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리마와 4층 복도를 거닐던 중이었다.
곧장 숙소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복도의 장식장 위에 있는 붉은 보석을 발견했다.
마침 옆으로 지나가는 길이라 자연스럽게 보석을 낚아챘다.
“리마,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을까? 아주 잠깐만!”
“벌써 힘든 거야?”
리마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긴 하겠지. 갑자기 길에서 쉬자고 할 정도니.
“아. 내가 몸이 좀 약해서….”
“그래…? 지난번엔 잘만 도망가더니….”
그렇게 중얼거리지만 이미 몸은 멈추었다.
“고마워. 진짜 잠시만!”
내 바로 앞으로 환영인 연구원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에 충분한 거리였으므로 굳이 다가가지 않아도 들렸다.
-이번 실험마저 실패하면 난 끝장이야.-
-이제까지 성공한 실험이 있기는 해?-
-…….-
-그건 그렇고, 이번 실험은 아직도 누가 들어갈지 정해지지 않은 건가?-
-같은 나이대의 조건이 맞는 남자는 그 둘밖에 없으니, 둘 중 하나가 되겠지.-
어쩐지 노엘과 토드를 말하는 듯한 확신이 강하게 와닿았다.
실험실 아이들의 숙소에 이제 남자라곤 노엘과 토드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노엘과 토드 둘 중 하나를 실험에 쓰려고 하는가 본데…….
드디어 올 때까지 온 건가 싶었다.
-그런데 시드 공작님께선 황태자를 많이 아낀다고 하지 않았나? 그 전시회 때 전시되었던….-
-전시회를 없앤 걸 보면 이제 실험에만 몰두하겠단 거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실험인데 그래?-
-이번 실험은 성공해도 실험체는 절대 살아날 수가 없을 거야.-
-어째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들었어.-
노엘과 토드의 죽음이 가까워져 온 걸까.
어쩐지 점점 내 목이 죄어 오는 느낌이다.
“누나, 괜찮은 거지? 얼굴이 파랗게 굳은 것 같아. 진짜 몸이 허약한가 봐.”
“으, 응! 괜찮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긴.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냥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어때?”
“앗! 아니! 아니야. 이제 괜찮아졌어. 완전히.”
그럼 안 되지. 기회가 있을 때 진도를 팍팍 빼 줘야 한단 말이다.
-내일이면 확실하게 정해지겠지. 뭐. 그래도 이번 실험은 왠지 들어가고 싶지 않은 느낌이야.-
-나도 예감이 썩 좋지 않아. 점점 시체도 흉해지는 것 같고.-
웅성웅성.
인제 보니 그들의 얼굴이 매우 수척했다. 리마의 융합 실험 때 본 얼굴도 있었는데, 그때보다도 훨씬 말라 보였다.
그래서 조금은 다행이라 여겼다. 이런 일을 하는 인간들이 얼굴까지 좋아 보이면, 더 열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환영들이 사라지고, 붉은 보석도 내 손에서 모두 녹아내렸다.
“리마야. 이제 가자.”
나는 리마와 다시 원래 목적지로 향했다.
금방 실험실 숙소에 도착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츠스스. 츠스스.
덩치를 키워 기립한 리마가 세 번째 다리를 바깥쪽으로 휘휘 저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는 모습에 조용히 경악했다.
천장까지 치솟은 리마의 얼굴을 보자니 목이 다 뻐근하다.
리마에게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해 두었다.
“다녀올게! 분명 여기 어딘가 있을 거야.”
말을 하고는 냉큼 들어와 버렸다.
연구원들이 이번 실험을 알고 있으니, 환영 노엘의 귀에도 이미 들어갔을 터였다.
나는 곧장 환영 리사의 개인실을 살펴보았다.
“있다!”
침대 위에 놓인 붉은 보석을 집어 다시 환영을 끄집어냈다.
침대 위 환영 리사는 상체를 움츠려 양팔로 감싸고 있었다.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인데.
역시 그녀도 이번 실험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된 걸까?
침대 옆에는 환영 토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토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네가 돼서는 안 돼.-
-그럼 노엘이면 괜찮고?-
토드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얼굴이었다.
자기가 두려워하면 그녀가 더 불안해하리란 걸 알아서 그런 거겠지만.
분명 속으로는 무척 두렵고 떨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겐… 네가 너무 소중하니까…… 그러니까…….-
발끈한 환영 리사는 이미 혼란이 최대치로 몰린 듯했다.
그녀가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둘 다 소중하지만, 아무래도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알아. 리사… 네 마음… 잘 알고 있어. 미안해. 내가 너무 날을 세워서 말했어.-
-아니야… 토드. 나야말로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어지럽고…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의 눈 밑이 지금까지 보았던 중 제일 어두운 것 같다.
토드는 어떻게든 그녀를 안정시키려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려면 이 상황 자체가 해결되어야 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를 두고 노엘과 척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녀석과 계속 친구가 되고 싶었어.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아.-
-맞아, 우린 모두 서로가 소중했어. 이 관계가 영원히 변치 않길 바랐어…….-
-이런 때에 노엘 녀석은 코빼기도 안 보이네….-
-토드. 어차피 우린 모두 여기서 죽고 말겠지?-
환영 리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어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 초점은 토드를 향해 있었지만, 정확히는 그 방향으로 고정만 했을 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리사, 그런 말 하지 마…….-
-어차피 그렇게 될 거면… 난 하루라도 더 보고 싶은 사람이 너인걸. 그러니까…… 내가 노엘에게 부탁해 볼게.-
-그게 무슨 말이야? 노엘한테 뭘 부탁한다는 건데.-
-……너 대신 실험실에 들어가… 달라… 고…….-
확실히, 지금의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저 본인이 원하는 바에만 심각하게 몰두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공포에 져 버린 걸까. 두려움에 결국 잡아먹히고 만 걸까.
토드는 그런 그녀를 자신의 품에 소중히 감싸 안았다.
-아니…. 안 돼, 리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저 네 건강만 신경 써 줘. 지금 네가 많이 아파서… 힘들어서 그래.-
-너는 하루라도 나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그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다만… 적어도 너는… 너만은 노엘한테 그러면 안 돼. 그렇잖아… 그렇지?-
토드라도 정신이 멀쩡해서 다행이었다.
둘 다 미쳐 버린다면 나는 이 방에서 숨이 막혔을 것이다.
-노엘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겐 그의 마음은 필요치 않은걸….-
-그래도 그 녀석이 널 얼마나 아끼는데…. 친구인 날 버리면서까지 너한테 모든 걸 건 놈이라고. 그런 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아마 스스로 파멸하고 말 거야.-
이쯤 되니 환영 리사가 흑화라도 한 거 같다. 제발 다음에 봤을 땐 멀쩡하게 돌아와 있으면 좋을 텐데…….
곧 시커먼 안개가 내려앉은 듯한 공간으로 돌아와 버렸다. 환영이 사라진 것이었다.
허탈해선 멍하니 있다가, 개인실 침대 밑이 무서워져 얼른 빠져나왔다.
‘설마… 환영 리사가 정말 노엘한테 그 말을 전하는 건 아니겠지…?’
과거 환영이라도 자멸하는 노엘은 결코 지켜볼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환영 중 현실에서 보지 못한 건 토드밖에 없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을 수가 있는 건가? 별장이 워낙 거대하긴 해도 한 지붕 아래인데.
“흠……. 어떻게 된 것이려나.”
츠스스. 츠스스스스.
“누나!”
리마가 무슨 일인지 급하게 다가왔다.
울상인 얼굴을 보니, 내가 무언가 나서서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리마. 왜 그래?”
“다리가…! 다리가!”
“다리?”
“응!”
리마가 위로 쭉 뻗어 기립했고, 나는 그의 다리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보다 보니 아래쪽 다리가 하나 빠졌는지 비어 있었다.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세어 봤는데 역시 하나가 없었다.
“29개네…. 다리 하나가 없어져서 그러는 거지?”
“응…. 아무래도 1층에서 다니다가 잃어버린 것 같은데…….”
“1층…?”
하필 1층이라는 말에 거미 소녀 사건을 떠올리고 말았다. 거기에 정체 모를 주방장 괴물까지.
여기에 밤이 되면 정원사까지 추가된다.
물론, 내가 겪은 괴물들만 그 정도라는 것인데. 새로운 괴물이 더 있을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누나. 여기 볼일 끝났으면 나랑 1층 좀 같이 가 줄래?”
불안한 예상을 정확히 마주하게 되었다.
항상 저 다리들이 문제였다. 이젠 내가 같이 안 가 준다고 해서 공격할 것 같진 않았지만….
어차피 오늘의 붉은 보석은 더 이상 나타나지도 않을 것 같으니, 남은 시간은 리마의 다리를 찾아 줘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방에 빨리 들어가 봤자 할 일도 없었고.
“그래, 그럼 지금 당장 내려가자. 1층으로!”
“역시 우리 누나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울했던 녀석이 금세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이러다 녀석이 또 신나서 천장까지 기어오르며 360도 회전할까 봐 얼른 앞장섰다.
“어서 가자고!”
“응! 아! 누나.”
“응?”
“……탈래?”
웬일로 뜸을 다 들이나 했는데, 설마 나더러 자기 등에 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타다니…?”
“내 등에 타고 갈래? 그럼 편하고 더 빠를 거야.”
“…….”
나는 리마의 등을 절망 가득한 눈으로 훑었다.
저 미끈미끈해 보이는 표면에 올라탔다간 미끄러지지 않을까?
저 마디 마디가 구부러질 때마다 내 몸도 구부러지는 건 아닐까?
오만 가지 걱정이 양떼구름처럼 떠다녔다.
“누나…? 혹시…… 싫어?”
조심스럽게 묻는 리마의 눈이 어째선지 사백안으로 물드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마는 싫다는 말에 굉장히 예민했었는데……!
나는 눈물을 삼키며 밝게 웃어 보였다.
“싫다니. 그런 거 아니야! 누나가 우리 리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