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1화 (11/250)

<유능하다는 것. -(1)>

***

서진은 요란한 알람소리를 들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끄음.”

지끈 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구상진 변호사에게 빅엿을 먹인 기념으로 회식이 있었다.

첫 잔은 가볍게 맥주였지만 실무관의 입에서 먹고 죽자는 구호가 외쳐지며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가득 놓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실무관이 수사관의 양 볼을 잡아당기며 끝이 났다.

그때, 실무관이 했던 말이...

-수사관님 귀여워요.

참고로 실무관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 수사관은 사십대 후반이다.

오늘 어떻게 출근해서 수사관을 볼지 참 걱정이다.

서진은 슬쩍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기에 물을 틀자 찬 물이 몸에 닿으며 어젯밤 일이 더 선명하게 기억났다.

회식 자리에 이명수 검사의 팀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부장 검사가 잠시 자리했고 다른 검사들도 스치며 서진을 향해 한 마디씩 던졌다.

그 말을 요약하면 하나다.

-운이 좋네, 열심히 해라.

그 말에 동의한다.

서진은 운이 좋았다.

적절한 시점에 흑백의 세상이 나왔고 우수경의 휴대폰이 발견됐다.

그 덕에 베테랑이라 알려졌던 구상진 변호사가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박살났다.

서진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첫 단추는 잘 끼웠어.’

이제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를 끼우며 운을 실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서진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달력의 날짜를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새롭게 활동할 발령지가 발표된다.

‘어디로 가게 될까?’

어디로 가든 큰 상관은 없지만 될 수 있으면 수도권으로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발표야.’

서진이 손가락으로 툭 달력을 치는데 그 순간 세상이 색을 잃었다.

*

“등신 아니냐?”

미국의 여성 보컬 노라존스의 Don’t know why가 조용히 흐르는 바였다.

김영준 검사장의 아들 김윤환이 위스키 잔에 술을 채우며 낄낄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란히 앉은 신종승이 입을 열었다.

“난 김서진이 구상진 변호사님 박살냈을 때 만 해도 진짜 운이 좋은 줄 알았어. 그런데, 이게 뭐야? 그 운이 전부였어. 첫 끗발이 개 끗발이었던 거지.”

신종승의 말에 귀 기울이며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흑백의 세상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여주는 중이다.

가벼운 재킷이 의자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봄 또는 가을.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을 할까...

신종승이 말을 이었고 세상을 지켜보는 서진은 집중했다.

“그놈 원래 동남군에 남는 거였는데 네 아버지가 서울로 빼줬다며?”

“큰 아버지가 부탁했나 봐. 서진이가 서울에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동남군을 떠나 서울에 온 거지.”

“푸하하하!”

신종승이 깨소금을 털어 넣은 것처럼 웃더니 급기야 배를 잡고 허리를 굽혔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바닥을 구를 기세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신종승이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화면에 기사가 보인다.

[유아성 유괴 살인 사건 10년 만에 해결되나. 동남군 지청장 특별수사팀 구성]

“김서진이 계속 동남군에 있었다면 무조건 이 팀에 들어갔을 거야. 그놈이 우수진 사건 해결하면서 동남 지청이 있다는 것을 전국에 알렸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놈 서울에서 뭐해? 악플 잡고 있잖아? 그 새끼 후회하고 있을 것 생각하니까 속이 시원하네.”

김윤환이 빙긋이 웃으며 잔을 들었다.

“건배.”

*

세상이 색을 찾으며 서진의 눈에 달력이 보였다.

달력을 만지며 앞으로의 활동을 떠올려서 그런지 미래가 나타났다.

‘이거 조절할 수도 있을까?’

어쩐지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사이코메트리들은 능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야 말로 무적이다.

세상 모든 미제 사건을 해결할 수 있고 앞으로 벌어질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서진은 달력을 손에 쥐고 1년 후를 떠올려 봤다.

“......”

역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상식이라는 것을 벗어난 현상이다.

고민하는 것을 뒤로하고 방금 봤던 흑백의 세상을 정리했다.

-조만간 발표될 발령지, 서진은 동남군에 남는 것으로 내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김영준 검사장에게 부탁해서 서울로 갈 수 있게 됐다.

-김영준 검사장은 서진의 인서울은 허락했지만 악플러와 씨름하게 만들었다.

-서진이 김윤환보다 크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다.

-그 사이 동남군에서 미제 사건이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지청장은 특별 수사팀을 구성했다.

서진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눈빛이 매섭게 빛나고 있다.

‘그렇다는 거지?’

서진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아버지 김준만의 재력을 넘어서고 김영준 검사장의 권력을 압도하는 것.

전생에는 세상에 정의를 뿌리내리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세상을 먹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우수진 사건을 해결하며 언론에 이름 석 자가 새겨졌다.

서진을 주목하는 눈이 생겼을 거다.

김영준 검사장도 그걸 경계하는 것 같고...

‘좋아.’

서진은 당분간 서울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청에 남아 미제 사건까지 해결한다면 동남군에 있어도 중심에 다가갈 수 있다.

괜히 조바심을 내며 서울에 갔다가 쩌리가 되느니 여기서 힘을 키운 후 금의환향할 생각이다.

서진은 목표를 정리했다.

-돈과 권력을 갖는다.

-세상을 씹어 먹는다.

-일단은 사람이다.

-사람을 모아야 한다.

-나를 주목하는 권력자들이 내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자...

환생의 최대 무기는 어려졌다는 것.

조바심을 내며 서울에 달려갈 필요는 없다.

날카로운 송곳은 아무리 숨겨도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법이다.

***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산 후 지청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 문고리를 잡는데 안에서 험악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서진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실무관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서진을 보며 눈인사를 전했다.

수사관은 보이지 않고 이명수 검사가 험악한 얼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3명, 5명 있는 지청에 비하면 여기는 규모가 크다고? 규모가 크면 뭐해! 여기는 유배지잖아! 유배지! 그렇게 좋으면 너부터 여기 와서 근무해! 젊은 새끼를 여기에 왜 처박아!”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이명수 검사가 넥타이까지 풀어 헤치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다가 ‘쾅!’ 전화기를 던지듯 내려놨다.

한 겨울에 창문을 열고 화를 식힌다.

사무실은 서류 한 장 넘기는 것도 눈치 볼 정도로 적막했다.

그렇게 한참 후 이명수 검사가 몸을 틀어 서진을 바라봤다.

“야.”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은 친근해 보였는데, 이명수 검사의 표정에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너희 집 부자라고 그랬지?”

“네.”

“아버지 동생이 김영준 검사장이라고 그랬지?”

“네.”

“빽 좀 써라.”

“네?”

뜬금없는 말에 서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명수 검사는 담담하다.

“내가 모른 척 할 테니까 네 아버지한테 전화하든 뭘 하든 해서 빽 좀 쓰라고!”

“그게 무슨...”

“아직 발표되지는 않았는데, 너희들 다음 발령지가 대충 정해진 것 같아. 그런데, 네가 문제야. 가만히 있으면 동남군에 남게 된다.”

동남군은 꽤 괜찮은 동네다.

바다도 아름답고 맛 집도 많고.

하지만 검사들에게는 유배지다.

빠져 나올 수 없는 감옥.

“여기에 오래 머물면 네 스펙에 안 좋아. 우리 같은 놈이랑 같이 있으면 물들었다고 소문 날 거야. 그럼, 위에서 싫어해. 앞 길 창창한 놈이 사상 검증 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까 아빠 찬스 써서 도망가라. 모르는 척 해줄 게.”

실무관도 고개를 끄덕, 끄덕 거렸다.

이직 서른도 안 된 청년의 창창한 앞길에 똥 덩이를 던져 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전 여기 있을래요.”

담배를 손에 쥐던 이명수 검사의 행동이 멈칫 거렸다.

그가 천천히 서진을 바라봤다.

“...뭐라고?”

“여기 있겠습니다.”

“야...”

“이명수 검사님을 비롯해서 부장 검사님 그리고 지청장님, 과거 어떤 분들이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서 배우고 싶습니다.”

“이 새끼가...”

“벌써부터 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더 배우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서진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이명수 검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음대로 해.”

이명수 검사는 찬바람을 날리며 사무실을 떠났다.

문이 쾅 닫히고 실무관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워서 저러시는 거예요.”

잠시 후, 흡연실에 선 이명수 검사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방금 봤던 서진의 엷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 남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명수 검사의 과거 흔적을 보고 배우고 싶다는 거다.

‘젠장.’

문제는 과거의 이명수 검사는 이제 없다는 거다.

힘 있고 또렷했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술에 찌들었다.

가르쳐 줄 것은 없었고 부끄럽기만 했다.

‘내가 뭘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이명수 검사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능력도 있고 열정도 있는 놈이다.

이런 곳에서 썩게 할 수는 없다.

***

“들었지? 넌 본청으로 간다며?”

“네.”

“난 서울로 가는데.”

“축하해요.”

신종승과 이소희가 지청의 한 회의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 수습이고 연수원과 지청에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고 있다.

지금의 교육은 지청장의 지시로 이뤄지는 실무 교육.

두 사람은 오늘의 강사인 이명수 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서진이 들어왔다.

인사하는 서진을 보며 신종승이 비아냥거렸다.

“들었다. 너 여기 남는다며? 어쩌냐? 시작부터 유배지에 갇힌 거잖아?”

하지만 서진의 표정에는 어떤 불쾌함도 없었다.

딱 봐도 신종승을 한 수 아래도 두고 있다.

짖던지 말든지...

그 느긋함에 이소희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실력이 있으니까 조만간 다른 곳으로 옮길 거야.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소희가 서진을 인정하는 것 같은 말을 하자 신종승이 코웃음을 쳤다.

“실력? 이번 사건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거 운이래. 다른 검사님들이 다 운이라고 그러더라.”

이소희가 신종승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한심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신종승은 그것을 모르는지 당당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이명수 검사가 들어왔다.

이명수 검사의 표정이 사납다.

괜히 눈에 띄면 안 될 것 같았는지 신종승은 슬며시 눈을 피했다.

그런데, 이명수 검사가 서류를 꺼내 신종승의 책상 위에 쾅 내려뒀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신종승입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

신종승이 눈동자를 내려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형법 제347조, 사기 사건이다.

사기는 고의성부터 파고들어야 해서 무혐의처분이나 무죄판정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범죄 중 하나.

신중해야 한다.

신종승은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사장이 수백억의 돈을 갖고 튀었고 그 자금을 담당하던 비서가 공범으로 몰렸다.

비서는 당연히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불기소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이 사람은 단순 비서고 이득을 얻은 게 없습니다. 월급도 최저 임금에 가까운데...”

“넌 어떻게 생각해?”

이명수 검사가 신종승의 말을 끊고 고개를 틀어 서진을 향했다.

서진은 톤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지?”

“비서가 받은 월급은 최저 임금입니다. 이 정도 자금이 오가는 회사에 10년 가까이 함께 있던 비서가 최저 임금만 받고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의료 보험료 같은 것을 의식해서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인데...”

“계속 말해봐.”

“회사에 일하던 다른 직원들 그리고 거래처를 제외하고 일정 기간마다 돈이 들어간 통장이 있을 겁니다. 그 통장의 주인을 찾아서 휴대폰 통화 내역을 뽑으면 비서와 관계가 드러날 것입니다. 비서는 사장에게 수수료 형식의 뒷돈을 받고 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이명수 검사가 슬쩍 웃으며 손가락으로 신종승을 가리켰다.

“이놈과 다른 생각이네?”

신종승은 움찔 거렸고 이명수 검사의 시선이 다시 서진에게 옮겨졌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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