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배형에 처하다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지나 몰라요.”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에 유모가 창문을 닫는 것을 보며 연리가 수를 놓고 있던 자수틀을 내려놓았다.
“벌써 장마인가?”
지금 연리는 정혼자에게 줄 자수를 놓고 있는 중이다.
흰 비단에 황금 실과 붉은 실을 섞어 용을 수놓아 이것으로 용포에 붙일 흉배를 만들 계획이다.
연리는 어려서부터 바느질 솜씨가 좋다는 칭찬을 들었다.
실과 바늘이면 어떤 옷이든 한번 본 옷은 다 만들어 냈고, 바느질 솜씨가 좋아 연리가 지은 옷은 천의무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의 부인과 딸들이 연리가 지은 옷을 한 벌씩이라도 얻기를 바랐지만 감히 연리에게 옷을 지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연리의 부친이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 재상 윤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리는 열 살 때 이미 태자비로 정해져 있었다.
연리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태자비 간택이 있었고 삼간택을 통해 연리는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물론 열 살의 연리가 태자비로 간택되기까지는 그녀의 부친인 재상 윤문의 입김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열 살에 이미 간택이 되었지만 나이가 어리고 아직 입궁시키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의견들 때문에 연리의 입궁과 책봉은 연리가 정식으로 어른으로 인정받은 후에 치러지기로 정해졌다.
장래의 태자비이자 재상의 딸인 연리에게 누가 감히 옷을 지어 달라 하겠는가.
그래서 연리가 좋은 마음으로 옷을 지어 선물하는 경우 외에 그녀가 지은 옷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연리는 철마다 직접 옷을 지어 황궁으로 보내는데 황제와 황후가 입을 의복과 태자가 입을 옷이 바로 그것이다.
이틀 전에 황제와 황후의 의복을 다 지어 놓고 어제부터는 태자의 옷을 짓기 시작한 연리다.
태자가 입을 용포에 붙일 흉배의 수를 정성 들여 놓기 시작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절반 이상이나 완성했다.
흉배의 수를 완성하면 나머지 옷을 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옷을 지을 때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부분은 수를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콰르르릉-!
“꺄악!”
창문을 막 닫으려고 할 때 갑자기 천둥이 무서운 소리로 울리자 놀란 연리가 비명을 질렀다.
“악!”
“아가씨!”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바늘에 손가락이 찔린 연리가 울상을 짓자 유모가 창문을 닫고 얼른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조, 조금 찔렸어…… 그런데 이걸 어쩌지…….”
연리의 손가락에서는 새빨간 핏방울이 뭉글뭉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손가락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하필이면 놓고 있는 자수 위에 떨어져 붉게 물들어 갔다.
“다 망쳤어…… 이를 어째…….”
정성을 다해 한 땀 한 땀 수놓던 것이 한순간에 망가지자 연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수는 다시 놓으면 되지요, 아가씨. 손가락 이리 내어 보세요. 약을 발라 드릴게요.”
“약은 괜찮고…….”
아직도 얼얼한 손가락을 살짝 입술로 빤 연리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망가진 자수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유모. 이렇게 피가 묻으면 안 좋은 거지? 괜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몰라…….”
“아가씨는. 그런 건 다 미신이에요. 이제 좋은 날을 앞두니까 마음이 괜히 심란하셔서 그런 것이겠지요.”
선물한 자수나 옷에 피가 묻으면 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징조라는 말을 어디에서 들은 기억이 있어 그것이 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지? 태자마마께는 별일이 없겠지?”
“그럼요. 우리 마마가 어디 보통 분이세요? 호랑이 같은 분이시잖아요.”
호랑이.
태자 권을 표현하는 유모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연리의 정혼자인 태자 권은 호랑이 같은 사내다.
불같은 성정에 사나운 눈매, 그리고 매사에 물러서는 것을 모르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사내가 연리의 정혼자다.
하지만 그런 사내일지라도 연리에게는 그 사나운 발톱과 이빨을 감추고 무른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에 연리는 그 사내가 조금도 무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아가씨. 머잖아 태자비가 되시면 얼마나 고우실까요. 소인이 아가씨를 따라 입궁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서운하네요.”
유모는 연리가 핏덩이일 때부터 젖을 먹이고 생모처럼 키워 준 사람이지만 연리를 따라 황궁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황궁의 법도가 그렇다고 했다.
“걱정 마, 유모. 내가 나중에 황후가 되면 그때는 꼭 유모를 데리러 올 테니까.”
“말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아가씨. 그런데 황궁이라는 곳이 무서운 곳이라는데 그런 곳에서 아가씨가 혼자 어찌 버티실지 저는 그게 걱정이네요.”
“그게 무슨 걱정이야. 아버님이 계시고 태자마마가 계신데.”
“말도 마세요. 황궁에는 요물이 산다지 않아요. 그래서 그 요물 때문에 다들 홀려서 후궁들의 암투가 끊이지 않는 곳이 황궁이라고 들었어요. 총애를 받지 못하는 못된 후궁들이 황후나 태자비를 투기해서 저주를 하고 독을 쓰고 별의별 짓을 다 한다지 않아요? 저는 아가씨에게 그런 못된 것들이 들러붙을까 그게 걱정이 되어서 잠도 안 오네요.”
“투기?”
“황후마마도 후궁들의 투기 때문에 여간 고생이 많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 중상모략에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예사고, 그 못된 것들이 일부러 자기 몸으로 낳은 왕자나 공주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그 죄를 총애받는 후궁이나 황후마마께 뒤집어씌운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게다가 태자마마께는 이미…….”
유모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연리는 유모가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괜찮아. 마마께 후궁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상관없어. 그래 봤자 정비는 나잖아?”
태자 권에게는 이미 후궁이 여럿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연리도 수긍하고 있는 일이다.
태자 권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미 스물다섯 살이나 된 사내에게 어찌 여인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태자에게는 여섯 명의 후궁이 있고 그중에서 정식 첩지를 받은 이는 재인 두 명뿐이다.
그 외에 네 명의 후궁들은 정식으로 첩지를 받지 못했고 그저 부인으로만 불리고 있고, 두 명의 재인을 포함한 여섯 명의 후궁 중에 아직 아들을 낳은 후궁은 없다.
양 재인이라는 후궁이 딸을 낳았지만 아직 공주의 칭호는 받지 못했다.
그건 아직 태자가 태자비를 들이기 전이기 때문이다.
태자비를 들이기 전에는 설령 후궁들이 태자의 아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왕자의 칭호는 받을 수 없다.
황궁의 법도가 그런 것이다.
“게다가 태자 전하도 나를 각별하게 대해 주시니까, 후궁들 때문에 벌벌 떨 수는 없잖아.”
연리는 부친 윤문을 닮아 겁이 없는 성격이다.
조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자존심은 누구보다 세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 역시 부친에게서 물려받았다.
열 살에 태자비로 정해졌을 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불 속에서 소리 내지 않고 웃을 정도로 야심이 크기도 했다.
부친 윤문의 권력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연리는 곁에서 보며 자랐다.
권력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어떤 자들이라 해도 결국에는 권세 있는 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것이 연리가 보아 온 것들이다.
그리고 연리가 본 것들이 또 있다.
권력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자들의 말로다.
그 말로는 한없이 비참했다.
어린 마음에도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었다.
함께 인형 놀이를 하며 친하게 지냈던 어느 장군의 딸이, 그 아비가 대죄를 지어 효수를 당하고 난 후에 그 일가가 뿔뿔이 흩어지고 친구였던 그 아이는 관노가 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 아이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비참한 몰골 앞에서 연리는 그 아이를 모르는 척했었다.
그리고 며칠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권력을 잃어버리면 결국에는 그런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부친은 현명하고 절대로 손에 쥔 권세를 놓치지 않을 성격이며 무엇보다 이제 자신은 태자비가 된다.
태자비. 장차 미래의 황후. 차차기 황제의 모후.
이보다 더 확고하고 대단한 권력이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리는 지금 태자의 곁에 있는 후궁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 여자들은 그저 후궁, 달리 말하면 첩일 뿐이다.
아무리 자신을 투기하고 별의별 짓을 다해서 저를 끌어내리려고 해도 제 뒤에는 부친이라는 배경이 있다.
오히려 연리는 정식으로 책봉을 받아 입궁하면 지금 황궁에 있는 태자의 후궁들에게 예의가 무엇인지, 누가 윗사람인지 확실하게 가르쳐 줄 생각이다.
“입궁하자마자 싹을 잘라 버릴 거야. 감히 내게 대들지 못하게.”
“아무렴요. 아가씨는 분명 잘하실 겁니다.”
“태자마마께서 황궁에 초대해 주셨어. 그때 후궁들도 보게 되겠지. 그때 얼굴도 들지 못하게 할 생각이야.”
“초반부터 기를 꺾어 놓으세요, 아가씨.”
“그때까지 옷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아직 며칠 더 말미가 있으니까 시간은 충분할 거예요, 아가씨.”
“그래도 서둘러야겠어. 피가 묻은 이건 버리고 새 천을 꺼내 줘, 유모.”
“네, 아가씨. 제가 얼른 가서 새 천을 가지고 올게요.”
유모가 밖으로 나가자 연리가 콰르릉거리며 흔들리는 창문을 쳐다봤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아직 장마는 이르다.
그런데도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아버님께서 늦으시네…….”
오늘 부친은 태자를 만나고 오겠다며 초저녁에 다시 황궁으로 갔다.
저녁상을 물리고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 부친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마마와 말씀이 길어지시나? 내 책봉식 논의를 하고 계시는 걸까?’
책봉식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렌다.
절대 권력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재상의 딸도 충분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지만 태자비와는 완전히 다르다.
태자비가 되어 장차 황후가 된다면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까?
누구나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자리에 오른다면 그때도 여전히 부러운 것이 남아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기분이 너무 좋아…….’
밖은 비록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불고 있지만 연리의 기분은 태자비 책봉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 날아갈 듯 들떴다.
그때였다.
첨벙첨벙-!
빗물을 다급하게 밟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급하게 열렸다.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유모였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유모는 비를 흠뻑 맞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였다.
꼭 귀신이라도 본 표정에 덩달아 연리가 덩달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
“아, 아가씨! 나, 난리가…… 난리가……!”
유모는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버님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거야?!”
이렇게까지 유모를 놀라게 만들 만한 일이라면 부친에 관계된 일밖에 없다.
부친이 말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치기라도 한 걸까?
“지금 집 안에 병사들이 몰려 들어왔는데…….”
“병사들이? 누구의 병사들이 몰려왔다는 거야?”
“화, 황궁의 병사들이에요, 아가씨!”
“황궁의 병사들이 대체 왜……!”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유모를 밀치고 연리가 방 밖,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우산을 드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적어도 유모처럼 비를 쫄딱 맞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산을 쓴 연리가 대문으로 향했다.
유모의 말처럼 대문 안팎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수십 명이나 에워싸고 있었다.
연리는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이 처음이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고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연리가 병사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 집은 재상 윤문의 집인 동시에 장차 태자비가 될 자신이 사는 집이다.
그런데 감히 무장한 병사들이 함부로 난입한 것이다.
“황명을 받들고 왔소.”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한 사내가 연리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사내의 눈동자는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형형하게 빛나 섬뜩한 두려움까지 주고 있었다.
“황명이라니? 그게 무슨…….”
그러나 연리도 겁을 먹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죄인은 황명을 받으시오!”
죄인?
죄인이라는 말에 연리가 적잖게 당황했다.
“누가 죄인이라는 것이냐?! 나는 태자마마의…….”
“죄인 윤연리는 황명을 받들라!”
그때 사내가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그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연리가 저도 모르게 손에서 우산을 놓쳤다.
“태자 권이 역모의 죄로 폐태자 되었고, 재상 윤문의 딸 윤연리는 대역죄인과 정혼한 바,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태자비에서 폐하고 연좌의 죄를 묻는다. 그리고 죄인 윤연리의 아비 윤문은 죄인인 딸과 사위를 둔 죄로 재상의 직에서 파직하고 그 연좌의 죄를 물을 것이다!”
“역모……라니…….”
연리가 귀를 의심했다.
빗소리가 너무 거세어서 자신이 잘못 듣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가, 마마께서 그런 일을 하실 리가…….’
태자가 왜 역모를 일으켰단 말인가.
가만히 있어도 황제가 될 수 있는데 뭣 하러 일부러 역모를 일으켜 화를 자초한단 말인가.
‘누명을 쓰신 것이 틀림없어. 어떤 못된 자들이 마마를 모함해서…….’
“이 시간부로 누구도 이 집 안으로 출입할 수 없다. 죄인에 대한 형벌이 정해질 때까지 죄인 윤연리는 이 집에 감금하라는 황명이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리치는 천둥 번개보다 사내의 목소리가 더 청천벽력이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연리의 머리 위에서 천둥이 콰르릉 무서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굵은 빗물을 연리는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귀에는 천둥 소리가 아닌 ‘역모’라는 단어만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부친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여기서 잠시 배를 기다려야 하니 다들 멈추거라!”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던 나장이 소리치자 그제야 행렬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지친 병사들이 저마다 땅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하고 물을 마시자 병사들의 뒤를 따라오던 죄수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다가 쭈그리고 앉았다.
“배가 올 때까지는 휴식이다!”
나장이 말에서 내리며 그늘진 나무 아래로 걸어 들어가더니 물지게를 이고 온 물장수에게서 물 한 바가지를 받아 들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 모습을 죄수들은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죄수들이 감히 물을 달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초췌한 모습의 죄수들 중에는 윤연리도 끼어 있었다.
‘목 말라…….’
연리가 나장의 물 마시는 모습을 훔쳐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오늘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떠나 반나절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도중에 병사들이 주먹밥으로 점심 요기를 할 때에도 연리를 비롯한 죄수들은 그저 그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죄수들에게 주어지는 밥은 아침과 저녁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많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찬밥 한 덩이씩이 전부였다.
그걸 먹고 하루 종일 걸어야 하니 배는 항상 주렸고 목은 항상 말랐다.
‘언제까지 쉴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렇게 앉아서 다리를 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걷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붓고 발바닥에는 물집이 잔뜩 잡히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그 물집이 터진 발로 다시 걸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연리의 발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도성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에 꼬박 열흘이 걸렸다.
열흘 동안 쉬지 않고 걸어오느라 몸은 상했고 씻지 못해서 또 얼마나 더러운지 모른다.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신발은 다 해어져서 제 구실을 못 할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이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재상의 딸로 태어나 곱게만 자랐던 연리는 생전 처음 이렇게 오랜 거리를 제 발로 걸어와야만 했다.
정말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연리는 알고 있다.
재상의 딸이라는 이름도 남지 않았고 태자비라는 이름 역시 남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그저 죄인일 뿐이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태자의 죄 때문에 자신 역시 죄인이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 걸어오며 연리가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은 아버지 윤문도 아니고 정혼자인 태자도 아닌 관노가 된 제 어릴 적 동무 현애였다.
현애도 지금 자신과 마찬가지로 죄는 없었다.
그러나 그 부친이 죄인이 되자 현애와 그녀의 어머니, 형제자매들이 전부 죄인이 되어 결국에는 관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장 존귀한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도 그와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현애는 관노가 되었지만 자신은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것뿐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을까.
관노가 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외딴섬에 유배되는 것이 나을까.
둘 다 최악이다.
‘내가 현애를 모르는 척해서 벌을 받은 걸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내내 그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연리 자신이 더 잘 안다.
태자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그는 성급했고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태자가 누명을 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생각이 변했다.
누명이 아니라 정말 태자가 역모를 일으킨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부친도 그걸 부인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거라. 살아남아야 한다.’
부친은 제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버텨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평생 늙다가 죽어 버린다면, 그때까지 수치스럽게 버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죽는 것도 무섭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죄수들 중에 두 명이 죽었다.
한 명은 원래 병을 가지고 있었고 또 한 명은 도중에 쓰러져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타인의 죽음을 보며 연리는 그 죽음이 제 것이 될까 봐, 저도 그렇게 죽을까 봐 너무 무서웠었다.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죽는 죄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 죽음은 너무 비참하다.
유배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도 무섭고 그렇다고 유배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는 것도 무섭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 따위는 더더욱 없다.
지금 연리의 상태가 그랬다.
그저 휘둘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흙투성이 죄인이 되어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재상의 딸, 미래의 태자비로서의 긍지는 다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 약간밖에 없다.
이 자존심마저 버리게 되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만약 누군가 물 한 그릇을 주고 떡 한 덩이라도 던져 주면 자존심이고 뭐고 개처럼 엎드려서 받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목마름과 굶주림 앞에서 사람은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연리는 배우고 또 배웠다.
처음에는 부친의 걱정도 되었고 태자의 걱정도 되었지만 지금은 그저 제 걱정밖에는 할 여유가 없다.
부친도 태자도 죽지 않았다는 건 안다.
처형이 아니라 유배형이 내려졌다는 소식까지는 들을 수 있었지만 어디로 유배 보내졌는지 그건 알 도리가 없다.
‘바다…….’
연리가 눈을 들어 난생처음 보는 바다를 쳐다봤다.
연리의 유배지는 섬이다.
육지에서 배로 한참을 가야 나온다는 외딴섬에 유배되는 형벌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함께 온 죄수들이 모두 같은 섬으로 보내지는 건 아니다.
여기서 이제 각자가 갇혀야 하는 섬으로 흩어질 것이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겠지…….’
새파란 물결도, 뱃전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지는 하얀 거품도,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도 연리의 눈에는 그저 두려움을 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저 두려운 바다 너머에 자신이 죽을 때까지 벌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섬이 있다.
도망칠 수도 없고, 벗어나지도 못하고, 아무도 곁에 있어 주지 않는 그런 섬이 저 바다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가려고 병사 한 명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장 먼저 출발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걸 연리가 깨달았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이렇게 육지를 떠난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이렇게 떠난다.
연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두 눈은 두려움 때문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