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리사,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나를 버리지 말아 줘. 날 이곳에 혼자 버려두지 마.]
돌아보며 말하는 환영 노엘의 간절한 얼굴이 평생 머릿속에 각인될 것만 같았다. 내가 없으면 그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은 느낌과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애절하도록 필요하게 여겨진 건 아마 처음일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의 부탁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그럼 안녕! 그동안 즐거웠어.]
환영 노엘은 마지막으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맑고 싱그러운 미소가 곧 있을 추격전을 몹시 기대하는 듯했다.
그렇게 그는 내 환영을 쫓으러 떠났다. 경쾌하게 발을 내딛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과거의 나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이윽고 그의 뒷모습이 안개 속에 가려지며 모든 환영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깨어나 가장 처음 숨었던 곳에 발을 딛고 있어서인지, 환영 노엘과 작별 인사를 해서인지 어딘가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전혀 시원하지 않은 그런 허한 가슴만이 잔잔하게 두근거린다.
어째서 이렇게 아련한 마음이 드는 걸까. 왜 이렇게 설렘과 아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건지 정확히 잘 모르겠다.
***
환영 노엘과 완전히 작별한 뒤, 나는 다시 4층 리사의 개인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이곳으로 가라고 했기 때문인데, 목소리가 이전보다 확실히 연약해진 느낌이 들었다. 추측건대,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생명력은 거의 막바지였다.
끼익.
나는 들어오자마자 그녀가 쓰던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착했어.’
[우선 축하해! 이제 네게 남긴 붉은 보석은 다 사라졌어. 그동안 정말 수고가 많았구나.]
나는 그동안의 수고를 떠올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수고는 정말 많았지.’
[이야기를 들어 주어 고마웠어. 네가 이렇게 잘 해낼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야. 네가 중도에 포기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그래. 뭐… 네 덕분에 일이 제법 꼬이기도 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 나쁜 조언은 아니었던 것도 같아.’
[처음 네게 말했었지. 붉은 보석의 끝을 따라가면 돌아갈 방법을 알 수 있다고.]
‘이제 정말 알려 주려는 거야?’
드디어 돌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는 순간이 왔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믿을 수 없었다. 마냥 현실 같지 않았다.
[그럼, 약속이니까. 나도 내 목적을 이루었으니 네게 못 알려 줄 이유가 없고.]
‘네 목적…?’
그러고 보니 그녀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던 걸까. 궁금해서 은근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노엘이 네게 열쇠 목걸이를 준 적이 있었지? 그거 아직 가지고 있잖아.]
그랬다. 별장 출입구 문의 열쇠라고 노엘이 거짓말했었던 열쇠가 아직도 내 목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돌아가는 열쇠라도 된다는 걸까?
[그 열쇠 목걸이는 아주 어릴 적, 내가 노엘에게 주었던 선물이었어.]
‘그걸 다시 내게 선물한 거였다니….’
어쩐지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이 좁아지는 느낌에 나를 애써 타일렀다.
[노엘은 영 서툴러서… 나랑 토드 외엔 친구가 전혀 없었거든. 일찍부터 시작된 황태자 교육도 무척 엄했고 가족들도 전부 그를 황태자로서만 대했지, 아들로 따스하게 대해 주는 일이 전혀 없었어.]
‘그랬구나…. 그러고 보면 늘 하는 짓이 평범해 보이진 않았어. 가끔 속마음과 전혀 다른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그땐 참 볼 때마다 경악하면서 무서워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 친구들이 다 도망가지 않았겠냐고. 아무튼… 그래서 난 노엘한테 그 열쇠 목걸이를 건네면서 말했었어.]
‘무슨 말을?’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생기면 선물해 보라고. 그럼 정말 친해지게 될 거라며 어린 마음에 좋은 말을 해 주었었지.]
‘아…….’
[그 열쇠 목걸이는 귀환의 힘이 담긴 마력석으로 만들어졌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어. 나도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거였거든.]
‘귀환의 힘이라니?!’
[귀환 마력석은 자신이 머물던 곳이라면 원하는 곳 어디로든 보내 주는 능력이 담겨 있어. 단, 마력자만 사용할 수 있지.]
결국 내가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선 이 별장의 출입문은 아무 관계도 없었던 것이었다. 열쇠는 바로 이 마력석 목걸이 자체였다.
‘그럼 나도 마력을 쓸 수 있을까? 네가 마력자였으니까.’
[물론이야. 난 몸이 아팠기에 마력석을 가지고도 마음껏 사용할 수는 없었어. 정말 마지막에 쥐어짜 내서 쓴 게 다일 정도였지. 넌 건강하니 모든 마력석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몸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쿵쿵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마력은 어떻게 쓰는 건데?’
[손안의 마력석에 체내의 마력을 옮겨붙이듯 흘려보내야 해. 몇 번 해 보면 느낌 알 거야.]
나는 일단 시험 삼아 해 보려 두 손을 모았다. 시험이었기에 마력석은 일단 손안에 두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대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는데.’
[그럼 눈을 감고 더욱 집중해 봐. 느껴지는 힘 중에 독특한 느낌의 힘이 있을 거야. 그걸 붙잡고 흘려보내.]
그녀의 말대로 해 보았다. 눈을 감고 뭔지 모를 체내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러고 있으니 정말 아주 다른 새로운 힘이 느껴졌다. 나는 그 힘을 붙잡기 위해 손을 힘껏 뻗듯 기운을 쏟았다.
[이제 눈을 떠 봐. 성공했네.]
기껏 잡은 마력을 놓칠까 봐 아주 조심스레 눈을 떴다. 실눈이었지만 내 온몸에서 환한 빛이 감도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강한 빛은 나도 처음 봐. 네 덕분에 이제야 내 몸의 최대 마력의 빛을 확인했어.]
‘그, 그래?’
차츰 이 감각이 적응되니 나도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제 눈도 또렷이 뜨고 볼 정도였는데 다시 마력을 놓으니 빛도 식어 버리듯 사라졌다.
[그 열쇠 목걸이를 손안에 두고 마력을 흘려보내면 돼. 그럼 어떤 문이 열릴 거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네가 살던 곳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지나도 네가 들어가지 않으면 가차 없이 닫힐 테니 이점은 꼭 주의하도록 해.]
그녀가 노엘에게 열쇠가 귀환의 마력석으로 만들어졌단 사실을 말했더라면, 그가 나에게 이 목걸이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아찔해져선 등골이 오싹하다가도 이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이제야 붉은 보석을 모두 깼다는 실감이 났다. 뿌듯함이 몰려오는 듯하면서도 어쩐지 심장이 떨려 온다.
나는 환영 리사가 베개 밑에서 마력석을 하나씩 꺼내던 걸 떠올리고는 베개를 들어 보았다. 베개 밑엔 다양한 색깔의 동그랗고 작은 마력석들이 놓여 있었다. 열 개 정도 되어 보였는데 전부 보석처럼 예쁘게도 생겼다.
‘근데 다른 마력석들은 무슨 용도인 거야? 설명해 줄 수 있어?’
[금방이라도 신나서 집에 돌아갈 줄 알았더니.]
‘궁금해서 그래. 얘기해 줘.’
[하나하나 얘기해 주긴 힘들 것 같아. 내 생명력이… 이제 끝을 바라보고 있거든.]
‘……이런.’
[이 구슬 모양의 마력석들은 어렸을 때 내가 직접 세공했던 것들이야. 아무리 마력자라도 나 외엔 전혀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었어.]
그녀는 힘겨운지 잠시 쉬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점점 사그라드는 목소리에 내 가슴까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마력석을 쥐고 마력을 반 정도만 흘려보내면 설명 문구가 나오도록 설정해 놓았어. 그렇게 하면 각 마력석의 효력을 알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구나. 혹시 공격을 돕는 마력석도 있을까?’
[공격? 뭐… 당연히 그런 효능이 담긴 것도 있긴 해.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나는 구슬 모양의 마력석들을 차분히 손바닥에 쓸어 담았다. 마침 복주머니같이 생긴 가죽 주머니가 함께 놓여 있었기에 그곳에 담아 넣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내 허리춤의 장식에 매달아 묶었다.
[뭐 하는 거야? 네가 돌아가면 내 몸은 더 이상 네 몸이 아닐 텐데……. 그걸 네 세상으로 가져갈 수는 없어.]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아?’
[뭐…? 무얼…….]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잖아. 괜히 모른 척하지 말라구.’
나는 콧방귀를 뀌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방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진심이야? 솔직히 믿기지 않아서 그래. 기대는 했지만 정말 네가 그러리라고는…….]
기뻐하면서도 정말 못 믿겠다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데에서부터 어렴풋이 납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노엘과 녀석들의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 주길 바랐던 것이겠지.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진심으로 그들에게 정이 들어 버렸고, 정말로 노엘을 좋아하게 되었다.
생명을 이어 갈 수 없는 그녀가 자기 대신 나를 그들 곁으로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친구든 연인이든 그 어떤 형태로든 그들을 외면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내게 보상처럼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게 기대했겠지. 이곳에 남는 선택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기대와 달리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돌아가는 시점이 지금이 아닐 뿐이다.
‘노엘과 녀석들이 잡혀갔잖아. 이젠 내가 그들을 구하러 가야지.’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제… 나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
그녀에겐 굳이 녀석들을 구한 뒤 돌아갈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녀가 떠날 때가 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걱정거리를 안기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나와 있어 주면 안 돼?’
이제껏 간신히 버텼던 데엔 그녀의 존재가 꽤 컸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은 그녀가 가끔 내게 말을 걸어 주었기 때문이겠지. 언제나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었다. 노엘과 친구들을 구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굳게 먹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