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8 장. 새로운 시작 (8/21)

제 8 장. 새로운 시작

‘그 짧은 시간에 모두 어디로 치워버렸단 말인가? 밖에서 계속 감시하고 있었으니 분명 이 집안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혜청 육품 관리인 한 낭청의 집. 구휼미를 조직적으로 빼돌리는 자들의 꼬리를 밟아 이곳을 급습한 서율은 얼굴 가득 낭패감이 서려 있었다. 증거품이 사라질까 빠르게 낭청을 잡아들이고 벽과 바닥까지 뜯어가며 수색을 벌였지만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나긴 잠복근무가 모두 헛수고였단 말인가. 빼돌린 미곡 일부와 비밀장부가 이리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들이닥친 것이었건만. 서율은 사헌부 아전 하나와 마지막으로 곳간을 한 번 더 샅샅이 뒤집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저희들이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잘못 본 게 아니라 눈속임에 넘어간 것이다.”

“예?”

“저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야. 우리가 가짜를 보고 쫓아오는 동안 진짜는 다른 곳으로 빼돌렸겠지.”

“그렇다면 내부에 첩자가 있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수색을 중단하고 모두 모이라 하게.”

“예, 나리.”

아전이 명을 받들어 곳간을 나서려 할 때였다. 휘잉 거센 바람이 불어오더니,

꽝!

귀속이 얼얼할 정도로 굉음을 내며 곳간 문이 드세게 닫혀버렸다. 곳간 전체가 흔들거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그 여파로 구석에 세워져 있던 조그맣고 허름한 자루 하나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쓰러져 버린다. 하도 낡고 지저분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자루, 그 안에서 엄청난 내용물이 좌르르 굴러 나온다. 쾌쾌했던 창고 안에 신선한 솔향기를 가득 퍼트리면서.

“이건!”

주로 임금님께 진상되는 최상급의 송이버섯이었다. 이렇게 귀한 것이 일개 육품 관리의 곳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니! 서율이 허름한 자루를 집어 그 속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곳간 문을 잠가버린다.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그는 서율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바짝 엎드리며 통사정을 했다.

“나리, 제발 그것만은 모른 척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그것만은 남겨주십시오.”

“진상품을 빼돌린 것도 모자라 못 본 척까지 해 달라! 너는 누구이더냐?”

“소인은 이 집의 서기입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종육품 관리가 서기를 따로 두고 있을 만큼 규모 있게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심통을 앓고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해 주인마님 몰래 제가 빼놓은 것들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저는 물론 식솔들까지도 무사치 못 할 것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사내가 이마를 땅바닥에 대고 간절히 사정을 하는데 그를 바라보던 서율의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 한 곳으로만 집중되고 있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사내의 등 아랫부분. 엎드리느라 팽팽해진 옷 위로 허리 부위에 띠를 찬 것 같은 자국이 미묘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이었다.

“허리에 무엇을 차고 있느냐?”

“예?”

땅에 이마를 처박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드는데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이, 이건…… 제 개인적인 물건입니다.”

“쯧쯧,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구나.”

서율은 그 말과 함께 아전에게 신호를 보냈고 두 사람은 동시에 사내에게 달려들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띠를 풀어내었다. 물건을 빼앗긴 낭청의 서기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언가 심히 켕기는 게 있는 것이다. 싸늘히 식은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던 서율은 천에서 나온 두 개의 뭉치 중 하나를 풀어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이럴 수가! 지난 유월, 의천 상단 대방이 보여 주었던 연꽃모양의 상아 연적이 떡 하니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른 하나를 풀어보니 그 역시 당시에 같이 보았던 최상급의 황모필이었다. 이 집을 팔아도 살 수 없는 물건들이 서기라는 자의 허리춤에서 나왔으니 구구절절 듣지 않아도 그 이유는 명확하였다.

‘꼬리를 제대로 밟은 모양이군.’

서율은 발밑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내를 흘끗 쳐다보더니 무릎을 굽혀 그와 눈높이를 맞춘다. 얼굴 가득 안타까운 표정 또한 머금고 있었다.

“송이가 몸에 좋은 것은 사실이나 모든 병에 약처럼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라네. 내가 의원을 보내 자네의 아이를 진맥케 하고 약제도 지어주도록 하지.”

“예? 나, 나리, 대체 왜, 왜 이러십니까?”

사내가 겁을 먹고 뒤로 주춤거리자 서율은 한쪽 입 꼬리를 슬며시 밀어 올리며 태연히 맞받아쳤다.

“어떤가, 저렇게 곳간 문도 잠근 김에 나와 은밀한 거래 한번 터보지 않겠는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던 사내는 뜬금없는 서율의 제안에 어쩔 줄을 몰라 동공만 점점 더 팽창되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노기에 찬 세자의 음성이 동궁전의 허공을 갈랐다.

“그 낭청이란 자가 정말 윗선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미곡뿐 아니라 갖가지 진상품들이 줄줄이 새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수사의 규모를 더 키워야겠군. 진상품을 건드리고 있다면 필시 생산지에서 손을 대고 있을 것이다. 뒷배를 봐주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최상급의 황모필이 호조참의에게 바쳐질 선물이었다면 상아 연적은 그보다 더 높은 관리에게 전달될 예정이었을 것입니다.”

생각보다 부패의 뿌리가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소식에 세자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일단 그 낭청은 미곡을 조금 빼돌린 혐의로 징계를 내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 태형을 내리고 녹봉을 삭감하는 선이 적당할 듯싶네.”

“예, 저하.”

“비용을 따로 내줄 터이니 그 서기란 자와 이용할만한 다른 자들을 더 포섭해보도록 하게. 앞으로 어찌할 셈인가?”

“빼돌린 진상품이 어디까지 흘러가고 있는지 추적 중입니다. 분명 그것들을 재물로 변환시킬만한 어떤 수단을 강구해 놓았을 것입니다.”

서율의 말을 듣고 있던 세자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호조참의도 중간 단계일 뿐이겠지. 그런 자까지 연루되어 있다면 분명 어느 세력의 정치자금일 터, 사심을 완전히 버릴 수 있겠는가? 좌상의 묵인 없인 그 어떤 이도 감히 이런 짓을 벌일 수는 없네. 부친의 결백을 믿는 것인가?”

“소신, 나라에 고용된 사헌부의 관리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이 사건을 파헤칠 것입니다.”

꼿꼿한 기백이 실린 김서율의 대답에 세자의 입 꼬리가 만족스러움으로 슬쩍 실룩거린다.

‘후후, 이미 집안의 장부를 전부 뒤져 보았겠지.’

김서율이 낭청의 집을 급습한 이후, 제일 먼저 집에 틀어박혀 일가친척들의 가계 장부까지 전부 뒤져보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좌상이 권력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음에도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차라리 재물을 탐하는 이였다면 그 오랜 세월, 금상과 세자가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네의 활약을 기대해 보지. 참, 이판 댁 규수가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네. 알고 있는가?”

“들었사옵니다.”

“어떤 분이신가? 자네와도 오누이처럼 지낸 분이시라 들었는데.”

“바르고 음전한 분이십니다. 걱정이 되시옵니까?”

“나야 별로 마주칠 일이 없지만 네 살이나 어린 시어머니를 모시게 생겼으니 빈궁께 미안해서 그런다네.”

보희가 중전으로 간택되었다는 것은 서율에게도 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판과 정부인이 금이야 옥이야 끔찍이도 아끼던 고명딸이 아니었던가. 그런 여식을 살얼음판 같은 궁으로 들여 연치 높으신 금상의 배필로 만들 줄이야.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원했다고 하니 더 이상 왈가왈부 할 필요도 없는 일. 그저 오라비와 같은 마음으로 보희가 궐에 들어와 잘 적응하고 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방에 있는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놓고 은명은 청쾌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다. 한차례 비바람이 지나간 가을의 하늘이 시원할 만큼 높고도 선명하였다. 지나던 궁녀와 노비들은 물기를 머금은 듯 맑고도 고결한 자태의 공주를 훔쳐보며 녹녹한 미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 것일까? 모두가 까무러칠 일이지만 은명은 한 사내를 생각하느라 요 근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를 지경이었다.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오늘도 역시 눈을 감고 그날 산속에서 자신이 했던 말들을 기억이 나는 대로 떠올려 보았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자 가슴이 또다시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것이냐?’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감았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후들후들 손끝이 떨려왔지만 눈빛만큼은 또랑또랑 별이 빛나는 듯하였다. 아무리 생각하고 거듭 생각을 해봐도 결론은 언제나 매일반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고민이 무슨 소용 있을까? 앞으로는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가문이고, 원한이고, 거창하게 세워둔 모든 계획을 뒤로 미룬 채 오로지 그의 마음을 얻는 일에만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당찬 표정으로 한 달이나 끌어온 고민을 끝내는 순간, 언제 와 있었는지 지척에서 수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지평 나리께서 오늘도 휴강을 하시겠다, 기별을 보내왔사옵니다.”

“또? 대체 이번이 몇 번째인 게야!”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공주가 화르르 불타오르며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어버린다. 산중에서 고백을 받은 이후, 김서율은 한 달이 넘도록 화경궁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일이 많다고는 하지만 슬쩍 피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날 동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숙부에 관한 말을 끝으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그는 비가 그칠 때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다.

‘비겁해! 그러고도 어찌 사내라 할 수 있는가! ……혹시 그 규수 때문에?’

얼마 전, 그와 혼담이 오간다던 이판 댁 여식이 중전으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서율이 그 규수를 마음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불안해하던 차였기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그가 만약 은애하는 이를 잃고 상심에 빠져있는 것이라면……. 은명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방안에는 감떡과 산딸기 과편, 밤초 등을 푸짐히 올린 다과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열흘 간 앓아누웠던 공주는 감환으로 또 한 차례 병치레를 하여 상당히 야윈 상태였다. 때문에 화경궁에서는 요즘 공주의 간식에 특히 더 많은 신경을 쏟아 붓고 있었다. 최 상궁이 감떡을 집어 입에 넣어주자 은명은 오물오물 받아먹고는 상당히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 상궁.”

“예, 마마.”

“사내의 마음을 잡으려면 어찌해야 하느냐?”

“예에?”

공주의 폭탄 같은 하문으로 보모상궁을 비롯해 시중을 들던 수비와 차를 우리던 난이까지 일동 그대로 동작을 멈춰버렸다. 최 상궁은 떨어트릴 뻔했던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차분히 공주의 의중을 한 번 더 여쭈어 본다.

“마마, 대체 그게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내가 지평의 마음을 가져야겠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답변이었다. 먹빛의 눈동자에선 의지의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공주께서 또다시 지평에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최 상궁은 과거 어린 공주가 치렀던 홍역을 떠올리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또 이러시옵니까, 마마.”

“궁녀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뜬금없긴 하지만 나 혼자서 끙끙대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 지금부터 한 사람씩 기탄없이 내게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아라. 보모부터 말해보게.”

어찌 저리 낯 뜨거운 말씀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하신단 말인가.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최 상궁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말들을 줄줄이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 언젠가 애간장을 녹게 했던 공주의 상사병이 재발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우선, 나비가 저절로 찾아들 수 있도록 부덕을 갖추시고, 몸가짐과 언행을 언제나 바르고 아름답게 하셔야 할 것이며……”

“마마님, 나비가 날아들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데 어찌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십니까? 차라리 마음을 적극 표현하시고, 단번에 사로잡으소서.”

서책에나 나올 법한 말이 답답했는지 난이가 불쑥 끼어들자 최 상궁은 펄쩍 뛰며 호통을 쳤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경망스러운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공주마마 성정에 무작정 기다리시는 건 무리라 사료되옵니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되었다. 틀린 말도 아니니 그쯤 해두어라.”

최 상궁이 얼굴을 붉히며 난이를 호통치려 하자 은명이 끼어들어 사태를 진정시켰다. 사실 은명은 난이의 답이 꽤 만족스러웠다. 여러모로 완벽해 보이는 김서율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융통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최 상궁의 말대로 저쪽에서 오기만을 고대한다면 백발 할머니가 될 때까지 주구장창 기다리기만 해야 할지도 모를 일. 가만히 앉아 참고 인내할 문제가 아니었다.

‘차갑고 융통성이 없어 보여도 그 옛날 해진 옷을 입고 마구 하대를 하던 나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던 사람이다. 내가 적극 나선다면 다소 인정머리 없는 말을 내뱉을 진 몰라도 결국엔 말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야.’

“내가 서찰을 한 통 써줄 터이니……”

고민을 끝낸 공주가 눈을 반짝이며 명을 내리다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곧이어 얼굴 가득 못마땅한 기색이 퍼지는가 싶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할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늘, 그 많은 얘길 언제 다 서찰로 옮긴단 말이냐!”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불러만 주시면 소인이 옮기겠나이다.”

“답답하여라.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하면 속이 시원하겠……”

“마마, 왜 그러시옵니까?”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린 공주가 불안하여 최 상궁은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은명의 얼굴에는 서서히 광채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본시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몸소 찾아가 얼굴을 맞대면 간단한 일이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너무도 만족스러운 답을 끌어낸 은명은 그를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렸다.

은명이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자 최 상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공주의 옥안을 살펴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공주의 표정이 아무래도 불안하였던 것이다.

“마마, 어디가 또 불편하시옵니까?”

“외출을 할 것이니 차비를 놓게.”

“어디로 행차하려 하시옵니까?”

생그레 웃어 보인 공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기절초풍할 만한 답을 내어 놓는다.

“사헌부로 갈 것이다.”

새로운 날이 시작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