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바닥에 떨어진 제 다리를 소중하게 품에 안아 든 리마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후. 여기 떨어져 있었네! 영영 못 찾을까 봐 걱정했잖아.”
리사와 함께 생성되었던 통로도 존재를 지워 버린 참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뒤엉켜 있던 리마, 알프레드, 데릭, 타란티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뒤에서 느껴지는 노엘의 음산한 기운에 차마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만 쏙 빼놓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젠 나보다도 리사를 더 우선시하기로 했나 봐?”
다들 곱게 말을 씹어 뱉는 노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땀을 흘렸다. 침묵 속에서도 여기저기서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번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노엘의 분노를 받을 준비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잠시 후 들려온 건 노엘의 박수 소리였다. 그가 세 번 큰 소리로 손뼉을 쳤다.
짝. 짝. 짝.
그 소리에 다들 의아해져선 고개를 들어 노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앞으로도 리사를 그렇게 소중히 여겨 줘. 언제나 나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할 거야.”
노엘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보며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하는 걸 보니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경악스러워했다.
“네가 드디어 미쳐 돌았나 본데. 리사는 이미 돌아갔어.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토드는 눈썹을 한껏 찌푸리며 팔짱을 끼고 그를 마주했다. 정말 노엘이 돌아 버렸다고 확신하는 태도였지만, 그 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노엘이 자기 손을 들어 보이니 리사와 나눠 낀 커플링이 반짝였다. 리사의 반지와는 조금 다른 생김새였지만 같은 장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나와 리사는 이미 하나가 되었어. 우린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운명이야.”
베키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토드는 여전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나 들어나 보자는 식이었다.
“그깟 반지 좀 나눠 가졌다고 뭐가 어째?”
“이건 그냥 반지가 아니야.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마력석의 완성된 형태지.”
토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놀라선 베키와 같이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 사용할지 몰랐던 완성된 마력석이 바로 그 커플링이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베키가 심각한 얼굴로 다급하게 묻자, 노엘이 반지를 훑으며 만족스러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 반지는 내가 리사를 쫓을 길이 되어 줄 거야. 존재 자체만으로도 통로가 되는 셈이지. 리사가 어딜 가든 난 이 반지를 통해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 이 별장의 저주도 뚫고서.”
노엘의 말을 들은 모두는 넋이 나간 듯 눈동자의 초점을 떨었다.
베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가만히 당하고 있을 노엘이 아니란 사실을 떠올렸다.
토드는 실소했다. 어이가 없어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미쳤다고 생각했던 노엘보다도 더 미쳐 버린 듯했다.
공포와 혼란의 폭풍을 뚫고 에디가 갑자기 노엘 앞으로 훌쩍 뛰어왔다.
“그런 걸 진작 알려 줬으면 누나가 돌아갈 꿈도 꾸지 않았을 거 아니야! 아, 아니구나. 그럼 반지를 빼 버렸겠구나….”
노엘은 에디의 푹신푹신한 머리를 한껏 헝클어뜨리다 입을 열었다.
“그 반지는 빼고 싶어도 빠지지 않을 거야. 리사의 영혼에 끼워진 거거든. 절대 떨어지지 못하도록 영혼에다 붙였어.”
“뭐?! 그럼 결국 도망가도 소용없는 거였잖아. 근데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결혼식을 올린 뒤 말하려 했어. 그전까진 분위기 깨기 싫었거든. 게다가 리사가 도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긴 했어. 긴장을 놓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지. 근데 막상 겪으니 가슴이 너무 아프네.”
베키는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물었다.
“의심을 다 해소했다고 했잖아.”
“줄곧 날 떠날 것 같은 직감에 괴로웠거든. 그래서 결혼 전까진 리사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준비를 해 왔는데,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대체 마력석을 어디에 감추고 있던 건지 모르겠어.”
“나도 알고 나서 놀라긴 했어. 귀환 마력석을 머리카락 속에 숨겼더라고.”
“하?! 역시 쉽지 않다니까. 그래도 결국은 날 선택해 주길 바랐어. 그런데 리마 때문에 무슨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네? 마지막에 리사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리 말하는 노엘의 매서운 눈매가 살기를 품고 리마를 노려보았다. 30개의 다리를 동시에 바르르 떨던 리마는 노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기어가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 몸체가 뒤집혔다.
“으아아아악! 아, 깜짝이야!”
다들 리마 쪽을 돌아보니 싸늘한 몸의 리사를 볼 수 있었다. 노엘은 성큼성큼 걸어가 의식이 없는 리사의 몸을 안아 들었다.
“리사는 그곳에서의 몸이 따로 있으니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은 노엘은 모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럼 난 리사한테 가 봐야겠어. 리사의 근처에 이물질이 있거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베키는 노엘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이물질이라니?”
노엘은 오랫동안 마력석을 제작해 왔다. 실패작이 많았음은 물론이었는데 꽤 쓸 만한 것도 드물게 있었다.
그중 하나가 상대의 사망일과 사인을 알려 주는 마력석이었다. 그 마력석을 사용한 시점은 꽤 오래전이었는데, 하루 만에 결혼식까지 올리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를 더욱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리사의 사망일은 그쪽 세계의 시간을 기준으로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 오랫동안 숨어 그녀를 몰래 지켜보던 이웃 남자로부터 살해당하는 운명.
그 사실을 알게 된 노엘은 리사에게 그런 절망스러운 운명을 굳이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지 않으면 알게 될 일도 없을 테니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녀석들은 노엘 주변으로 신속히 몰려들었다. 모두 노엘을 둘러싸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엘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낼 정도로 활짝 웃었다.
“그래, 같이 갈 사람? 반지를 통해서 갈 수 있는 건 나뿐이지만, 나와 몸이 닿아 있으면 같이 갈 수 있어.”
같이 갈 수 있다는 그의 말에 하나도 빠짐없이 번쩍 손을 쳐들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준비 제대로 하고 여기로 다시 모이도록 해.”
노엘의 말을 끝으로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준비를 마친 녀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며 공간을 가득 메웠다.
가운데에 선 노엘은 저를 둘러싼 녀석들을 한 명씩 쳐다보며 팔을 굽혀 내밀었다.
“나한테 손을 올려. 이상한 데 만지지 말고.”
다들 키득거리는 소리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노엘의 어깨와 팔, 다리, 등에 모두의 손이 빠르게 접근했다.
그렇게 모두가 노엘과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윽고 반지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고 거센 회오리가 그들을 감쌌다.
***
리사의 아담한 집에 도달한 모두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노엘은 그런 녀석들의 주목을 꽉 잡으며 신신당부했다.
“우린 리사의 눈에 보이지 않아. 닿아도 통과할 거고. 다만, 우리의 몸은 무생물은 건드릴 수 있어. 이상한 소리로 리사를 겁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도록 해.”
리마는 더듬이를 발딱 세우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물론이야! 난 정말 엄청나게 조심할 거야! 자신 있다고.”
“저런 애들이 나중에 꼭 사고 치더라.”
에디의 비아냥에 리마의 동공이 줄어들자 베키가 은근슬쩍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침대에 누가 있다.”
데릭이 나직한 음성을 내자 모두의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 리사의 방에 꽉꽉 들어차 있던 탓에 아무도 침대에 누워 있던 리사를 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노엘은 제일 먼저 그녀의 곁으로 가 엎드렸다. 검은 머리카락의 낯선 모습에 아직 적응이 안 되었지만, 리사 특유의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딘가 아파 보이는 낯에 심히 걱정된 노엘은 만져지지도 않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반쯤 몸을 겹친 채 지켜보았다. 그러니 다른 녀석들도 근처로 살금살금 다가와 눕거나 쪼그려 앉았다.
그렇게 리사가 깨어나기 전까지 모두 그녀의 곁을 지켰다.
***
날이 밝아 왔다. 밤새 리사를 지켜본 노엘은 그녀가 무사히 일어난 걸 확인하고서야 혼자 이물질을 찾으러 나섰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마력석에서 본 집은 리사의 집 바로 아래에 있었다. 이물질의 집에 서슴없이 들어간 노엘은 처음엔 평범한 집이라 여겼지만, 어떤 방으로 들어간 직후 불쾌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벽에 온통 리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이 창문을 통해 몰래 찍은 것이었다.
노엘은 보자마자 그 사진들을 전부 떼어 버렸다. 한 장 한 장 떼고 나니 뭉치가 될 만큼 많았다.
그러다 벽장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파손으로 뚫린 큰 구멍을 발견했다. 구멍 안에는 비닐로 아주 꽁꽁 감긴 물체가 놓여 있었다. 그건 사람의 형태였으며,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숨겨져 있었다.
이물질은 연쇄 살인마였다.
‘리사, 네 근처엔 왜 이렇게 정상적인 녀석이 없는 건지 모르겠어.’
노엘은 그를 어떻게 처리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 품에서 마력석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 마력석 역시 영영 쓸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실패작 중 하나였다.
사용자가 다른 몸으로 빙의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시간제한이 있어 오래 빙의하고 있을 순 없었지만, 리사와 만나 이야기할 수 있었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온 그녀가 정말 행복한지 알고 싶었다. 자기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없는 건지 궁금했다. 벌써 자길 지워 버린 게 아닐지 초조했다.
마음 같아선 빙의하자마자 이 몸을 자결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도 죽고 만다. 빙의하게 된 순간엔 자기 몸이나 다름없게 돼 버리는 것이었으니까.
덜컥!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물질이 드디어 들어온 모양이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절규하는 꼴을 볼 수 있었다.
“사…, 사진! 내 사진이!”
남자는 급격히 당황스러워하며 이웃 여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던 벽을 손바닥으로 더듬거렸다. 당황하다 못해 극심히 불안정한 상태로 돌입했다.
책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괴고 지켜보던 노엘은 씩 웃었다. 음산한 공기로 방을 가득 메우는 데는 과연 둘 중 누구의 공이 더 컸을까.
노엘은 남자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손안의 마력석에 마력을 주입했다.
<빙의 : 상대의 몸에 빙의합니다. 단, 빙의한 몸을 상처 입히면 자신 또한 똑같이 상처를 입게 되니 주의. 오늘 자정이 되면 원래 몸으로 돌아감.>
“리사, 이 몸으로는 널 만질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을 거야. 이런 이물질을 네게 닿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윽고 남자의 몸을 차지한 노엘은 오랜만에 스며든 추위를 반갑게 맞이하며 제 상체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