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나와 눈이 마주친 리마는 그제야 벽을 타고 내려왔다.
“노, 놀랬지? 미안……. 누나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말을 걸지 못하겠더라고.”
“그…, 그래.”
뭐야. 그럼 막 들어왔을 때, 말을 걸든가! 조용히 지켜보는 건 뭔데?
위험한 상황이었다. 단둘이 작은 방 안에 있다니.
“내 다리는 다 찾았어?”
“아. 하나 찾았어. 근데 노엘이 가지고 있어.”
“그래? 왜 이렇게 느려. 나는 벌써 다섯 개나 찾았는걸!”
츠스스스스.
그는 찾은 다리를 내보이며 자랑했다. 찾은 다리들은 그의 몸통에 다시 붙어 있었다.
‘떼었다 붙였다가 참 자유로운 다리로군.’
“그… 그렇구나.”
“근데,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어?”
어쩌면 리마가 나갈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노엘에 비하면 순한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몸통이 그리마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악의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으니.
“리마야. 누나가 이곳을 좀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을 모르겠어.”
일단 살살 캐물어 보자.
“그래? 그런 거라면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데!”
“뭐? 정말이야?!”
“응! 이곳을 나가는 방법!”
“어떻게 하면 되는데? 혹시 열쇠가 있는 곳을 아는 거야?”
“그럼! 알고말고.”
“어서 알려 줘!”
“맨입으로?”
츠스스. 츠스스.
아오! 진짜!
내가 살아서 밖에 나가게 되면 눈에 보이는 그리마란 그리마는 모조리 박멸할 것이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럼,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농담이야. 농담. 헤헤. 누나 왜 이렇게 순진해?”
츠스스스. 츠스스. 츠스스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럼 누나. 나가는 방법을 알려 줄게. 이리 와 봐.”
리마가 가장 위에 있는 다리를 들어 손처럼 흔들었다.
“꼭… 그리 가까이 가야 해?”
가까이 갔다가 쓱싹 당하는 거 아니고?
저 다리라면 내 몸통쯤이야 쉽게 통과할 것 같은데.
“당연하지! 노엘이 들으면… 나 혼날지도 모르는걸? 노엘은 화나면 너무 무섭단 말이야.”
“그건 그래. 화 안 나도 무섭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리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의 긴 더듬이가 닿을까 봐 신경이 쓰여 최대한 시선을 방의 천장 모서리에 두었다.
이윽고 그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노엘을 죽이면 돼. 노엘의 심장 속에 열쇠가 있어.”
뭐라고?
진정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말은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방법이…… 정말 그것뿐이야?”
“응. 다른 방법은 없어. 그것뿐이야!”
“그럴… 수가.”
“내가 말해 줬다고 노엘한테 알리면 절대 안 된다?”
나는 입이 쩍 벌어져선 눈을 치켜떴다.
그래, 이곳이 정말 게임 속이라 치자.
‘그런데 이 게임의 난이도 상태가……?’
노엘이 괴물의 모습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사람이지 않은가. 아무리 게임이라도 이건 범죄잖아!
숨통을 끊어도 문제였다. 나더러 심장에서 열쇠를 어떻게 꺼내라는 건지.
물론 내가 그를 없애려 달려든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어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머리를 위로 쥐어뜯고 있었다. 멀쩡한 정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이미 제정신이 아닌 거 아냐?
“누나. 괜찮아? 지금 굉장히 불안해 보여.”
“어……. 괜찮지 않아. 굉장히 불안한 건 맞아.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마워.”
“괜찮지 않아서 어떡한담……. 걱정된다. 그래서 어디 노엘의 털끝만큼이라도 건들 수 있겠어?”
“……근데 넌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노엘이랑 친한 사이 아니었어?”
“음……. 노엘도 좋지만… 누나가 더 좋아졌거든. 노엘보다는 누나가 이겼으면 좋겠어.”
“그, 그렇구나.”
더욱 혼란스러웠다. 노엘이나 이 녀석이나 뒤에선 서로를 공격하는 사이인 건가?
‘쇼윈도 친구 뭐 그런 거야?’
아무튼 리마가 나를 안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다시 내 다리를 찾으러 가 볼게. 노엘을 죽이는 데 성공하면, 내게도 꼭 알려 줘.”
“알았어.”
리마는 어쩐지 신이 난 표정이었다.
“누나. 문 좀 열어 줄래? 보다시피 내가 손잡이를 돌릴 수가 없어.”
“아. 그래…. 앗! 잠깐만.”
나는 문에 귀를 대고 쫑긋했다.
혹시라도 바로 밖에 노엘이 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문을 여는 건 신중해야 했다.
일단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노엘한테 인기척이란 게 있었던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 예민해진 것 같다.
“누나?”
“아, 미안. 자, 어서 가!”
문을 여니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츠스스스스스.
리마가 열심히 움직이는 소리만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리마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래…. 그리마가 진짜 빠르긴 했지. 나도 다리만 몇십 개면 저렇게 빠르겠다.’
나는 멍하니 그 기괴한 모습을 바라보다 어둠이 덮쳐 오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에 다시 문을 닫았다.
***
1층 계단 앞.
노엘은 리사가 올라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쫓아오지 말라니까 더 쫓아가고 싶네. 분발해야겠어.’
츠스스스.
혼자 침울해진 마음을 달래던 중, 리마가 다가왔다.
“노엘! 네가 시킨 대로 누나한테 말했어.”
노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시킨 대로? 아… 그래? 잘했어. 예상외의 타이밍이지만.”
“그런데 왜 그러라고 한 거야? 그러면 누나가 널 죽이려고 할 텐데?”
노엘의 얼굴과 목이 붉게 물들었다.
비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는지 제법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야 제 발로 나한테 올 거 아니야. 그렇게 해서라도 내 곁에 딱 붙여 놓고 싶어.”
“그러다 정말로 누나한테 죽는 수가 있어.”
“가끔 상상하곤 해. 그녀가 먼저 나를 쫓아오는 걸 말이야. 얼마나 행복할까?”
“…….”
“그런데 내가 잘 참고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벌써부터 발바닥이 근질근질해 자신도 모르게 어슬렁거렸다.
코끝까지 드리운 까만 그림자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그래서 리사는 지금 어디에 있어?”
***
나는 리마가 나가고도 한참을 고심했다.
이대로 다짜고짜 노엘을 해치우러 간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손에 남의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나였으니까.
내가 모니터 밖에 있었다면 시도해 봤을 법도 했지만, 지금은 지독한 현실감에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설령 정말로 노엘을 해치운 뒤 탈출하게 된다고 해도 정상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다.
리마는 노엘을 죽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일단 진행해 볼 예정이었다.
우선 이 별장 저택에서 열쇠든 뭐든 찾아다녀 봐야겠다.
몸이라도 움직여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마 괴물도 봤는데, 노엘을 제외하곤 더 이상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세뇌를 되풀이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서.
흐으읍!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가장 가까이 있는 방들부터 탐색하기로 했다.
이 별장은 1층 출입문 맞은편에 곧장 계단이 있었고, 계단은 건물의 중앙에 있는 구조였다.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복도가 양쪽으로 길게 나뉘어졌는데, 지금부터 2층의 오른쪽 방들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네.’
빈방들도 꽤 섞여 있었다. 빈방을 발견하는 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할 일이 줄어든 느낌이랄까.
그렇게 다섯 번째인가 들어온 방이었다.
책꽂이가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다. 개인 서재 같은데, 거미줄이 두껍게 쳐 있어서 책을 꺼내 보긴 힘들 것 같다.
‘이 방은 내가 일 좀 해야겠구먼.’
나는 양팔을 걷어붙이고는 무섭지 않은 척 호기롭게 들어갔다.
먼저 책상을 살폈다. 책상 위에는 작은 램프와 펜 등 별것 없었다.
3단으로 이루어진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니, 장부 같은 것이 나왔다.
가장 위에 노엘의 이름이 있었고, 그 밑으로도 주르륵 다 이름뿐이었다.
나는 나머지 서류들까지 모두 꺼내 살폈다.
조각 같은 정보들을 취합해 보자면, 이곳은 길 제국 어느 귀족의 별장이었다.
기록이 끊기기 얼마 전 론 제국과의 전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따라 결국 론 제국은 멸망했다고.
론 제국의 황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길 제국이었기 때문에 그 선택이 당연했던 듯하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살아남은 황족이 있었는데, 숨만 붙어 있던 걸 겨우 살려냈다고.
아무튼, 론 제국 포로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장부였다.
‘포로들을 관리하는 귀족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 유리장에 노엘이 황태자라고 쓰여 있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론 제국의 황족이 노엘인가 보다.
‘근데 포로들을 데리고 무얼 하려 한 거지?’
유리장을 떠올리니 뭔가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반듯하게 접힌 커다란 종이를 펼쳐 보자 지도가 나왔다. 이 건물의 구조가 훤히 기록된 설계도였다.
그야말로 아이템 획득!
‘어디 보자…….’
도면에 의하면 이 서재 옆에 붙어 있는 방이 꽤 컸다.
여기선 더 볼 것도 없는 것 같으니 바로 옮겨 가기로 했다.
검은 복도가 너무 무서워서, 복도만 나오면 걸음이 정신없이 빨라졌다.
그래도 처음에 엉금엉금 기어 다닌 걸 떠올리면 차라리 지금이 낫긴 했지만.
이런 나를 누군가가 항상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오래 있다간 진짜 병 걸리겠어.’
아무것도 없지만, 괜히 쫓기는 기분에 얼른 목적지로 들어와 버렸다.
어쩐지 눅눅한 것이… 차고 습한 기운이 강한 방이었다. 게다가 바닥은 거친 돌이었다.
‘뭐야… 또 뭐 하는 데야.’
유독 쿰쿰한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려 본 결과, 간이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벽에도 뭐가 많이 걸려 있었는데… 고문용 기구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