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렇다면 이곳은 고문실이라도 되는 걸까?
‘이건 좀 마음에 드네. 내 손에도 착 잡히는 게…….’
나는 그중 작은 도끼 하나를 잡아 들었다.
그나마 조금 익숙하기도 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래. 나도 무기 하나쯤은 들고 다녀야지.’
써야 할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철퇴를 허리춤에 차던 노엘을 떠올리고 나도 허리춤에 도끼를 묶어 놓았다.
그러곤 뭐가 더 없나 둘러보는데, 무언가 발에 밟혀서 내려다보니 작은 쪽지였다.
나는 세 번 정도 접힌 낡은 쪽지를 펼쳐 보았다.
무언가 쓰여 있을 줄 알았는데, 종이 속에는 붉고 동그란 작은 보석이 들어 있었다.
“예쁘다. 근데 갑자기 웬 보석이지?”
[이 붉은 보석을 따라가다 보면, 열쇠도 찾고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거야.]
‘뭐? 정말?’
[그러니까 지금부턴 반드시 붉은 보석을 쫓도록 해. 그리고 그가 원하는 일을 들어줘. 그래야 계속해서 붉은 보석을 발견할 수 있어.]
‘그가 원하는 일? 그는 또 누군데?’
[붉은 보석을 만져 봐. 그럼 알게 될 거야. 행운을 빌어.]
보석에 손을 대자 갑자기 눈앞에 빔이라도 쏜 듯 환영이 펼쳐졌다.
‘오오. 뭐야! 뭐가 이렇게 생생하지?’
펼쳐진 환영들은 과거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 주는 듯했다.
내 앞에 낯익은 얼굴의 아이가 쓰러져 있었고, 철퇴를 든 남자가 겁을 주고 있었다.
-다음에도 그러면 그땐 정말 이 철퇴를 내려칠 줄 알아!-
남자는 아이의 근처에서 괜히 거들먹거리며 철퇴를 휘둘러댔다.
누가 봐도 내려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손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을 거잖아. 다 알아.-
얼굴을 들어 보이며 웃는 아이는 분명 노엘이었다. 지금보다 몇 살은 더 어렸던 노엘.
딱 지금 노엘의 반만 한 키였다.
-그 기세가 언제까지 가나 보자. 꼬맹이. 네 쓰임이 다하는 날엔 가차 없이 분질러 주겠어.-
-……차라리 지금 죽여.-
-하긴. 매일 유리장에서 전시품 노릇을 하느니, 죽는 게 더 편하긴 하겠지.-
-…….-
-론 제국의 귀하신 황태자께서 적국 귀족의 전시품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으하하.-
우악스러운 남자는 계속 노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연설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그거 아니? 널 감상하려고 먼 곳에서 오는 귀족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야!-
-나를… 팔아넘기려고 하는 거냐.-
-하하하. 꼬맹이. 웃기지 좀 마. 미쳤다고 널 팔아? 네 미모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정도라고.-
-…….-
-시드 공작님께서 널 얼마나 아끼시는지, 너는 모를 거야.-
시드 공작이란 작자가 이 별장의 주인인 모양이다.
‘저 어린애한테 할 소리야? 미쳤나 봐, 진짜.’
노엘은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낸 거지?
여기 무슨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 소굴 같은데….
-그럼 좀 쉬고 있도록 해. 이따 저녁에 전시회가 또 있을 거니까, 네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달라고. 알겠니?-
험상궂은 남자가 나가고 어린 노엘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무슨 약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상처 하나 없었는데 기운 없이 늘어져 있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상태.
어릴 때 모습을 보니 뭔가 지금의 노엘과는 달리 연약한 느낌이었다.
초점 없던 그의 눈동자에 빛이 들어오게 한 건, 뜻밖의 손님이었다.
어디선가 그리마가 나타나 노엘의 시야 앞을 빠른 속도로 기어갔다.
“이익!”
정상적인 크기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그리마였다. 그래도 징그러운 것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전기 충격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그리마를 피해 멀리 떨어졌다.
그리마는 꼬마 노엘의 시야에서 춤을 추듯 왔다 갔다 했다. 그러자 노엘이 호 하고 바람을 불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좋겠다……. 근데 여기 있으면 안 돼. 도망가.-
하지만 그리마는 떠나가지 않고, 노엘의 곁을 계속 맴돌았다.
-…내가 외로울까 봐 같이 있어 주는 거야?-
꼬마 노엘은 그런 그리마를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저 작은 그리마가 리마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점점 내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거 같아.’
그리마를 피해 반대 방향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꼬마 노엘이 내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여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나 말고는? 벽에 뭐라도 붙어 있나?
지금의 노엘보다도 동그랗고 귀여운 눈이었다. 그 눈이 정확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보이나? 에이, 설마.’
그리고 그가 입을 열자, 그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 리사.]
나는 화들짝 놀라,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 내가 보여?”
[응. 보여. 백금발에 에메랄드 눈동자. 나는 네 말도 들을 수 있어.]
오우…….
그러고 보니 그의 말은 의문의 목소리와 같은 방식으로 내게 들려왔다.
하지만 목소리나 느낌은 전혀 달랐다.
꼬마 노엘이 의문의 목소리 주인은 아닌 것 같았다.
[전시회에서는 항상 웃고 있어야 해. 하지만 8시간을 그러고 있는 건 힘들어서… 매번 실패했거든. 그러면 여기 와서 이렇게 혼나야만 했어.]
꼬마 노엘은 또박또박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혼자 여기 있는 게 무서웠지만, 이 녀석이 늘 이 시간마다 나타나 주었어. 그래서 조금은 덜 외로웠어.]
나는 주저앉아 주먹을 입에 넣을 듯 가져다 댔다.
‘아니. 애가 얼마나 외로웠고 무서웠으면, 그리마 따위를 반가워했겠냐고!’
[나는 이제 또 전시실로 옮겨질 거야……. 나랑 같이 가 줄래?]
어떻게 과거의 환영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게임 같은 게임을 시작하게 된 기분이 들었다.
보통, 게임에서 퀘스트를 시작할 때 나오는 말이 도와 달라는 거 아니던가?
그렇다면 내가 드디어 이 자유도 높은 게임의 퀘스트를 찾아낸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상대는 지금의 노엘이 아닌, 과거의 여리고 귀여웠던 노엘이었으니.
그저 만져지지도 않는 환영이었다.
환영은 내게 물리적으로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으니, 상대하는 데에 특별히 위협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거기다 의문의 목소리도 붉은 보석의 ‘그’가 원하는 일을 들어주라 했었으니.
‘그’가 이 녀석인 게 분명하다.
“내가 도와줄 거라도 있을까?”
[그렇게 얘기해 준다니 정말 기뻐.]
누워서 미소 짓는 그가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어리지만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미모였다.
“나 전시실 어딘지 알아! 가 본 적 있어. 내가 그리로 가면 돼?”
그곳에 있는 관에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하룻밤을 보냈었지.
죽어도 다시 가고 싶지는 않지만.
[응…. 그래 줄래? 네가 내 앞에 서 있으면……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응.]
“그게 뭐야…….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데.”
[오늘의 내 미소는 모두 네게 보내는 미소가 될 거야.]
“뭐……?”
[네게 보내는 미소라면, 나는 8시간도 넘게 미소를 유지할 수 있어.]
뭔가 말은 굉장히 로맨틱한데, 상황이 괴상했다.
결국 전시품의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니.
하지만 이미 일어나 과거가 된 상황일 뿐이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겠지.
구해 줄 수 없다면… 도와주기라도 해 달란 건가?
어쩌면, 이 공포 게임의 진정한 시작일지도.
“알았어. 그리 갈게. 그리고 네 앞에 서 있을게.”
[고마워. 리사. 나중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모든 환영이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지배했다.
내 손바닥 위의 붉은 보석은 검게 변하더니 금세 가루가 되었다.
나는 지도를 펴 전시관이 있던 방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해 두었다.
7층에 있는 가장 넓은 방이었다.
후…….
폐 속을 휘젓듯 깊게 심호흡하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꾹 다물었다.
다시 복도로 나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척 긴장되었다.
그래도 이번엔 무기를 지니고 있으니 뭐든 나를 괴롭히는 건 베어 버릴 작정이었다.
나는 도끼의 날을 살펴본 뒤, 비장한 표정으로 복도를 나섰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지 않아, 결국 무서워서 계단까지 무식하게 뛰어갔다.
뭔가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헉헉…….”
나는 계단을 세 개씩 뛰어올랐다. 하지만 저질 체력은 여기서도 똑같은 모양이다.
피를 토할 것 같은 목구멍 통증이 올라왔다.
다리가 무서워서 후들거리는 건지, 힘들어서 경련이 일어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이제 겨우 3층이야? 와, 미치겠다. 진짜.’
확실한 건 절대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는 것.
밤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시 이후 복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서둘러 7층 전시실에 도달해야만 했다.
***
드디어 7층에 도달했다.
공포심이 내 체력을 이겼는지, 바짝 각성 상태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올라오는 길에 종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심장이 철렁했었는데.
완전한 밤이 된 모양이다.
다행히 전시실은 계단에서 가까웠다.
터벅터벅.
낯익은 진동에 잠시 멈추어 섰다. 노엘을 유리장에 가두었던 거인 괴물의 발소리였다.
아직 시야에 들어오진 않는 걸 보니 조금 멀리 있는 듯했다.
끼익.
전시실로 뛰어 들어간 나는 곧장 문을 닫았다.
그러곤 전시실 문을 잠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했는데.
‘뭐야. 잠그는 게… 없었구나?’
열쇠 구멍은 있으니, 아마도 열쇠로만 잠글 수 있는 형태인 모양이다.
‘만약 거인이 들어온다면, 또 관에 들어가 숨는 수밖에 없겠어.’
나는 관이 제자리에 잘 놓여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