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베키가 있던 실험실의 환영이 사라지고, 차분한 어둠이 드리웠다.
나는 팔로 찔끔 흘린 눈물을 쓸며 간신히 일어섰다.
가루로 변한 붉은 보석이 함께 부스스 휘날렸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좁은 통로의 중간에 붉은 보석이 또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갈세라 재빨리 그것을 주웠더니 꼬마 노엘의 환영이 나타났다.
꼬마 노엘은 좁은 통로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게 안되어 보였다.
“노엘, 괜찮아?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도 겨우 고개를 들었다.
[시드 공작이 나가면서 하는 말을 들었어. 역시 베키도 실험을 견디지 못했나 봐.]
이전에 꼬마 노엘이 했던 살벌한 발언 때문에라도 나는 그가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때는 워낙 이 녀석이 무서웠으니까.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반응이 너무 다르니 이건 이거대로 혼란스럽다.
“역시 너도 슬픈 거지? 친구를 잃어서…….”
[이렇게 또 괴로워지고 싶지 않았어. 더 이상 어떤 슬픈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꼬마 노엘은 하는 말마다 힘겹게 입을 뗐는데 표정이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무기력해 보였다.
‘사실은 힘들었던 거구나. 그렇게 살벌하게 말했던 건 일종의 심리적 방어 행위 같은 것이었을까?’
내가 그를 오해하고 있었던 거라면 참으로 다행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꼬마 노엘에게 베키가 지금은 살아 있다고 말해 주어도 되는 거 아닌가? 말해 주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이 녀석은 과거의 노엘이니까.
좀 더 고민해 보던 나는 결국 말을 해 주기로 결심했다. 녀석이 다시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노엘, 실은… 베키는 지금 사……. 사…. 사…….”
뭐지?
[왜 그래…? 베키가 지금 뭐?]
“지금 사…….”
이상하게도 핵심적인 내용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도전해 봐도 같은 결과였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듯했다.
과거의 노엘에게 현재의 일을 알려 주는 건 불가능한 건가?
마치 붉은 보석의 경고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듯한.
“베키는…… 정말 당차고 멋진 녀석이었어. 내가 그 녀석의 친구가 되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다른 말을 해 보니 이번엔 막힘 없이 술술 잘도 나왔다.
[……그래, 맞아. 맞는 말이야.]
그는 그 말을 하려고 그리 뜸 들였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금방 씩씩했던 베키를 떠올렸는지 슬픈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만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거야. 그리고 네 마음속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이 작은 노엘을 위로하고 싶었다.
[마음속에선 만날 수 없잖아. 그저 내가 기억하는 모습만 등장할 뿐이지…….]
쉽진 않겠지만, 때로는 그저 이야기 상대가 돼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있으니까.
“그래? 그렇게 여긴다니 베키가 서운해하겠네.”
[나에겐 그걸로는 부족해. 하지만 미안하게도…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는 리사를 지켜야만 해.]
“노엘, 네 말대로 리사는 꼭 지켜 줘.”
[응. 꼭 그럴 거야. 반드시.]
이제야 꼬마 노엘도 조금은 원래의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내 손 안의 붉은 보석이 부드러운 잿빛의 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꼬마 노엘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리사, 너는 꼭 나만 바라봐야 해. 영원히.]
하여간 저 영원히, 란 단어는 이제 굳이 말하지 않아도 환청으로 들릴 지경이다.
꼬마 노엘이나 큰 노엘이나 한 번씩은 꼭 이렇게 나를 무섭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아 참! 노엘이 기다리고 있지.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신속히 손안의 가루를 탁탁 털어낸 나는 좁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중간 문을 거쳐 복도로 이어지는 문으로 나오자 노엘이 작은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꽤 많이 필요했나 봐.”
아주 오래오래 기다렸다는 표정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기색이 강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생각보다 늦어졌지 뭐야.”
나는 최대한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말 미안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미안한 느낌은 없었다. 어쨌거나 이 녀석은 퀘스트 방해꾼이 분명하니까!
“뭐, 됐어. 이렇게 내게 와 줬으니까. 그런데 역시 기다리는 건 아직 잘 못 하겠어. 나랑 안 맞아.”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다. 나를 얌전히 기다려 주다니. 어쩐지 기특하기도 하고…….
퀘스트 중에 이 녀석이 끼어들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기다려 주었잖아. 잘했어. 노엘, 정말 잘했어!”
“그거 말고.”
“어, 응?”
“그 표현 말고… 그 있잖아. 아까 했던 말…….”
갑자기 그가 머쓱하게 얼굴을 붉혔다. 퀘스트 하기 전에 그에게 했던 말인가 본데 영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음… 내가 뭐라고 했을까.”
내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긁적이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며 읊조렸다.
“최고.”
“응? 최고?”
“네가 나더러 최고라고 했잖아.”
아……!
그랬구나. 너무 기쁜 마음에 잔뜩 들떠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아무튼 노엘은 그 말이 기분 좋았던 거고…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걸 허락해 주었던 건가?!
나름 노엘을 다룰 방법을 찾은 게 아닐지 또 혼자 감탄하고 있던 찰나.
코앞까지 다가온 노엘이 나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노, 노엘……?”
“내가 너한테 최고라는 말. 진짜지?”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서 입단속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주워 담기는 한참을 늦었고.
“그, 그럼. 네가 최고야. 허허.”
지금 말을 바꾸기라도 했다간 금방 또 쫓기는 신세가 될지 몰랐다.
“그래, 내가 너한테 최고구나.”
노엘은 입꼬리 한쪽을 쓱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무진장 좋아 보였는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곤 묘한 감정이 들었다.
‘뭐야.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좋아하다니……. 이럴 땐 꽤 귀엽네.’
그런데 이 녀석한테 쫓길 땐 또 그렇게 죽을 듯이 무섭단 말이지.
정말이지 답이 없다.
“아! 맞다. 노엘! 베키는? 베키는 어떻게 한 거야?”
“베키…… 는 일단 묶어 두었어.”
“무, 묶어? 어디에?”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노엘을 눈으로 따라가자 베키가 보였다.
멀지 않은 복도의 기둥에 베키가 밧줄로 돌돌 묶여 있었다.
“나 잠시 베키 좀 보고 올게.”
나는 곧장 베키에게 다가갔다.
‘베키, 넌 내 둘도 없는 친구였잖아. 그런데 왜 날 그렇게 공격한 건지 전혀 모르겠어.’
물론 정확히 말하면 이 몸의 친구겠지만.
묶인 베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여전히 긴 흰머리가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베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랑은 말도 하기 싫은 거야?”
답답했다. 속 시원하게 이유라도 말해 주면 좋을 텐데,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나 이젠 네가 무섭지 않아.”
그래서 나라도 속 시원하게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턴 네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싶어.”
나는 그녀의 얼굴을 덮은 흰머리를 양손으로 갈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하얗고 고운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내가 알던 흉흉한 귀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역시, 너는 변함없이 정말 예쁘고 당당한 빛이 나.”
눈동자의 색도 입술도 전부 핏기 없는 하얀색이었지만, 이목구비는 이전의 베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나와 나이가 비슷해졌을 뿐, 그녀는 여전히 베키였다.
“베키, 네가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감격스러워 눈물을 또 찔끔 짜냈다.
나를 보는 그녀는 표정이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 여전히 대화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난 어쩐지 그런 그녀가 밉지 않았다.
***
“베키를 이대로 두고 가려고?”
“응, 일단은.”
“이렇게 두고 갈 순 없어. 노엘, 베키를 풀어 주면 안 될까?”
“풀어 주면 너를 또 공격할 거야.”
너무나 단호하게 얘기하는 걸 보니 베키에게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순순히 응했다면 이미 풀어 줬겠지?
나는 베키를 향해 큰 기대 없이 질문했다.
“베키, 정말 풀어 주면 날 다시 공격할 거야?”
“…….”
여전히 묵언 수행을 하는 베키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대하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섭섭했다.
노엘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탄탄해 보이는 허리 위에 올렸는데, 이미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그것 봐. 저 녀석……. 아주 고집불통이라니까. 정신 차릴 때까지 일단 저렇게 두는 게 맞아.”
“하지만, 다른 괴물이 와서 해코지하거나 그러면 어떡해?”
“흠……. 그럼 끌고 가서 내 방 근처에 묶어 둘까?”
“그, 그래. 차라리 그게 나아.”
베키는 생각보다 순순히 노엘의 밧줄에 묶여 걸음을 옮겼다.
나도 노엘의 옆에서 발맞추어 캄캄한 복도를 걸었다.
괜히 긴장해서 그런지 노엘의 방까지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노엘, 리마는 잘 지내지?”
새삼 그때 이후로 리마를 본 지가 꽤 오래된 것 같아 궁금했는데.
“…….”
어째선지 노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노엘…?”
왠지 기분이 싸늘해 재차 물었지만.
“몰라, 리마 따위.”
영 답답한 대답뿐이었다.
입을 삐죽이곤 될 대로 되라는 표정을 하는 걸 보니 둘이 싸우기라도 한 모양이지?
‘으이그. 이럴 땐 또 애 같단 말이야.’
어느덧 노엘의 방 앞에 도착했고, 노엘은 방 바로 밖 복도 기둥에 베키를 돌돌 묶어 놓았다.
베키는 여전히 얌전했다.
저 베키를 노엘이 어떻게 제압한 건지 모르겠다.
노엘은 아무리 봐도 육체적으론 보통 사람 같았으니까.
그래서인지 노엘에게 다른 능력이라도 있는 건 아닐지 조금 무서워졌지만, 힘으로라도 제압했겠거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베키, 내가 널 꼭 풀어 줄게. 노엘을 잘 설득해 볼 테니까 조금만 견뎌 줘.”
“…….”
여전히 입을 다문 베키를 뒤로하고 나는 노엘과 방으로 들어왔다.
노엘의 방에 들어온 것은 아마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하룻밤을 편히 보낸 곳이라고 그새 마음이 놓였는지 한결 편했다.
“리사, 먼저 씻을래? 내 방에서 함께 보내는 우리의 두 번째 밤이네.”
아, 물론 모든 게 익숙하다는 말은 아니다.
바로 딱 한 가지.
기회만 났다 하면 장르를 바꿔 버리는 바로 이 녀석, 노엘은 제외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