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정말 괜찮아요? 심심하지 않은 건가요?”
이런 내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다니 부끄러워 땅굴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어졌다.
이 공포 게임에 뚝 떨어진 후 이렇게 위축된 건 처음인데. 내 무너지는 표정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응. 괜찮다니까!”
하지만 타란티나는 내 생각만큼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저 거대한 눈동자가 거울처럼 반질거려 무섭다.
“언니. 저번엔 쫓아가서 미안했어요. 그런데 해치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이었어요.”
“아…. 그때…! 하하. 나 진짜 엄청 필사적이었거든. 나야말로 미안해.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어. 노엘과 아는 사이인 줄도 몰랐고….”
“그때 제가 본 리사 언니는 정말 용감했어요.”
“응…?”
타란티나는 입을 양옆으로 쭈욱 올리며 눈을 휘었다.
“이 타란티나의 거미줄도 끊어냈고 결국엔 베키도 구했잖아요.”
설마 그때 일로 앙심이라도 품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갇혀 있다고 조바심 내지 않아도 돼요.”
“…….”
아, 결국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심중을 간파당했다.
“모두 리사 언니가 안전하길 원하고 있어요. 그건 노엘의 바람이기도 하니까요.”
“……타란티나….”
“여기 이렇게 갇혀 있는 게 사실 더 힘들 거예요.”
그건 맞아.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쩌면 타란티나보다도 더 어려 보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모두 언니의 마음을 느끼고 있어요.”
“…….”
어쩐지 코끝이 찡해져선 눈알 안쪽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나보다 어린 타란티나 앞에서 기어코 눈물을 터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녀석…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말만 하는 건지.
“……고마워. 타란티나….”
타란티나도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두어 번 가볍게 끄덕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그녀의 검은 털북숭이 다리 하나를 끌어안았다.
푹신푹신하고 따듯한 감촉만 느낄 수 있었던 건, 눈 안에 차오른 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필요할 때 마주한 위로에 조금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동굴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은근히 이 녀석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말 고마운데 이 마음을 전부 전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간신히 눈물을 삼킨 나는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나와 고개를 들었다. 나오려던 눈물은 간신히 쏙 들어갔지만 안구는 아직도 촉촉했다.
“사실 언니가 심심해할까 봐 왔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노엘이 대충 둘러대라고 해서 그런 거였어요.”
“응? 왜….”
“자기가 뭔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고 그러던데요. 언니가 계속 신경 쓰이는지 집중을 못 하더라고요.”
“아…….”
“돌아오면 제대로 사과하고 싶다고 했어요. 지키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며 괴로워하는데 얼굴이 아주 봐줄 만해요. 언니가 꼭 봤어야 했는데.”
“그, 그렇게까지? 아니야. 나는 이제 괜찮다고 전해 줘!”
“아니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그런 얼굴 보겠어요. 좀 더 가슴 졸이게 두려고요. 아무튼 언니를 정말 많이 사랑하나 봐요. 부러워요.”
타란티나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니 급격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운 나는 눈알을 옆으로 굴리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리마는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부디 돌린 말거리가 자연스럽길 바랐는데 타란티나는 생각보다도 즐겁게 말을 받았다.
“리마는… 몸이 좋아요. 다리가 정말 많잖아요.”
……다리가 많으면 몸이 좋은 건가!
그래. 타란티나의 취향은 타란티나만의 것이니까.
노엘이 취향인 나도 만만치 않은 건 분명했다.
“맞아. 리마는 다리가 30개야.”
“제 이상형이었거든요. 거기다 얼굴도 귀엽잖아요.”
“그건 그래. 리마가 얼굴은 꽤 귀여운 편이지.”
어쩌다 보니 타란티나와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노엘의 배려인지 타란티나 개인의 의지인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문득 모두의 배려와 의지라는 사실에 마음이 따듯하고, 뭉클했다.
타란티나와 이야기를 마치고 되돌려 보냈을 땐, 왜소해질 정도로 위축된 내 심리가 다시 기를 펴고 있었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사리는 거야. 모두에게 걱정거리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자.’
타란티나의 말대로, 일단은 이렇게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
쾅!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선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진동에 건물마저 흔들린 듯했다.
‘뭐지? 뭔데 이렇게 큰 소리가….’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서 밖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문고리를 쥔 순간 노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 문을 열고 나와선 안 돼. 특히 무슨 소리가 났다면 더욱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안에 있어야 해.’
결국 문고리에서 손을 놓고는 귀를 바짝 대어 보았다.
콰과광!
“아, 깜짝이야!”
귀를 대자마자 다시 굉음이 울리며 우지끈-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거대하고 무거운 것이 짓누르고 다니는 듯했다. 여기저기 활보하는 저 기척의 주인은 아마… 괴물이겠지.
하지만 저런 소리를 내는 괴물은 우리 쪽에 없었다. 저 소음의 무게는 알프레드조차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래층에서 괴물이 올라온 건가?
보이질 않으니 잘 대응하고 있는지도 몰라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가만히 기다려야만 하는 건지. 혹시나 모두 나만 빼놓고 전멸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또 혼자 남겨질까 봐.
그 꿈처럼 되어 버릴까 봐.
***
“노엘! 큰 놈 하나가 올라오고 있어.”
아래층을 살피러 내려갔던 베키가 다급히 올라오며 소리쳤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에 다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
“큰 놈이라고?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베키가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큰 놈’이 계단을 스무 개씩 뛰어넘으며 올라왔다.
콰과과광!
그렇게 한 번씩 뛰어오를 때마다 계단이 콰지직- 부서지려는 신음을 토해냈다. 일부는 정말 구멍이라도 난 듯 발자국 모양 그대로 찍히며 일그러졌다.
콰광!
온몸이 푸른색을 띠는 괴물이었다. 발이 달려 있긴 했으나 발밑까지 축 처진 아랫배로 튕겨 다니는 모양새였다.
등과 윗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거의 공 모양을 띠었다. 저것은 틀림없이 복도에선 굴러다닐 것이라 모두 생각한 참이었다.
“와. 저게 뭐야.”
볼이 홀쭉해진 리마가 경악하며 타란티나 뒤로 숨어 버렸고, 타란티나는 거미줄을 쏠 틈을 엿보고 있었다.
스륵.
노엘도 검을 뽑아 들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쾅쾅 튕겨 오르던 괴물이 드디어 6층에 안착했다. 괴물은 계단 주위로 둘린 방책들을 눈으로 쓱 훑더니 작게 날아올라 가장 가운데에 있던 방책으로 몸을 날렸다. 무거운 공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 같았다.
“어서 피해!”
그러자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책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괴물의 엉덩이에 깔려선 힘도 못 쓰고 허물어지고 만 것이었다.
가운데 방책 뒤에 숨어 있던 알프레드는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자기보다도 거대한 몸집에 입을 쩍 벌렸다.
이윽고 괴물은 겨우 엉덩이를 일으켜 옆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것이 구르니 옆 줄지어 세워 놓았던 방책들도 모두 도미노처럼 쓰러지며 파괴되었다.
우지지직. 콰지지직. 콰직콰직.
그와 함께 방책 뒤에 있던 리마와 타란티나도 벽을 타고 피신했다.
“저 자식이! 내가 어떻게 세운 방책인데!”
방책을 세우는 데 누구보다도 진심 어린 정성을 들였던 리마는 기겁하면서도 조잘조잘 투덜거렸다.
“타란티나!”
노엘이 타란티나에게 눈빛으로 지시했고, 타란티나는 곧장 벽에 붙은 채 괴물을 향해 거미줄을 발사했다.
쉬이이이이익-!
하지만 괴물은 빠르게 굴러 모조리 회피했고, 타란티나의 거미줄 속도는 그것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만!”
거미줄을 사방에 남발해 봤자 같은 편의 발이 묶이는 수가 있었다. 그래서 거미줄은 일단 멈추게 할 수밖에 없었다.
“리마!”
노엘이 호명하자 공포에 질린 리마가 눈을 부릅떴다.
“해, 해 볼게! 으아아아!”
리마는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괴물의 몸을 감싸려 했다. 노엘이 검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잠시라도 잡아 두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너무 커다랬고, 부피도 커서 리마의 긴 몸통으로도 부족했다.
결국 리마는 괴물의 몸통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 안 되겠어. 으아아아아악.”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요!”
보다 못한 타란티나가 천장을 타고 거꾸로 기어가 리마를 더듬이 다리로 떼어냈다.
노엘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 우왕좌왕하는 사이 괴물은 방책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부숴 버렸다.
노엘은 저 괴물을 잡아 두긴 글렀다는 생각에 그냥 바로 검을 휘둘렀다.
팅!
하지만 놀랍게도 괴물의 피부는 검을 튕겨냈다.
검을 단단한 방패에 휘두른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괴물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뭐지…?”
티용!
재차 괴물의 등도 찔러 보고 배를 그어도 봤지만, 노엘의 날카로운 검은 가볍게 튕겨 나가기만 했다.
“젠장……!”
어딘가 피부처럼 연약한 곳이 있을 것이라 여겨 다방면으로 공격을 시도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노엘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모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쓰러뜨리라는 건지. 조무래기인 붉은 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처럼 여겨졌다.
검으로 벨 수 없는 몸이라니.
알프레드도 중간중간 몸통을 부닥쳐 넘어뜨리려 했지만, 튕겨 나가는 건 그 역시 매한가지였다.
탱탱한 저 몸 자체가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갑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