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나도 너와 좀 더 함께하고 싶어. 내내 정말 즐거웠거든.]
‘맞아. 특히 내가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할 때면, 너는 더욱 즐기는 것 같았어.’
하하.
나와 그녀는 서로 어색하면서도 유쾌한 웃음소리를 주고받았다.
‘더 즐거워해도 되니까 힘내서 내 곁에 머물러 주면 안 될까? 내가 녀석들을 구해내는 모습을 너도 봐야 안심할 거 아니야.’
[나는 이제 곧 소멸할 거야. 하지만 내가 없어도 분명 너는 모두를 구해낼 거야. 너라면 할 수 있어.]
‘가… 가지 마! 나는 아직 네가 필요해.’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사라져 휑한 이곳에서 혼자 남겨지기 싫었다.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가끔 내게 명령조 같은 말을 내뱉어도 좋으니 곁에만 있어 준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다시 한번… 내 친구들을 잘 부탁해. 고마웠어.]
‘……정말 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직감이 강하게 들자 눈가가 뜨거워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정말 그녀와의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졸음이 쏟아지고 있어. 이렇게 안심하고 잠들 수 있어 다행이야. 그럼…… 안녕, 또 하나의 리사.]
‘……안 돼!’
그녀와의 헤어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 마음의 준비는 언제나 느렸다. 아마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건 이렇게 평생 느리고 익숙해지지 않을 예정인가 보다.
결국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안녕…. 편히 쉬어.”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연신 닦아내니 차가웠던 눈가에 따듯한 손의 온기가 닿았다.
고생했을 그녀의 영원한 안식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보내 주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크게 들었다. 노엘을 좋아하고 그와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대립하는 마음이 함께 존재하는 걸까.
한 가지의 마음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가슴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훗날 하게 될 선택에 대한 후회를 걱정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잘 가. 네 친구는… 내가 꼭 구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구하고 돌아갈 거야. 그러니 편히 잠들기를….
[다 잘될 거야.]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와 짭조름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평소였다면 이 짭짤함이 불쾌해서라도 입술을 꾹 닫았을 텐데, 어쩐지 이번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내게 벌어졌던 일들이 함께 떠올라 가슴이 끓어올랐다.
알게 모르게 겪고 있던 감정의 고통이 마침 이 슬픔을 빌려 동시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나는 그 슬픔에 몸을 맡기고 힘껏 울음을 토해냈다.
그 뒤로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씩씩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잠시 머리를 비우고 발에 실리는 힘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샌가 1층이었다.
이렇게 맘껏 운 건 어릴 때 이후론 처음인 것 같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질 정도다.
머리는 더욱 맑아지고 정신은 번쩍 드는 느낌. 걱정과 두려움마저 차분히 가라앉아, 이 고요하고도 평온한 감각.
이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래서 발걸음도 한결 가볍고 활기차게 내디딜 수 있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집에 갈까.”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열쇠 목걸이에 마력을 주입하기만 하면 이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해질 수 있는데.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캄캄한 1층의 복도를 거닐고 있자니 이 음산한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벌써 위압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제발 누가 여기에 불 좀 환하게 켜 줬으면 좋겠다. 그런다고 불안이 가시겠냐마는.
진짜 가고 싶어. 어떡하지.
내 이중적인 마음이 또 자기들끼리 떠들썩하게 대화하기 시작했다. 흔들리고 있단 증거겠지. 하지만 마음을 한 가닥으로 잘 가다듬어야 했다.
차분히 집중하자 잡혀간 노엘과 녀석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지금 내가 혼자 돌아가 버린다면 녀석들은 힘들게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실험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또 죽게 된다면? 인간으로서의 목숨이 아닌 노엘은 그런 마력석을 수백 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더는 그들을 살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 노엘도 녀석들도 전부 그걸로 끝인 게 되는 것이겠지. 누가 봐도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영원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사악한 악인들이 승리하는 미친 결말.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간담이 다 서늘해지고 심장이 아찔하다.
“뭐 그런 거지 같은 결말이 다 있어. 그런 결말의 이야기라면 게임이든 소설이든…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끔찍한 결말을 상상하니 다시 눈알이 뜨거워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아주 힘차게 저으며 날려 버렸다.
나는 노엘의 행복을 바란다. 영원히 함께해 줄 순 없지만, 적어도 좋아하는 그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말자.
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자신감의 원천으로 삼기로 했다.
***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주방이었다. 타란티나를 피하고 베키를 구하기 위한 물을 찾으러 갔던 곳으로, 이미 가 봤던 데라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이 저녁때라 정원사가 돌아다닐 시간이라는 건데….
서걱 서걱 서걱.
마침 정원사가 내 뒤쪽에서 뛰어왔다. 이대로라면 내 뒤를 바짝 쫓아 주방까지 따라올 텐데, 물론 나에게도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서걱 서걱 서걱.
“여기야. 여기! 잘 따라오라고.”
나를 눈에 담은 정원사는 더욱 속력을 내서 달려들었다. 나는 마른침을 들이켜고는 주방으로 냅다 뛰어 들어갔다. 저 정원사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저 녀석도 피곤할 거야. 이만 쉬게 해 줘야겠어.’
서걱 서걱.
나는 주방으로 들어와 신속하게 수납장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서걱 서걱 서걱.
“썩은 가지…. 잘라. 주머니에.”
내가 숨은 수납장 근처, 정원사의 커다란 가위에 치인 그릇들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내가 정확히 어디 숨었는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미묘하게 땅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근처에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멀스멀 기어 오던 무언가가 이리저리 움직이다 펄쩍 뛰어오른 건지 정원사를 낚아채기라도 한 건지, 가위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끄… 끄걱…… 꺼거걱.”
곧 정원사의 신음과 함께 무언가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 뼈가 쪼개지다 못해 으스러지는 소리였다. 그런 뒤에는 정말 가루 쏟아지는 소리가 나를 소름 돋게 했다.
나는 주방장이 정원사를 처치했다는 확신에 차 당장 수납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 무섭긴 했지만, 이전에 노엘에게 확인까지 했었으니 주방장이 나를 해하진 않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뒤늦게 든 생각이었지만, 노엘이 살렸던 명단에서 옥토레드퍼스란 이름이 어쩌면 주방장일지도 몰랐다. 잠깐 지나친 인연이지만 주방장의 강렬했던 존재감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지나쳤었는데 이렇게 직접 눈으로 마주하게 되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억!”
나는 파르르 떨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눈을 치켜떴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알프레드나 타란티나, 리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몸집이었다. 아니, 이걸 몸집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미안했다.
내 시야에 한 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그는 다리 개수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마 수백 개는 되지 않을까. 아니면 수천 개?
놀랍게도 9등신 비율인 문어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천장을 뚫기 직전이었다.
그의 촉수엔 잿빛의 몸과는 달리, 붉은 눈알들이 자글자글하게 박혀 있어 또 한 번 나를 기절하기 직전으로 몰아갔다.
많은 다리 중 고작 하나. 그 하나에 정원사는 가루가 된 것이었다. 정원사가 걸치고 있던 누더기 같은 옷만으로 형체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옥토레드퍼스로 추정되는 괴물은 내게 덤빌 듯한 살벌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은 몸집에 비해 인간의 눈처럼 작았다.
나는 그의 다리 하나가 날 향해 진격하려 할 때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옥토레드퍼스! 맞나요? 전 노엘의 친구예요.”
“……옥토레드퍼스. 내 이름을 누가 불러 준 건 오랜만이군. 다들 주방장이라고만 부르니 이름을 들을 일이 있어야지. 원.”
“어…. 그, 그런데 다리를 치워 주시진 않을 건가요?”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눈앞의 이 엄청난 존재에게만큼은 나는 정말 먼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 정도의 처절한 무기력함은 또 처음인 것 같다.
잠깐 움찔해서 멈추었던 그의 다리 하나가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잔뜩 움츠러들어선 얼굴을 손바닥에 더욱 깊이 파묻었다.
“사, 살려 주……!”
이윽고 그의 다리 하나에 부드럽고도 가볍게 휘감겨 들어 올려졌다. 그러니 내가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에게 살기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천천히 호흡을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