자. 해. 핑곗거리도 없네.”

“나머지도 도와줘?”

“됐네요.”

이소희가 서류에 시선을 파묻는 것을 보며 서진은 태블릿PC를 손에 들었다.

어제 이소희가 백기호 의원을 검색했던 그 태블릿PC다.

‘백기호.’

이소희는 분명 백기호 의원을 의식하고 있었다.

서진은 태블릿PC로 인터넷을 접속한 후 방문 기록을 살폈다.

-백기호 의원 보육원 방문. 아이들 안으며 따듯한 위로.

-백기호 의원 “대권? 관심 없다. 낮은 곳에서 국민과 함께하겠다.”

-백기호 의원, 저소득층 위해 1억 원 기부.

따로 댓글을 쓰던가 하는 활동은 없었다.

하지만 과도하게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다.

-좋아하거나.

-증오하거나.

그런데 이소희의 표정을 보면 증오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서진은 ‘백기호’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뒀다.

*

“밥 먹으러 가자.”

1시간이 더 지났을 때다.

이소희가 서류를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진도 태블릿PC를 책상에 내려두며 이소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다 했어?”

“어, 덕분에.”

지청에서 나온 두 사람은 멀지 않은 순댓국밥집에 마주 앉았다.

순대국밥을 시키면 머리 고기가 딸려 나오는 맛집이다.

국밥이 나오기 전 이소희가 젓가락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병원,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그만둔 검사들 그리고 동남 중앙 병원 장용민 이사장. 마지막으로 당시 경찰 서장. 모두 동남군 타이거즈 클럽 회원이야.”

타이거즈 클럽, 봉사와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한 전 세계적인 단체다.

하지만 봉사는 명목상 의미일 뿐, 실상은 지역 유지의 친목 모임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진이 이소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아?”

“증거는 아닌 것 같은데?”

“사건 끝나고 곧바로 옷 벗은 우명순 검사, 지금 서초동에 살고 있어. 강치하 검사는 포르쉐 오너고.”

“변호사 개업해서 돈 많이 번...”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날짜 확인해 봐. 돈 많이 벌기 전에 산 거야.”

정의롭던 검사가 유배를 와서 돈맛을 알았다.

그리고 검사의 권력을 이용해 범죄자의 죄를 씻어줬다.

서진이 등기부 등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동남군이 또 시끄러워질 거야.”

동남군이 계속 눈에 띄면 사냥개를 원하는 악당들이 움직일 거다.

서진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서진이 동남 중앙 병원을 타깃으로 잡은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동남군 국회의원 엄일섭.

이번 총선에 동남군을 떠나 송파구 국회의원에 도전장을 내밀 사람.

엄일섭 의원은 서진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진은 우진욱 보좌관으로 노선을 갈아탔다.

-우진욱 보좌관 : 송파구 조선봉 의원의 보좌관.

서진과 한배를 타고 송파구 후보로 나서려 한다.

그러니까 엄일섭 의원은 박살 낼 대상이며 그 역시 타이거즈 클럽의 회원이다.

3년 전,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이사장 장용민과 엄일섭 의원 그리고 당시 검사들은 각별한 사이였다.

골프도 치고 술도 마시고 룸살롱도 가고.

해서, 이번 병원 비리를 통해 한통속으로 묶어 처넣을 계획이다.

그리고 우진욱 보좌관을 국회의원으로 만들면 끝.

서진의 손에 국회의원이라는 엄청난 무기가 생기게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할 첫 번째 일은...”

*

국밥을 먹은 뒤, 서진과 이소희는 병원으로 향했다.

지난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만큼 일단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즉, 지금 시점에 경찰의 도움을 받기는 어렵고 일단 현장을 돌며 분위기를 파악하기로 했다.

주말이지만 병원 로비에는 사람이 꽤 많다.

입원 환자를 온 면회객, 병실이 답답해 밖으로 나온 환자들.

서진과 이소희도 로비에 앉아 주변을 관찰했다.

“이러면 답이 나오나?”

이소희의 질문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환자들의 대화를 잘 들어봐. 보험금이나 공돈 또는 알바비 같은 거. 그럼, 답이 나올 수도 있어.”

그때였다.

서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도광현이었다.

서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고 싶은 거 있어? 편의점 다녀올게. 삼각김밥?”

“내가 돼지 같아? 방금 밥 먹었잖아? 됐어. 아이스크림이나 사와.”

월드콘이나 메로나를 사 오라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진은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코너를 돌아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 서진은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데 평소 쓰던 휴대폰이 아니다.

전혀 다른 디자인.

휴대폰을 귀에 대자 도광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장 준비됐습니다.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서진이 슬쩍 웃었다.

“어, 그렇게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