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7 장. 위험한 선택 (7/21)

제 7 장. 위험한 선택

‘여기서 밤을 새는 한이 있어도 서율 오라버니를 꼭 뵈어야 해.’

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시연의 방을 나온 보희는 서율의 처소가 있는 작은 사랑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 두 달,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하기만 했었다. 그와 평생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좌찬성 댁과의 혼담이라니요? 서율 오라버니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라고 하셨잖아요!]

[김 지평은 당분간 혼인할 생각이 없다는구나.]

[기다리겠습니다. 소녀가 기다릴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적어도 삼, 사 년 내에는 하지 않겠다는데 그러면 네가 대체 몇 살이 되는 것이냐? 정혼도 하지 않은 채 어찌 기다리기만 할꼬.]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거린다. 낮보다야 나았지만 타오름달의 밤은 여전히 후텁지근하여 숨까지 턱턱 막히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정신이 가마득하여 한숨을 크게 내리쉬는데 지척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보희야.”

이 얼마나 기다리던 목소리인가.

“이제 오십니까?”

“이 밤에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게냐?”

가까이 다가온 서율은 조금 피곤한 듯 보였지만 언제 봐도 늠름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기회이니만큼 보희는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 않고 혼사 문제를 직접적으로 꺼내놓았다.

“생각할 게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들으니 오라버니와 제 혼담이 진행되고 있다 하여서요. 혹,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요?”

“글쎄다, 나는 금시초문이로구나.”

“예?”

무심한 그의 표정과 대답에 보희는 와르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있었단 말인가. 조급함과 절박함에 손끝이 다 떨려왔다.

“실은 일전에 안빈마마와 혜빈마마께서 그 문제로 저를 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러고 보니 한양에 당도한 직후, 어머니께서 정혼이라도 해두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 상대가 보희였구나, 이제야 깨닫는 서율이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두 분 마마께서 무슨 생각으로 너를 불렀는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당분간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이러한 뜻을 분명히 말씀드렸고 부모님께서도 내 뜻을 존중해주기로 하셨다.”

보희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목구멍이 따끔따끔 메어오기 시작했지만 간신히 참아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셨습니까?”

“정말 걱정이 되어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게로구나. 나한테 시집오는 게 그리도 싫었던 것이냐?”

피식 웃으며 장난처럼 던지는 그의 말에 보희는 눈물이 핑 맴돈다. 수심이 가득한 이 얼굴을 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닙니다. 오라버니의 옆자리에 서고 싶어 그러는 것입니다. 오라버니가 아니면 그 누구도 싫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어릴 때부터 속마음을 감추는 법만 배워온 보희였다. 언감생심 그 속을 털어놓지 못하고 가슴만 졸이다 겨우 한 마디를 꺼내놓는다.

“오라버니를……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 안다. 나한테도 너는 우리 시연이와 같구나. 헌데 시각이 너무 늦어진 게 아니냐? 정부인께서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

잠시 머뭇거리던 보희는 끝내 다른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만 교육받고 그렇게만 키워졌기에. 자신의 이런 마음을 몰라주는 서율이 야속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물이 뚝뚝 쏟아져 내린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제 마음을 어찌 그리 몰라주십니까? ……바보 같은 윤보희, 한심한 윤보희.’

“호호호.”

혜빈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후원 곳곳으로 퍼져 나가자 안빈도 빙그레 웃어 보인다. 오랜 만에 금상과 함께 거닐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소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저 앞, 처소 근처에 다다르면 자신은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에 안빈은 자못 아쉽기까지 하였다. 실은 얼마 전, 보희 그 아이가 알현을 청해왔다. 마침 좌상 댁과의 혼담이 틀어진 것을 알고 있던 차라 안빈은 위로라도 해줄 겸 이를 수락하였다. 지금쯤이면 그 아이가 입궐해 처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 이렇게 금상과의 시간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 씁쓸히 아쉬움을 삼키는데 혜빈이 상기된 목소리로 뜻밖의 제안을 해온다.

“그러고 보니 저 앞이 안빈의 처소가 아닙니까? 그 댁 사가에서 들여온 감잎차가 꽤 훌륭하던데 이 기회에 전하께 한 잔 올리시지요.”

“보잘 것은 없으나 그리 하시겠사옵니까?”

내심 그 제안이 달가웠던 안빈은 조심스레 임금께 의중부터 여쭈었다.

“되었소,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도 예가 아닌 것을. 곧 경연에 들 시간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러하시면 경연을 마치실 때쯤, 전하와 대신들을 위해 차를 올리겠나이다.”

“허허. 고맙소, 안빈. 그대의 마음 씀씀이가 언제나 고맙구려.”

반걸음 뒤에 있던 안빈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던 임금은 심장이 쿵 떨어지며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 앞, 진분홍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배롱나무 아래에 그리운 그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바로 그때처럼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찰나의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던 임금은 빠르게 중심을 잡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 사람이 아니다. 이미 죽은 사람인 것을. 배롱나무가 아닌, 매화나무였던 것을…….’

반 발짝 앞서가던 금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혜빈과 안빈도 멈춰 서서 금상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 보았다. 그곳에는 한 떨기 꽃처럼 순수하고 청순한 자태의 보희가 시름에 잠긴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혜빈은 싸늘한 눈매로 보희를 쏘아보았지만 안빈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통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금상의 용안을 훔쳐보았다.

‘효경왕후마마를 떠올리십니까?’

안빈이 금상을 처음 뵈었던 건 소녀 시절, 어머니와 불공을 드리러 갔던 어느 절의 뒷마당에서였다. 당시 한 훤칠한 사내가 매화나무 꽃잎을 손수건에 정성껏 주워 담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 걸음을 멈추고 숨어서 몰래 지켜보았던 것이다.

[대군마님,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았습니다.]

[미안하이. 이곳의 매화꽃이 유난히 탐스러워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네.]

[부부인 마님께 가져다 드리고자 하십니까?]

[우리 집 후원의 매화는 아직 꽃망울을 틔우지 못하였거든.]

쑥스럽게 웃으며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어린 안빈은 넋을 놓고 오래도록 훔쳐보았다. 자신의 아비는 지극히 권위적인데다 안사람과 여식들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해대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사내란 여인 위에 군림하는 무섭고 가까이하기 싫은 존재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저만의 착각이었다. 이 세상에 저토록 지어미를 아껴주는 사내가 존재하고 있었을 줄이야. 대군의 다정다감함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저런 분의 아내가 되고 싶다.’

안빈은 그런 소망을 품으며 여인으로 성장했고, 대군은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생전 말조차 걸어주지 않았던 아비가 처음으로 별채를 찾아 그녀의 심장에 새로운 빛을 안겨 주었다.

[궐로 들어가고 싶지 않느냐? 너를 금상의 여인으로 만들어 주마.]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하였던가. 그렇게 그녀는 가슴 속에 몰래 담아 두었던 님의 내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소의가 되어 처소를 배정받고, 그분이 찾아와주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루가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삼 년이 흘러갔다. 그리고 오래 전, 매화꽃을 선사 받았을 중전마마의 빈자리를 혜빈이 모두 차지해버렸음을 처참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혜빈에 비해 외모도 집안도 뒤쳐졌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이란 시간이 더 흐르고,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며 슬픔에 빠져있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비록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고는 있었지만 님께서 찾아와준 것이다. 궐 밖에서 보았던 따스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한 기운만 뻗치는 님일지라도 훨훨 날아갈 듯 온 세상을 전부 얻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몸과 마음을,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전부 다 그에게 내어주었다.

[부인……]

깊이 잠든 그에게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호칭을 듣는 순간, 안빈은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하지만 뒤이어 금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또 다른 한 마디는 감동의 눈물을 절망의 눈물로 바꾸어 놓았다.

[윤영 낭자……]

서윤영, 중전의 명자였다. 님의 마음을 전부 차지하고 있던 이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혜빈이 아니라, 궐 밖 사가로 쫓겨난 중전이었던 것이다. 안빈은 그 순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결코 그의 마음을 단 한 자락도 얻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보희를 바라보는 금상의 고통스러운 눈빛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님께서는 자신의 진짜 아내를 결코 보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죽어서도 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오른다.

정한군의 사저를 찾은 서율은 후원에서 하국(夏菊)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왔다가 차 한 잔만 마시고 돌아가려 했으나 정한군이 극구 붙잡은 것이다. 작년에 청국에서 들여온 귀한 여름국화가 꽃을 피웠으니 꼭 한 번 보여주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꽃잎의 안쪽 부분은 샛노랗고, 바깥쪽으로는 새하얀 빛을 내는 국화가 진귀하고도 아결하였다. 한데 정한군께서는 고새 어디로 사라지셨단 말인가.

혼자서 하국을 실컷 구경한 서율은 후원을 나서 사랑채로 향하는데 점점 더 가까워지는 여러 명의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군부인이 주관하는 모임을 찾아온 손님일 것이다. 안채의 손님이라면 대가댁 새댁이나 규수일 터, 마주친 여인이 무안해하지 않을까 서율은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그때, 불시에 느껴지는 암향(暗香)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오래 전, 해진 옷을 입고 있던 어린 공주에게서 맡았던 바로 그 향.

‘공주마마?’

바람결에 은은히 실려 오는 그윽한 매화향이 저절로 공주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분. 서율은 생각을 빠르게 지워버린다.

‘한여름에 무슨 매화향이 난다는 것이냐.’

저만치 곱디고운 여인들의 치맛자락이 언뜻 보이고 있었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서율은 속히 걸음을 옮기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도망을 가십니까?”

잘못 들은 것인가. 허공 위로 파생되는 울림은 분명 공주의 목소리였다. 놀란 마음에 돌아보니 못마땅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를 주시하고 있는 공주가 보였다. 설마 진짜로 계셨을 줄이야. 잠깐 황당했던 서율이 곧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리자 은명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분출하며 가까이 다가섰다.

“어찌 그리 저만 보면 도망부터 치십니까? 허둥대는 스승님의 뒷모습이 한 마리의 아둔한 오리 같아 보이십니다.”

공주의 쏴붙이는 소리에 서율은 우지끈, 머리가 깨질 듯하였다. 지난 두 달, 총 일곱 번의 강론을 거치며 그는 언제나 보람과 피로를 동시에 느껴야 했다. 영명하신 공주께서 지식을 잘 받아들이시는 게 기특하기도 했지만 중간 중간 쏟아내시는 독설은 피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기운을 쏙 빼먹는 듯한 저 따가운 눈빛. 그 눈빛을 참다못해 발이라도 내려달라 아뢰었지만 답답하다는 이유로 그의 청은 간단히 묵살당해 버렸다. 결국 매 강론 때마다 면전에서 쓰디 쓴 시선과 독언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런 곳까지 와서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오리가 아둔한 미물로 알려져 있는 건 사실입니다. 허나 위협을 느끼면 기발한 묘안으로 적을 따돌릴 만큼 영민한 구석도 지니고 있지요.”

“그건,”

“또한, 신(臣)은 고의로 마마를 피하려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기척이 들리기에 안채의 손님인가 하여 자리를 피해주고자 했을 뿐. 속단은 금물입니다.”

양측의 시선이 한데로 엉겨 붙는다. 공주의 말을 끊어버린 서율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마주보았다. 어찌하여 매번 말에 가시가 박혀있단 말인가. 이렇게 된 바에 오늘은 하나하나 물고 늘어져 저 고약한 버릇을 확실히 고쳐주고 말 것이다.

“섬기고 존경해야 마땅할 스승께 아둔한 오리라 칭하시다니요.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의당 반겨 주어야 할 제자를 보고도 모른 척 도망을 가시니 스승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도망을 간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말장난을……”

“마마!”

단단히 작정한 서율이 공주께 주의를 드리려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던 정한군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끼어들었다.

“오셨으면 저부터 찾으셔야지 예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어, 자네는 바쁘다 하지 않았는가?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네, 미안하이. 얼른 가서 일 보시게.”

은명의 눈동자가 티 안 나게 회동그래졌다. 김서율이 사저에 와 있으니 얼른 오라며 사람을 보내 재촉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돌아가라니? 이제 겨우 만났는데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공주가 당황하는 사이 서율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고단한 싸움을 이어가느니 기회가 생겼을 때 피해버리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였다.

“공주마마, 그럼 저는 다음 강론 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지끈거리던 두통도 말끔히 나은 기분이었다. 서율은 속전속결로 인사를 올리더니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린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은명은 황당한 얼굴로 정한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혹여 궁녀들이 보는 데서 공주가 폭발이라도 할까 싶어 정한군은 냉큼 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기가 찬 은명은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고 조금은 씩씩거리며 이복오라비의 뒤를 쫓았다.

‘공주마마와 저토록 가까워 보이시다니…….’

후원 근처의 한 귀퉁이, 멀어지는 공주의 뒷모습을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고운 자태의 여인이 있었다. 김서율과 공주의 말씨름을 초반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그녀, 보희. 처음에는 그와의 시간을 놓쳐버린 게 속상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얼마 전, 안빈을 통해 김서율과의 혼사문제를 혜빈께 부탁드리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안빈께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실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내보이지 않으셨던 것이다. 어떡해야 하나,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데 서율의 모친께서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 이번 군부인이 주최하는 모임 날, 그를 정한군의 사저로 보내줄 테니 후원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이었다.

사랑채에서 기별을 주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깜깜무소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와 봤더니 그는 이미 공주와 함께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고 두 사람의 대화는 상당히 전투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되레 친밀해 보이는 건 대체 무슨 조화속인지.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벗들처럼 허물없이 주고받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서율 오라버니께서 저토록 화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었다. 보희는 단 한 번도 그가 평정심을 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문득 궐에서 보았던 맑고 총기 가득했던 얼굴의 공주가 떠오른다. 눈이 마주쳤던 그분이 공주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소문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분을 자꾸 가까이서 뵈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차라리 소문처럼 성정이 포악하고 사나운 분이셨으면…….’

공주라는 존재가 보희의 마음을 점점 더 강하게 압박해 오고 있었다.

사랑채의 상석을 당당히 차지한 은명은 눈에 힘을 주고 이복 오라비를 쏘아보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한군은 태평스레 은명이 가져온 매화차를 시음하는 중이다. 생기가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매화차의 매력에 홀딱 빠져드는 순간, 은명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서둘러라 재촉할 땐 언제고 어찌 그냥 돌려보내셨습니까? 화경궁 밖에서 스승님을 뵙기가 어디 그리 쉬운 줄 아십니까?”

“아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십니까? 정경부인께서 이판 댁 여식과 지평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공주마마를 슬쩍 밀어 넣었던 것이란 말입니다.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지는 못할망정 어찌 그리 심술을 부리셨습니까? 정녕 김 지평을 의빈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신 겁니까?”

“물론입니다. 탐이 난다 하지 않았습니까! 좋아하니까 관심이 가서 툭툭 건드리는 것이지요.”

말이나 못하면. 공주께서 여덟 살 사내아이라도 되신단 말인가. 정한군은 이제 헛웃음만 터지는데 공주가 궁금증을 가득 담고 질문을 해온다.

“이판 댁과의 혼담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까?”

“글쎄요…….”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더 애가 타는 법. 서율의 거절로 의혼이 성립되지 않았지만 정한군은 부러 모르는 척하였다. 바깥세상과의 소통이 전무(全無)한 분이시니 자신이 아니면 당장에 물을 곳도 없으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주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통 관심을 내보이지 않으십니다. 제가 그리도 매력이 없는 것입니까?”

“진심을 다하지 않으셨으니 넘어올 리 만무하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어찌하시나 궁금하여 일전에 한번 지평과 함께 계시는 모습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건 뭐, 사내를 홀리려는 것인지, 시비를 걸려는 것인지……. 그렇게 가시를 세우고 계시는데 어느 사내가 좋다 하겠습니까? 반해서 넘어오긴 글렀습니다.”

“사내는 다른 거 상관없이 무조건 어여쁘면 된다 하시더니 결국 제가 못났다는 것이로군요.”

은명이 새치름해서 툴툴거린다.

“마마의 외모는 훌륭하십니다. 허나 김 지평한테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스승님은 여인의 외모를 안 본다는 말씀이십니까?”

“여인의 외모를 안 보는 사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내의 눈이 아리따운 여인에게로 향하는 건 대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일이지요.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뛰어난 외모로도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 마마께서는 그 성정이 옥안을 덮어버렸습니다.”

정한군의 솔직하고도 신랄한 평가에 은명은 할 말을 잃는다. 그동안 김서율에게 얼마나 과도하게 퍼부어댔던가. 모진 소리에 마음이 상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해서요?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지요.”

“……되었습니다.”

조금 고민하는 듯 보이던 은명이 어느 순간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잘라 말했다. 이럴 때는 보통 안달복달 무슨 방법이냐 물어오는 게 정상이거늘. 예상을 빗나간 공주의 반응에 정한군은 도리어 어안이 벙벙해져 묻는다.

“되었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고백부터 하겠습니다.”

“예에?”

혹시 잘못들은 게 아닐까. 어찌 저런 생각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여인에 관해서라면 그 속까지 모두 꿰뚫고 있다 호언장담하던 정한군이었지만 공주의 속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말고의 차원을 떠나서 일단은 저 어이없는 결심부터 말려야 한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여인이 먼저 고백을 하겠다니요!”

“제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리고, 끈기로 그를 가지겠습니다.”

“마마, 김서율이 겁먹겠습니다! 그런다고 사내들이 좋아할 줄 아십니까? 그것도 마음에 있어야 끌리는 것입니다.”

“유혹하기는 글렀습니다. 나는 소질이 없고,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있다간 영영 기회조차 얻지 못하겠지요. 차라리 제가 그를 좋아한다, 여기게 하여 마음을 뒤흔들겠습니다.”

정한군이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은명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투지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싶었다.

“금강석이라…… 이 귀한 걸 어찌 구했을꼬.”

“받아주십시오.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허허허.”

침묵이 이어진다. 아마도 감상 중이실 테지. 의천 상단 한양지점 도방, 양병수는 오늘도 촘촘히 짜인 발을 통해 언뜻 비추는 형상을 더 자세히 보고자 은밀히 기를 써본다. 일명 벌리 어르신. 십여 년을 모셨지만 그 속을 짐작하기는커녕 얼굴조차 마주한 적이 없었다. 지금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눈을 가린 채 저들이 실어다 주는 대로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 그저 이 댁이 벌리 어디쯤 위치해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르신과 처음으로 연을 맺은 건 지금으로부터 약 십여 년 전. 매형이었던 상단 대방의 명으로 한양에 막 분점을 내고 어찌 키워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 댁의 가신(家臣)이 찾아와 함께하자며 유혹적인 제안을 해왔다. 첫 만남에 권력의 냄새를 맡은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저들이 내민 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성공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없을까. 그의 예감은 적중하였다. 벌리 어르신을 등에 업은 그날 이후, 상단은 단시간 내에 한양에 뿌리를 내렸고 분점의 규모 또한 날로 번창시킬 수 있었다.

상단 내 그의 위상이 함께 드높아진 것은 당연지사. 그의 손아귀 아래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후사가 없었던 매형의 후계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을 정도로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다. 자신감은 쑥쑥 커졌고 양병수는 자신이 차기 대방이 될 것이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느 날, 매형이 어딘가에서 사내아이를 하나 주워와 양자로 들이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매형은 그 아이를 상단의 후계자로 지목했고, 작년에 그는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가 대방 자리를 이어받는 걸 씁쓸히 지켜보아야 했다. 얼마 전 그 어린놈이 기별도 없이 물건을 직접 들고 나타나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아직까지 도성에 붙어있는 그놈이 꼴도 보기 싫었지만 이 기회에 그를 없애고 상단을 합법적으로 장악하는 것 또한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어르신께 도움을 받는다면 일처리는 훨씬 더 수월하리라. 속으로 한참 손익계산을 하고 있는데 구경을 마쳤는지 발 너머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걸 보면 좋아하시겠군. 그래, 요즘 청월관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너무 노출이 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아무 객이나 받지 않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만.”

“그냥 하던 대로 놔두시게. 어차피 재력이 든든한 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감추고 은밀해질수록 의심은 더욱 커지는 법, 그저 조금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곳으로만 생각하게 만드시게. 그 어떠한 의심도 키워서는 아니 될 것이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금강석도 바쳤겠다, 이제 목숨 하나를 부탁드릴 차례였다.

울긋불긋 하늘에 꽃노을이 곱게 물드는 어슬녘. 은명이 정한군의 사저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의 지밀상궁이었던 김 상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엄청난 비밀을 함께 공유하고 외숙일가의 소식을 끝까지 수소문하여 알려준 고마운 사람. 어머니의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기에 은명은 반가움에 목이 메어오기까지 하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무심한 사람 같으니, 왜 그동안 소식 한번 전하지 않았던 것이야. 아직도 절에서 지내고 있는가?”

“예, 공주 아기씨. 좌정하시옵소서.”

자리에 앉은 은명은 어느덧 머리에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반백의 김 상궁을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한 얼굴. 병세가 그녀의 생명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는 것이리라.

‘자네도 얼마 남지 않은 게로군…….’

노(老)상궁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은명이 울컥하였지만 꾹 참아내며 그동안 품고 있던 생각을 넌지시 던져 보았다.

“내가 이제 화경궁으로 돌아왔으니 자네도 이곳에서 나와 함께 지내면 좋으련만. 어떤가, 예서 나와 함께 살지 않겠는가?”

“말씀만으로도 그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렇지만 소인은 절이 좋사옵니다. 하룻밤만 머물고 다시 사찰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십시오. 그곳에서 효경왕후마마의 극락왕생을 빌며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김 상궁은 맞잡고 있는 공주의 손을 친할머니처럼 다정히 토닥여주더니 뒤쪽에서 보자기에 싸인 묵직한 물건 하나를 앞으로 내놓았다.

“무엇인가?”

“승하하신 중전마마께서 공주 아기씨 앞으로 남기신 것이옵니다.”

“어머니께서?”

깜짝 놀란 은명은 떨리는 손으로 모란꽃이 수놓아진 금빛의 비단 보자기를 풀어보았다. 잠시 후, 검은 바탕에 은빛 매화꽃들이 우아하게 떠있는 아름다운 보석함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기억하시옵니까? 중전마마께오서 가장 아끼시던 함입니다. 마마께서 길례를 올리시면 전해드리라 하셨는데 소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이리 일찍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끼시던 그 은가락지도 이 안에 있는가?”

“그 옆에 있는 주머니에 함의 열쇠가 들어 있사옵니다.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소인도 모르겠나이다.”

“고맙네, 김 상궁. 정말 고맙네!”

기운이 쇠할 데로 쇠한 노(老)상궁은 모시던 분의 마지막 명을 받들고자 남아있는 기운을 전부 끌어모아 이곳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이 김 상궁과 얼굴을 맞대는 마지막이 될 것임을 은명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래 살아 주시게…….’

눈가가 점점 붉어지던 은명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김 상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외로웠던 어머니와 어린 공주의 곁을 한결같이 든든하게 지켜준 사람. 김 상궁을 보내는 건 은명으로선 또 하나의 가족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노(老)상궁은 주름이 진 손으로 귀한 상전이자 손녀딸이나 다름없는 은명의 등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스하고도 편안한 저녁이었다.

딸깍-. 어둠이 내려앉아 모두가 잠들어 있는 깊은 밤. 자리옷을 입고 침수 준비를 끝낸 은명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래도록 잠겨있던 작은 자물쇠를 풀어내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남긴 개인적인 유품. 보석함을 열자 그 옛날 어머니의 손가락에서, 쪽진 머리 위에서, 가슴팍에서 반짝이던 각양각색의 장신구들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진주와 홍보석, 청보석, 금강석, 호박, 산호, 슬슬, 등등.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을 한껏 뿜어내며 가지런히 배열된 모습이 찬란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딱 하나, 어머니께서 외조모로부터 물려받으셨다는 은가락지만은 보이지가 않았다.

‘어머니께서 가져가신 것일까?’

워낙에 아끼시던 것이니 그대로 끼고 가셨을 지도. 은명은 은가락지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어머니께서 남기신 것들을 하나하나 직접 해보기 시작했다. 그 옛날 헐거웠던 반지들이 이제는 손수 재어 맞춘 듯 손가락에 쏙쏙 들어맞는다.

신기한 마음에 보석함을 칸칸이 모다 꺼내놓고 한참을 이것저것 해보는데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수평을 이루어야 할 마지막 칸의 안쪽 받침이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최고의 장인이 만든 함에 결함이 있을 리는 없을 터. 자세히 살펴보니 고정된 것이라 여겼던 마지막 칸의 받침대 또한 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대로 끼워 맞춰야겠단 생각에 받침대를 빼려는데 무척이나 빡빡한 게 좀처럼 빠지지가 않는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얼마나 낑낑거렸을까. 갑자기 탁 소리와 함께 받침대가 빠져나왔다. 이어서 그 안을 들여다본 은명은 놀라움으로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진다.

‘서찰이다!’

맨 아래쪽에 서찰이 하나 들어있었는데 그 끄트머리가 받침대 사이에 끼어 그토록 빡빡했던 것이다. 웬 서찰일까. 매화 꽃물을 먹인 설화죽청지인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보내려던 것임이 틀림없었다. 오라버니께 보낼 안부서찰을 이곳에 넣어놨을 수도 있기에 은명은 재빨리 꺼내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기억하십니까, 단조로운 일상 속에 갇혀있던 저에게 담 너머 세상, 신기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조선팔도와 압록강 너머의 청나라, 머나 먼 이양인들의 설화를 들으며 저는 무척이나 설레곤 하였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시절이 사무치도록 그립습니다.

지금의 저는 꿈도, 희망도, 향기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숨이 막힙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도 구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신께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드린 저는 그럴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겠지요.

하찮은 이 한 목숨 내어 놓는다 하여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 알면서도 얽히고설킨 복잡한 고리를 끊어낼 방도가 전혀 없기에 이렇게밖에 사죄드릴 수 없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하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이 경멸하는 사람만큼은 되고 싶지 않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리고 답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서 다시 한 번 꿈을 꾸도록 하겠습니다.

산들바람이 되어 백성들이 넘실대는 저잣거리를 빙빙 날아보겠습니다. 바닷바람이 되어 머나 먼 이국땅에도 훨훨 날아가 보겠습니다. 솔솔바람이 되어 당신의 땀과 당신의 눈물을 또한 닦아드리겠습니다. 바람이 불면 마음 속 깊은 곳에 모아두신 아픔을 툭툭 털어내어 주십시오. 당신의 상처와 고통을 전부 받아내는 바람이 되겠습니다.

부디 숨 막히는 어둠을 이겨내시고, 보잘것없는 소녀에게도 꿈을 주시던 그때의 그 빛나던 모습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당신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당신만의 그윽한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아십니까, 당신의 향기가 언제나 저를 아프게 하였습니다.

아니,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서찰을 들고 있는 은명의 두 손은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어머니께서 자결을 하셨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의 전부였던 일곱 살 어린 딸을 버려두고 매정하게 홀로 가버리실 분은 절대로 아니었다. 궐에 다녀올 때까지 적적해도 참고 기다리겠노라 하지 않으셨던가. 하지만 배웅을 하시며 어머니가 보였던 서글픈 미소가 선연히 떠올라 은명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면서도 눈가에는 분명 깊은 고통을 간직하고 계셨다. 설마…….

“아니야……. 아니야!”

은명은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당혜도 신지 못하고 김 상궁이 머물고 있는 방을 향해 허겁지겁 두 다리를 움직였다. 깜깜한 밤, 그곳까지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달려갔는지 의식조차 없었다. 시꺼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뛰어 들어 놀라서 상체를 일으키는 김 상궁에게 작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사실대로 말해줘야 할 것이다. 나는 진실을 알아야겠다!”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어찌 이리 떨고 계시는지요?”

한밤중에 느닷없이 뛰어 들어온 공주가 온몸을 떨며 숨죽여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잠이 홀딱 깬 김 상궁은 무슨 일인가 싶어 사지가 얼어붙고 가슴이 쿵쾅거린다.

“어머니께서는 어찌 돌아가셨느냐? 어머니의 마지막을 자세히 말해 보아라.”

“중전마마께서는 침수에 드셨다가 아침에 깨어나지 못하셨…….”

“거짓말! 거짓말이야! 자네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야.”

공주의 말에 이번에는 김 상궁이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어댔다.

“마, 마마……”

“왜 거짓을 말하느냐? 대체 어머니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흑…… 마마, 아니옵니다. 중전마마께서는 침수에 드셨다 그대로 승하하셨나이다.”

“함 속에 내게 남긴 서찰이 들어있었다. 이래도 계속 거짓을 말할 참이냐?”

“서, 서찰이 있었사옵니까? 마마……”

김 상궁은 결국 은명의 눈앞에 죄인처럼 바짝 엎드리더니 숨죽여 오열을 쏟아내었다.

“소인을,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사실대로 말해보아라. ……나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한 몸처럼 지내던 어머니와 나였다. 서로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한, 세상에 둘도 없는 모녀지간이었단 말이다.”

한참을 울던 김 상궁이 몸을 일으켰을 땐 얼굴이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은 깜깜한 방, 엄청난 진실을 간직해온 초로의 상궁이 달빛에 의지하여 눈앞의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 아기씨께서 궐로 들어가신 그 다음 날 아침, 중전마마께서는 소제를 하신다며 갑자기 주변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한밤중에 소인을 불러 보석함을 부탁하셨을 땐 아무래도 이상하였습니다. 평소에 알던 중전마마가 아니셨습니다. 하여 깊은 밤중에 몰래 들어가 살펴 뵈었더니 평안하시더이다. 한데 새벽에 다시 들어가 보니…… 스스로 목을 매시어……”

은명은 눈앞이 아득해지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누가, 누가 또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전하께서도 아시느냐? 오라버니는? 오라버니께서도 알고 계시느냐?”

“오직 전하와 어의영감, 그리고 이 사람만 알고 있는 일이옵니다.”

“어머니께서…… 왜 그리 모질게 가셨단 말이냐?”

“소인이 그 깊은 심중을 어찌 다 헤아리겠사옵니까. 다만 사가의 일로 오랫동안 속병을 앓으셨으니 그 슬픔을 감당치 못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옵니다. 마마의 괴로움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켜드리지 못한 이 몹쓸 노인네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시오소서……”

은명은 또다시 엎어져 눈물을 쏟아내는 김 상궁을 뒤로 하고 넋이 빠진 얼굴로 방을 나와 버렸다. 그대로 더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땅바닥의 작은 돌들이 맨발을 찔러와 아플 법도 하지만 은명은 무감각한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니…….’

새롭게 알게 된 끔찍한 진실을 은명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서찰 또한 그 내용으로 보았을 때 전하께 남긴 글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께 정인이 따로 있으셨던 것일까? 머릿속이 어질어질하여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그 옛날, 어머니가 했던 말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은명아, 궐에 다녀오지 않으련?]

[궐에 가면 어린 동생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 궐에서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은명이를 잘 지켜주어야 하느니라.]

[그래, 아가야, 조심히 잘 다녀오너라.]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분출되어 두 뺨을 적시고 가슴 속까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것은 회한의 눈물이었다.

‘목숨을 버리시려 나를 보내신 거로구나. 그날 오라버니를 따라 나서지만 않았어도 그리 가시지는 않았을 것을…….’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한 어느 오후. 여린 하늘빛 도포에 짙은 감청색 쾌자를 차려 입은 서율이 집을 나서 화경궁으로 향했다. 공주가 병석에 누운 지 오늘로 벌써 이레. 궐에서 어의와 의녀들이 줄줄이 나오고 세자도 그새 두 번이나 다녀갔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서율도 더 이상 모르는 척 방관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오늘 찾아뵙겠다, 미리 기별을 놓고 길을 나선 것이다.

집 근처 모퉁이를 막 돌았을까, 어디선가 불쑥 한 여인이 나타나 서율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갑작스러운 여인의 등장에 움찔했던 서율은 앞에 선 여인이 장옷을 뒤집어 쓴 보희임을 알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희야!”

“오라버니,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희의 표정이 어딘지 절박해 보였다. 그러나 화경궁은 아무 때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시각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지금은 곤란하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다음에 하는 것이 좋겠다.”

“다녀오십시오. 월류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보희의 예상대로 월류지란 말에 서율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곳이 그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곳인지 잘 알기에 보희는 부러 월류지를 택했던 것이다.

“부탁입니다, 오라버니. 오늘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한 시진 정도 걸릴 것이다.”

부탁이 하도 간절해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던 서율이 마지못해 수락을 하자, 보희는 얼굴이 환해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천천히 볼 일 다 보고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분홍빛 치마에 새하얀 저고리를 받쳐 입은 은명은 안채의 화단 앞에 서서 무심히도 높고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되셨습니까? 저에게로 날아와 이 눈물도 닦아주시렵니까? 어린 딸을 혼자 두고 가셨습니다. 소녀를 버리신 겁니다. ……그래도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동시에 쏟아내자 이미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괴어오른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그곳에 김서율이 있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정갈하고 반듯한 차림새가 멋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으셨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서율은 공주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윈 얼굴과 많이 울어 불그름히 충혈된 두 눈. 그리고 그런 눈에는 아직까지도 서러움의 눈물이 그득히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한동안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그는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옥체가 편치 않으신 겁니까, 아니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예리한 질문에 은명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젓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서버린다. 답하기 곤란할 때 공주가 취하는 특유의 행동.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입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기에 서율은 질문을 삼가고 공주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옆에서 찬찬히 들여다보니 얼굴 위로 허우룩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쉴 새 없이 떠다니는 게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듯도 하였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바람을 볼 수 있을까 하여…….”

“예?”

‘제 어머니는 친정이 무너지고, 지아비를 다른 이에게 빼앗긴 상황에서도 마음속에 다른 정인을 품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은애하는 정인도, 당신 자신도, 모든 것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요. 그분이…… 바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공주가 허공을 응시하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자 지켜보는 서율도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온다. 무엇이 그리 힘드십니까, 왜 항상 모든 것을 혼자서만 짊어지려 하는 것입니까. 수많은 말들이 혀끝에서 빙빙 맴돌았지만 서율은 끝끝내 그 모든 여운을 꿀꺽 삼켜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을 더 이상은 넘고 싶지 않았다.

“물러나 있겠습니다.”

하여 차선책으로 자리를 피해주려 했지만 홀로 있는 공주가 어쩐지 쓸쓸해 보여 쉬이 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같이 있어 주십시오. 저를 홀로 버려두지 마십시오.’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은명은 그가 이대로 있어주길 바랐다. 그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서율은 심란한 얼굴로 잠시간 고민을 하더니 아무런 말없이 그대로 머물러 주었다. 은명이 바라보는 허공을 함께 바라봐 주며.

“바람은 보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의 말대로 바람은 온몸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귀밑머리에서, 옷고름 끄트머리에서, 곱디고운 치맛자락에서. 산들산들, 시원하고 부드럽게.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삭막한 이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건만 그가 와주니 안심이 되고 든든하기까지 하였다. 쿵쿵쿵,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해댄다. 다음 순간, 은명의 머릿속에 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내가 지금 김서율에게 의지하고 있는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당황한 은명은 그에게서 등을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명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부터 진정시킨다. 그에게 의지했던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일로 마음이 약해져 누구든 곁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뭐하는 것이냐?”

그때,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느 틈에 세자와 정한군이 와 있었던 것이다.

“걱정이 되어 오신 스승님께 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냐?”

가까이 다가온 세자가 이상스러운 듯 묻자 그새 평정을 되찾은 은명은 자연스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지럼증이 일어 정신을 수습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게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왜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얼른 들어가십시오.”

정한군이 혀를 끌끌 차며 은명을 부축해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는 서율을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문안을 왔는가?”

“예, 저하.”

“그동안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기에 괘씸해하던 차였거늘.”

“송구하옵니다.”

“농일세. 어쨌든 잘 되었네. 그렇잖아도 물어볼 게 있어 부르려 하였거든. 일단 들어가세.”

세자가 서율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곧바로 공주의 뒤를 따랐다. 저하께서는 분명 현재의 수사상황이 궁금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는 일, 보희와의 약조는 어찌한단 말인가. 서율의 얼굴 위로 난감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앞에 다가온 시연의 몸종아이를 쳐다보았다. 한 시진이 지나기를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던가. 급한 마음에 약조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월류지로 나와 있었다. 한데 달래 저 아이가 나와 있을 줄이야.

“네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와 있는 것이냐?”

“저희 작은 도련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오늘 약조를 못 지킬 것 같으니 전할 말씀을 서찰로 보내 달라 하십니다.”

“뭐?”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오늘 보희가 했던 행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천 번 생각하고 수만 번 망설인 끝에 간신히 그의 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크고 절실하였기 때문에. 그런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대로 기회를 날려버려야 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급한 용무가 있다 하시더니 많이 바쁘신 게로구나. 나는 괜찮다. 얼마든지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달래야, 오라버니께 천천히 일 보시고 여기로 오시라 전해주지 않으련?”

“소인도 도련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아직 공주방(公主房)에 계시는 걸요.”

“공주방? 허면 급할 용무라는 게 화경궁에 볼일이 있었던 것이냐?”

“자세한 건 소인도 잘 모릅니다. 공주방에서 온 사람이 시연 아씨 앞으로 도련님의 서찰을 전달했고, 소인은 아씨의 심부름을 온 것입니다.”

보희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게 눈앞이 어질어질하였다. 단순히 공주 때문에 자신과의 약조를 져버릴 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셨을 때에는 분명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터.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가슴 속에 서운함이 빠르게 스며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왜 이토록 어긋나기만 하는 것인지. 속상한 마음에 두 눈과 코끝이 다 시큰시큰 거린다. 눈부시도록 환하고 아름다운 여름 햇살이 서럽기만 한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흔들리는 평교자 위에 몸을 실은 이판은 안빈의 부친인 우참찬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전하께서 진정 우리 보희를 마음에 두셨단 말입니까?]

[따로 말씀이 있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허나 그날 경연에 드셨을 때의 모습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살펴보았을 때 금상께서 심상치 않으신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

[대감, 이것은 기회일수도 있습니다. 보희 그 아이가 중궁에 오르면 이판께서는 국구가 되시는 겁니다. 좌상과 우상 못지않은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윤씨 문중에 이보다 더 큰 광영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기가 복잡해진 이판은 크게 한숨을 내쉰다. 금상께서 따로 언질을 내리신 것도 아니었으니 따지고 보면 깊이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딸아이의 평범한 행복을 바란다면 쏟아지는 혼담 중, 제일 잘난 명문가의 자제를 택해 혼사를 성사시키면 그만일 뿐. 문제는 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판의 사적인 야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있었다.

“국구라…….”

딩, 딩, 딩-

현법사를 찾은 은명은 홀로이 높은 언덕에 올라 탁 트인 산수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은은하게 퍼지는 처마 끝 풍경소리와 법당에서 번져 나오는 옅은 향내는 언제나 은명의 마음을 고요히 다독여주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음 속 격랑이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홉 해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누구에게 무슨 용서를 구하고자 하십니까? ……누구입니까, 누구에게 저 서찰을 남기셨습니까? 어머니께서 다른 이를 심중에 품고 계셨다니요!’

줄줄이 외울 만큼 서찰을 읽고 또 읽어봤지만 상대가 전하가 아니라는 것 외엔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외가 식구들이 전부 떼죽음을 당한 지금, 이 엄청난 일을 누구에게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어머니는 항상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뿐 주위에 사내라고는 전하와 아들밖에 없으셨던 분이다.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는데 뒤에서 바스락, 바스락,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따르지 말라 일렀거늘! 극도로 예민해진 은명이 차가운 빛을 내며 홱 돌아보다가 그대로 흠칫 동작을 멈춰버리고 만다.

저 앞에 웬 사대부 차림의 중년 남성이 갓도 쓰지 않은 채 어딘가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었다. 호기심을 가득 안은 개구진 표정,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이름 모를 들꽃 위에 붙어있던 작은 고추잠자리였다. 사내의 움직임이 어설펐는지 잠자리는 휘익 날아가 버린다. 놓쳐버린 게 아쉬워 잠시 울먹거리던 사내는 어느 순간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제가 잠자리라도 되는 듯 양팔을 옆으로 팔랑팔랑 휘저으며. 하늘 위로 수십 마리의 잠자리가 떠다니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외관은 사오십 대 중년이었으나 하는 짓은 예닐곱 살 어린아이라.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멍해진 은명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는데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 외침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숙부님! ……숙부님!”

여러 명의 소리들 중 김서율의 목소리가 은명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환청이 들리는 것인가? ……아니다, 정말로 그가 나타난 것이다. 저 멀리, 유백색 도포에 짙은 보랏빛 쾌자를 말쑥하게 차려 입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는 분명 김서율이었다. 그 옆으로 치경과 좌상 댁 종으로 보이는 이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를 확인하자마자 은명은 순식간에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뛰어올랐다. 얼굴은 모닥불을 담아 부은 듯 화끈화끈 불타오른다.

‘왜 또 이러는 것이냐? 어찌하여 매번 이러는 것이야!’

정신이 아슴아슴 거렸지만 시선은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해맑게 뛰어다니는 사내를 지켜보며 김서율이 저 앞에서 배시시 웃어 보인다. 그 순간, 은명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눈물도 츠럼츠럼 솟아오른다.

‘벗어나지 못한 것이냐? 아직도 보령에 머무르던 아홉 살 어린아이인 것이냐? ……아니다! 그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자의 아들일 뿐.’

눈물이 주르륵 떨어지는데 타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율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은명도 등을 돌려 옆으로 나 있는 산길로 정신없이 뛰어오른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감정이 무너진 은명은 무턱대고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저 앞으로 절벽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커먼 매지구름이 어언간 하늘을 뒤덮어 기괴한 분위기가 장관이었다. 힘이 빠진 은명은 뭐에 홀린 듯 끝을 향해 걸어가는데 누군가 팔을 낚아채 거칠게 돌려세웠다. 은명의 몸이 휙 돌아가자 벌겋게 상기된 김서율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표정을 보아하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곳은 위험지역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는지 전해 듣지 못하셨습니까? 위험천만한 산길을 그런 차림으로 뛰어오르시다니요!”

산세가 워낙 험준해 추락사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숙부가 혹시라도 이 길로 들어섰을까 염려되어 쫓아왔건만 공주께서 계셨을 줄이야. 산길로 뛰어드는 모습을 목격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무도 몰랐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궁녀들과 무사들은 어디에 떼어놓으셨습니까? 어찌 이리 무모하신 겁니까?”

“놓아주십시오.”

서율은 자신이 감히 공주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송구합니다.”

그는 황급히 물러서며 사죄했지만 은명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 아직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것이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알아서 감정을 다스릴 것인데 왜 가만 놔두지를 않는 것인지. 그런데 그때, 난데없는 기억 하나가 은명의 머릿속을 관통하였다.

[제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리고, 끈기로 그를 가지겠습니다.]

기회인 것인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 단 둘만이 존재하고 있는 이곳. 백 번 천 번을 고백한다 해도 방해 받을 일은 절대로 없었다. 휘잉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을 타고 김서율만의 시원한 체취가 은명에게로 전해져 왔다. 보령 시전에서 그의 등에 업혔을 때 맡았던 그 상쾌한 내음.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 향을 맡으며 은명의 심장은 또다시 강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마, 어서 내려가셔야 합니다. 곧 비가 쏟아질 것입니다.”

서율의 목소리가 메아리쳤지만 은명은 이미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부정하고 억지를 부려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 김서율은 그런 존재인 것인가. 어머니가 떠나간 그 빈자리를 채워준 사람. 김대원의 핏줄만 아니었다면 그를 놔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사람이었다.’

감정이 격해져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져버린다. 그 순간, 은명은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김서율에게로 돌아섰다. 날씨 탓이었을까, 어머니에게서 받은 충격 때문일 수도 있었다.

“기억하십니까. 육 년 전, 겨우 열 살이 된 저를 버려두고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셨습니다.”

서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고가 정지된 은명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을 뿐.

“그 후에 스승님이 누구인지 들었고, 지워야 할 인연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우지 못하였습니다.”

“마마……”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웠습니다.”

“……”

“남루한 차림의 어린아이를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은명의 두 눈동자에 붉은 기가 여릿여릿 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들여다보던 서율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한 백성에게 선의를 베풀어야 할 조정 관리로서의 책임감이었습니다. 그 상대가 우연히 마마였을 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렸습니다. 제게는 특별한 분이십니다!”

그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공주가 이상하였다. 며칠 전, 문안 차 화경궁에 들렀을 때에도 공주는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 서율도 이제 그 연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왜 항상 모든 고민을 혼자서만 끌어안고 계십니까?”

“한 사람이……”

은명의 눈에서 아픔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고 법도에 따라서만 살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며칠 전 그날처럼 공주가 허공을 응시하며 눈물을 쏟아내자 서율도 울컥하여 물었다. 물론, 정확한 답을 들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눈을 감는 그 순간, 그분은 사무치도록 후회하고 또 후회하셨겠지요.”

‘어머니께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저는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겠습니다. 가문에도, 권력에도, 복잡한 정쟁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갈 것입니다.’

감정이 격해진 공주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삽시간에 평정을 되찾고 결연한 얼굴로 서율을 직시하였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후회를 남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갈 것입니다. 제 생애에 미련 같은 건 손톱만큼도 남기지 않겠습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노력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하여 저는, 지금부터 스승님을 향한 이 마음을 인정하고 감정대로 충실히 따라가 볼 생각입니다. 지울 수 없다면,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요.”

마치 전쟁을 선포하듯 마음을 고백한 공주는 적장의 장수를 대하듯 눈에 힘을 주고 서율을 바라보았다. 비무리가 머리 위에서 무거워지든 말든 두 남녀가 오롯이 서로만을 주시하고 있는데 번쩍, 섬광이 스쳐 지난다. 곧이어,

우르르 쾅쾅-

하늘이 쩍쩍 갈라지는 듯 요란한 뇌성이 온 천지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굵은 작달비가 투둑- 투두둑- 힘차게 떨어져 내린다. 얼굴 위로 따갑게 내리치는 빗물을 맞으며 은명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무슨 말을 하였단 말인가?’

자신이 했던 말들을 믿을 수가 없어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는데 서율이 손목을 거세게 잡아끌었다. 또 한 번의 달음박질이 시작된 것이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똑- 똑- 똑-

밖에서는 작달비가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고, 안에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곳은 기암절벽 사이로 자리 잡은 천연동굴, 스님들이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수행을 닦는 곳이라 하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그는 은명의 손목을 붙잡고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손목을 무심코 쓰다듬으며 은명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당하여라.’

시작은 분명 가짜 고백으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체취를 맡는 순간,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엄청난 고백을 끝마친 후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전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속에서 나오는 대로 줄줄이 내뱉은 것 같았다. 그것을 과연 가짜 고백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정녕 거짓이었다면 왕실에 희대의 사기꾼이 태어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심이었을까?’

은명의 안색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 가는데 등 뒤로 포근한 기운이 온화하게 퍼져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율이 보랏빛 쾌자를 벗어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온몸에 휘감기는 그의 시원한 체취로 눈앞이 아득하니 감감해져 온다.

“괜찮으십니까?”

안 그래도 추위에 약한 공주가 비를 맞아 오들오들 떨며 쾌자를 단단히 여민다. 입술이 푸르스름한 게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아직 더위가 남아있는 시기였지만 산속이라 그런지 서늘하다 못해 쌀쌀하기까지 하였다. 더군다나 홀딱 젖기까지 하였으니. 유백색 도포만 걸치고 있는 서율은 공주의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몸으로 막아주었다.

“스승님께서도 추우실 터인데 폐를 끼쳐 송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런 곳을 어찌 알고 계셨습니까? 현법사에 자주 오시는 모양입니다.”

“숙부께서 허리가 안 좋으신 탓에 가끔 모시고 와 주지스님께 침을 맞고 있습니다.”

“숙부라면 아까 그 잠자리를 쫓던…….”

“예, 그분이 저희 막내 숙부이십니다.”

그렇다면 좌상의 막냇동생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냉혈한 같은 자에게 그런 모자란 아우가 있었을 줄이야. 대체 어쩌다 그리되었단 말인가. 놀라운 사실에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문하십시오.”

“예?”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묻고 답을 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하문을 하십시오.”

숙부는 가문이 멸문을 당했을 때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김씨 문중의 어른들 중 한 분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시기에 그를 처음 접하는 이들은 언제나 궁금한 얼굴로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내곤 하였다. 공주께서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어차피 아시게 될 일이라면 일말의 부담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궁금한 것을 여쭙겠습니다. 숙부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편찮으셨던 것입니까?”

예민한 문제인 것 같아 조심스레 물었지만 서율은 꽤 담담한 어조로 답을 하였다.

“영리한 분이었다 들었습니다. 열다섯에 소과에 합격한 경력도 있으십니다.”

“헌데 어찌하다 그리 되셨습니까?”

“가문이 화를 입었을 때 조부님의 마지막을 눈앞에서 목격하셨다 합니다.”

“눈앞에서 직접 말입니까?”

너무도 참혹한 말에 은명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이 하도 끔찍해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노비로 끌려간 관아에서 매질을 심하게 당하셨던 모양입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저렇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계신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무섭고 끔찍하셨겠지요.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감당키 힘들었던 숙부님의 고통을 전부 헤아릴 순 없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저는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의 얼굴 위로 아른거리는 슬픔이 시큼할 정도로 처연하였다.

“많이 속상하십니까?”

“숙부님의 일은 진정 안타까우나 부모님이 서로 얼굴도 모르던 시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솔직히 저한테는 잘 와 닿지 않는 먼 옛날이야기이지요.”

언제 그랬냐는 듯 서율은 슬픈 기색을 단번에 지우고 무덤덤하게 답을 하였다. 잘못 보았던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은명은 또 다른 사실에 살짝 몸서리가 쳐진다. 그러고 보면 좌상은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홀로 몸을 일으켜 오늘날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까지 이르렀으니. 좌상이 뿜어내던 그 압도적인 관록의 기운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었는지 이제야 비로소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전하와 오라버니께서는 그런 분과 어찌 맞서고 계신 것일까? 스승님께서 만약 좌상의 뒤를 이어 저들의 영수가 되신다면…….’

아찔해진 은명은 두 눈을 꼭 감아버린다. 더 이상은 생각하는 게 무리라 여겨질 정도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날이었다. 나머지는 화경궁으로 돌아가 생각하리라. 김서율에 관해서도, 그에 대한 이 속마음에 관해서도. 김서율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은명도 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보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건 오라버니의 겉옷일 것인데……’

수백 번 글로 옮겨보았지만 서찰에 마음을 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깊은 수심에 빠져 있는데 설상가상 어머니께서 좌찬성 댁과의 정혼을 매듭짓겠다, 통보해 오셨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 통사정한 보희는 결국 현법사까지 서율을 쫓아오기에 이르렀다. 부끄러웠지만 연모하는 마음을 어떻게든 고백하고 싶었다.

장대비를 헤치고 절에 도착해보니 김서율은 공주와 함께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였다. 절은 발칵 뒤집혀 있었고 보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조바심이 일었다. 하필이면 공주와 함께라니…….

비가 그친 뒤, 밖에서 한참을 초조하게 서성이던 보희는 몸종 아이를 따돌리고 기어이 위험한 산길로 뛰어들었다. 그가 걱정스럽고 공주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 입구에 들어섰을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앞을 살펴보고는 얼른 한쪽 구석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서율이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공주를 보배처럼 조심조심 부축하여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것이 분명한 쾌자를 공주는 제 옷인 양 자연스럽게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 자태가 약이 오르도록 근사하고 멋들어져 보희는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어찌 그리 자상한 얼굴을 하고 계신 겁니까? 공주마마를 마음에 두고 계셨던 것입니까? 그래서 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까?’

하늘이 다시 컴컴해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보희의 시야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발견된 김서율과 공주는 이제 사찰 안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어 버렸다. 보희도 움직여야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 자리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곱고 어여쁜지 망각한 채 솟구치는 질투심과 열등감에 서글픈 눈물만 토해내고 있을 뿐. 차가운 빗물과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오열이 터져 나왔지만,

우르르 콰쾅!

천둥소리가 보희의 슬픔마저도 한입에 삼켜버렸다. 지금의 아픔은 오직 그녀 혼자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듯.

비에 홀딱 젖은 보희가 눈물을 삼키며 안채로 들어섰다. 파리해진 얼굴로 어머니께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려는데 안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소리가 새어 나온다.

“우리 보희를 중전으로요?”

“부인, 진정하고 내말을 좀 들어보시오.”

보희의 얼굴에 울음빛이 점점 더 역력해져 갔다.

‘저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이리도 애태웠던 저를, 가끔이라도 기억해 주시렵니까?’

비를 맞아 차가워진 보희의 뺨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비참했다. 고백 한 번 못해보고 차여버린 현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고 서러웠다.

‘아니요! 당신에겐 제가 없습니다. 단 한 자락도 들어 있지 않은 겁니다! 이대로 연이 끊어지면 저는 다른 이의 아내가 되고, 당신은 저를 잊으시겠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갓진 규방에 갇혀 당신에게 희미해진 존재로 살아가는 건 죽기보다도 싫습니다!’

여리고 순진했던 보희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당신이 그리 끔찍이 여기는 공주란 품계를 초월한 고귀한 존재이지요. 예, 그래서 저는 공주보다 더 귀하고, 더 높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공주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공주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 기필코 당신의 관심과 우러름을 한 몸에 받고야 말 것입니다! 평생토록 당신은 저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새 독기가 서린 보희가 눈물을 머금고 안방을 노려보았다.

정부인의 얼굴에 수심과 걱정이 잔뜩 배어있었다.

“세자빈이라면 몰라도 금상께선 연치가 너무 높지 않으십니까?”

“역대 왕실족보를 살펴보면 그보다 훨씬 더 차가 많이 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소. 잘 생각해 보시오, 부인. 당신이 부부인이 되시는 거란 말이오. 우리 보희가 이 나라의 국모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이, 참……”

정부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탕, 문이 열리며 홀딱 젖은 보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보희야, 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디서 이렇게 비를 쫄딱 맞은 게야?”

“궐로 가겠습니다.”

“보희야……”

갑자기 뛰어 들어온 딸이 독한 기운을 풍기며 잘라 말하자 정부인과 이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모습이었다.

“아버님, 저를 이 나라의 국모로 만들어 주십시오. 조선에서 가장 높고, 가장 귀한 여인이 되고 싶습니다.”

붉어진 보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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