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잠깐만 앉아 쉰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집에 시계 하나 걸린 게 없어 휴대전화부터 충전했다. 전원이 켜지자마자 무섭게 들어오는 문자에 놀라 다시 몸을 일으키자, 확인할 새도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어, 여보세…….”
- 이재이! 너!
“아, 반장.”
- 너 뭐야? 말도 없이 가면 어쩌자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화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왜 그런지 알고 미안하면서도,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이 없는 관계에서 제희가 자신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 눈물을 핑 돌게 했다.
- 너 문자 보고 간 거야? 어머니 오신다고 해서?
“어어……, 놀라실 거 같아서. 나도 또 일도 있고.”
- 이재이.
“그렇잖아. 갑자기 아들 집에 왔는데 모르는 여자가 있으면.”
- 나한테 네가 모르는 여자야?
아닐 거라 믿었다. 그런데 9년 만에 다시 보는 그의 어머니 앞에선 달리 관계를 설명할 말이 없었다. 자신을 알아보실지, 보고 나서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지으실지. 그 순간에는 그녀가 딱히 할 수 있는 행동도, 용기도 없었다.
“너희 어머니가 나중에 너한테 또 물으시면, 너 당황할 거 같기도 하고…….”
- 이재이.
무언가를 억지로 참는 듯한 그의 숨이 그녀의 귀에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아프다.
- 넌 내가 당황할 건 걱정되면서 얼마나 놀라고 힘들진 걱정 안 해? 웃기지 않아?
“아, 나는…….”
그녀도 하고픈 말을 참았다. 전화로 할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얼굴 보고도 못 할 테지만.
- 어디야? 집이야? 내가 갈게.
“그게……, 집이긴 한데. 친구가 오기로 했어.”
- 친구 누구?
“전에 말했던 동료……, 음, 그러니까 다음에 봐. 제희야.”
- 나 내일부터 사흘은 병원에서 못 나와. 그런데 오늘도 못 본다구?
9년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사흘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데 막상 그러자는 소리가 안 나왔다. 벌써 성인이 된 윤제희가 어떤 모습인지 모두 아는 터라 더 그랬다.
“그럼 봐서 병원에 한번 들를게. 너무 늦었다. 얼른 자.”
억지스레 통화가 끊기고도 쉽사리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검은 종이가방에 어젯밤을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러지 말자.
안에 들어 있던 반찬통을 다시 차곡차곡 꺼내다 고개를 떨궜다. 오징어포니 멸치니, 평범한 식탁에 하찮은 반찬이지만 혼자 먹자고 하기에는 은근히 비싸 사본 적 없는 재료들이다.
제희한테 주고 싶어 아주 일상적인 것인 양 챙겨 갔는데 그게 다시 제집으로 돌아왔다. 맛 한번 제대로 못 봤을 텐데.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서 자신도 겨우 간만 확인하고 작은 창 하나 있는 좁다란 주방에서 한참을 땀 흘려 만들었었다.
「전에 말했었잖아, 친구로만 지내면 좋겠다고. 이 시간에 여학생이 찾아와서 남학생 불러달라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아,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잠깐이면 돼요. 아주 잠깐만…….」
「미안한데 지금 집에 없어. 학교에 있거든.」
쾅,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도 얼마를 더 서성였는지 몰랐다. 작고 초라한 가게에 딸린 그녀의 가겟방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주택 앞에서 시린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몇 발짝 더 물러서서 황급히 고개를 살피다 2층의 빛이 새어나오는 어느 창가에서 제희의 그림자를 보았었다.
그림자에 명찰이 붙은 것도 아닌데 그게 제희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마주 앉아 고개를 들었을 때 잠깐씩 비치던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의 그림자로도 그를 본 것처럼 가슴이 뛰었던 그녀였으니. 그날 그녀는 눈물이 나면 그림자라도 놓칠까 겨우겨우 숨만 쉬었다.
“……짜네.”
덜컹, 무의식적으로 반찬통 하나를 열어 반지르르 윤이 나는 멸치볶음을 조금 집어 먹었다. 음식 솜씨가 꽤 괜찮다 생각했는데. 차라리 잘됐지 뭐.
멸치가 짜서 목이 메는 건지, 코끝이 시큰해 짜게 느껴지는 건지, 몇 번을 더 맛보아도 끝내 몰랐다.
얼마 남지 않은 특수에 매달리느라 점심도 겨우 먹었다. 1, 2년 일하는 것도 아니고 짬을 내자면 못 낼 것도 없지만 다른 생각이 들까 더 열심히 일했다.
“야, 쉬엄쉬엄해.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그래두. 요새 분위기가 너무 좋았잖아.”
“하기야. 좀 있으면 월드컵 끝나네. 이제 독일전도 이겨야 되는데.”
영미가 아쉬운지 기지개를 켜면서도 고개를 푹 숙였다. 보고 있는 재이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6월에 이 열기 또한 끝이 보인다는 것이 슬프다. 그녀에게는 4강의 기적 못지않은 재회였다.
“야, 그래도 재이 넌 첫사랑 만나 만리장성도 쌓고 월드컵 제대로 즐겼지. 난 이게 뭐냐?”
“아우, 영미야. 조용히 좀 해.”
“우리 둘밖에 없는데 뭐. 에이, 남들은 그날 원나잇도 많이 했다는데 나는 닭뼈랑 잤네.”
“저기, 그런데, 영미야. 그거……, 원나잇 이런 거 하고 나면 그다음 날 되게 부끄럽겠지?”
“말이라고 하냐? 잘 알지도 못하던 남자랑 자는 건데. 그러니까 원나잇이지. 안 보는 게 나으니까.”
“……그렇구나.”
그런 말을 붙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녀에게는 소중한 밤이었다. 다시 제희를 만난 것에 만족하려 했는데 그가 자신을 원했다. 몸이든 마음이든, 그 하나의 사실이 가슴 시리도록 좋다가도 하루가 지나자 뻔한 고민에 전전긍긍하고 만다.
“그나저나 너 그제 진짜 속옷 덕 좀 봤어?”
“아, 아니. 뭘…….”
그날 속옷은 그녀 자신도 제대로 본 기억이 없어 적당히 얼버무렸다. 오자마자 제희가 벗겨버렸고 집에 와서도 괜히 생각날까 서랍 속에 꼭꼭 숨겨두었다.
“그럼 오늘도 데이트?”
“그런 거 아냐.”
“야, 이재이. 내숭도 좀 적당히 해야지.”
“그게 아니라 일이 바빠서. 되게 바쁘거든. 그래서 오늘은 못 봐.”
말해놓고 자신이 더 시무룩해졌다. 지금 기분이 어떤지는 말로는 설명이 잘 안 된다.
그를 빨리 보고 싶기도, 또 미뤄놓고 싶기도 하다.
[오늘 병원으로 올래?]
이틀간 제희의 문자는 물음표 하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단 하나, 그녀가 물음표를 붙여보고 싶었던 질문은 따로 있었다.
난 너한테 뭐야?
자신도 모르는 답을 제희에게서 듣고 싶다. 제희가 누구보다 진지한 남자라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잘 알지만 귀로 들은 달콤한 약속은 없었다.
그러니 영미한테건, 누구한테건 어찌 말해야 할지 답답하다. 병원에 간다 해도 그날처럼 제희 말고 다른 사람과 먼저 마주친다면 이 관계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답이 없었고.
왜 나는 너한테 자꾸 무언가가 되고 싶을까?
겨우 이틀 만이라지만 널 보면 뭐라고 해야 할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하면 나도 그래야 하는지. 나는 이제 못 그럴 것 같은데. 네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운데 너는 그게 아니라 하면 나는 어떻게 널 대하지?
그에게 가려고 몇 번씩 나섰다가 다시 걸음을 돌렸다. 남들은 그녀에게 바보 같다 하겠지만 그녀가 겪은 세상은 너무도 험했다.
어린 나이에 아무 생각 없이 사회에 나섰다가 생각지도 못한 폭풍우에 엎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멋모르고 울다가는 달래주기는커녕 더 호된 질책을 당했고 여린 마음에 그 상처가 아직도 뚜렷이 남았다.
「그 정도 소리는 누구나 듣는 거야. 그걸 이해 못 하면 사회생활 하면 안 되지. 남의 돈 받으면서 그 정도도 생각 못 해? 그게 싫으면 대학 가서 더 좋은 직장 가든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자꾸만 대비를 하게 되고 아픈 길은 먼저 돌아섰다. 상처를 입어도 입김 한번 불어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그녀 스스로 보호막을 만들어야 했다. 아파도 조금만 아플 수 있도록. 다시 일어설 정도는 되도록.
거기다 상대는 윤제희다. 그녀에게는 거의 최후의 존재나 다름없던 제희였으니 이 상황에서는 걸음 하나도 조심스럽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희가 겨우 하룻밤 열기에 휩쓸려 없는 마음을 쓰지야 않았겠지만 막상 그녀는 겁이 났다.
열아홉의 제희만 그녀에 대한 남모를 감정을 품었던 것이 아니다. 자고 싶다 생각을 못 했을 뿐이지 품에 두고 그리던 마음이야 자신도 못하지 않았다. 그런 그와 잤으니 후회는 아니라도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 하나까지.
“여보세요?”
- 너 왜 답이 없어. 못 와?
“아. 내가 오늘 공장도 좀 가야 되고. 그동안 일이 너무 밀려서, 미안해.”
- ……너 약속 지킨다며. 보고 싶을 때 본다며?
“하하. 뭐야. 일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미안.”
- 그럼 내일은?
“음……, 내일도 한번 봐야 할 거 같아.”
- 뭘 보는데?
“아. 그게.”
- 이재이.
네가 뭘 봐야 하는지 아직도 몰라?
잘못도 없는 재이에게 거친 소리가 나갈까 이름만 부르고 숨을 죽였다. 어제는 그도 혼란스러웠다. 어머니가 오셨다는 것을 알고 갔겠지만 밤을 함께 보낸 뒤 혼자 집에 보냈다는 것이 여러 번 그를 아프게 찔렀다. 그런데 그 마음 약한 재이는 얼마나 더 아팠을까.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자 꽉 들어찬 반찬들 사이에서 재이의 손길이 갔을 찬들은 모두 사라졌다.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도, 이불을 널어놓은 베란다로 나갔을 때도 이 집 어디에도 이재이의 흔적은 없다. 처음부터 오지 않았다면 ‘아, 그렇구나.’ 할 정도로 제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그게 또 울컥했다. 나이 먹었다고 이런 데 담대해진다거나, 대범하게 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번 겪어봤으니 더 아프고 겁이 났다.
“박 쌤. 아직 겨울연가 봐요? 이제 내기 도박 끝났어요?”
“거의 다 떨어져나갔거든. 그래도 준결승, 결승 따로 걸 수 있어. 할래?”
“쌤 이러다가 재벌 되겠어요.”
“네 남친만 하겠냐?”
1년차 여자 후배가 의국에 들렀다가 영우가 앉은 TV 앞에 붙어 섰다. 월드컵을 보는 짬짬이 틀어놓던 드라마가 눈에 익다. 먼저 찾아서 보지는 않아도 재이와 다시 만나게 된 후로 더 눈이 가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난 이재이와 다시 잘될 작정인데 이왕이면 너희도 잘됐으면. 그렇게 생전 안 하던 생각도 몇 번 했다.
“아, 최지우 완전 좋겠다. 배용준한테 저런 것도 받고.”
“목걸이? 아, 저거 얼마 전까지 유행했지? 폴라리스 목걸이 맞나? 꽤 비싸지?”
“에이, 비싼 걸로 따지면 저거보다 비싼 거 널렸죠. 그냥 마음이잖아요. 힘들 때 의지가 되는 거.”
“저런 거 하나 받았다고 의지가 된다고? 너도 부자 남친한테 하나 사달라고 해.”
“나 참, 쌤도. 저걸 강요해서 받는다고 무슨 의지가 되겠어요.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저런 마음으로 나를 봐준다는 거 자체가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뜻이라잖아요. 난 정말 좋을 거 같은데.”
캐비닛을 닫은 그가 뒤로 돌았다.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킨다는 별이 TV 속 밤하늘에서 반짝인다. 길을 잃어도 바로 찾을 수 있게, 폴라리스처럼 길라잡이가 되어주겠다는 고백을 마냥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호출이 울리는 바람에 바로 자리를 떴지만 그 잔상은 꽤 강하게 남고 말았다.
이재이, 나도 이렇게 너 기다려. 고개 하나 들면 나도 늘 같은 자리에 있었어.
그런데 너는 하늘 한 번을 안 봤을까, 아니면 네 삶에 그럴 만큼의 여유도 없었을까.
하루가 더 지나고 마음은 몇 배로 더 깊어졌다. 지하철 갈아타면 금방인데 그까짓 게 다 뭐라고. 일이 너무 잘 풀리다 보니 어느 순간 붕 떠올라 한 번 가본 그의 집에 제 마음을 놓아두고 왔다. 반찬이니, 빨랫감이니 다 챙겨 나왔으면서도 늘 지니고 다니던 것 하나는 두고 와버렸다.
오늘은 먼저 가볼까? 제희가 먼저 내가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용기라도 내보고 싶어 퇴근하자마자 어제 받았던 문자를 뒤적였다. 오늘은 다른 연락이 없다는 것이 신경 쓰이면서도 그가 보낸 짧디짧은 흔적들을 보다 보면 시간이 빨리도 흘렀다.
내일은 병원에서 나올 수 있다지만 하루의 경험으로 내일은 또 얼마나 더 보고 싶을지 장담을 못 하겠다.
딩동, 옷도 채 못 갈아입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굴까. 제희는 병원에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황급히 문을 열었다. 혼자 사는 여자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조차 문을 열고야 떠오를 만큼 그의 생각만 앞서 있었다.
“누나.”
“어, 재우야.”
히죽 웃는 재우가 발부터 안으로 들였다. 커다란 가방 하나가 눈에 띄어 그것을 보고 있자 재우는 벌써 집 안을 둘러보곤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에이, 진짜 작네?”
“너 말도 없이 여기 어쩐 일이야?”
“흐흐, 그냥. 어떻게 사나 보러 왔어.”
기운이 쭉 빠졌다. 그래도 동생이라 멀리서 올라왔는데 차마 내치지를 못해 음료수부터 한 잔 내어왔다. 저도 멋쩍은지 머리를 긁더니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웃는다.
“엄마는 알아?”
“누나 집에 온 건 알지.”
“밥은?”
“밥은 뭐. 햄버거 사 먹었어.”
“……기다려봐.”
냉장고에 있던 찬들이 그대로 나왔다.
“누나 혼자 잘해 먹고 사네!”
감탄이 곱게 들리지 않아 더 서글펐다. 남들이 들으면 고기반찬이라도 나온 것 같은 초라한 식사다.
“뭐 찌개라도 끓여줄까?”
“아니, 됐어.”
벌써 먹느라 말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햄버거든 뭐든 먹은 것이 없겠구나 싶어 밥 한 그릇을 더 퍼다 내밀었다.
“누나, 그런데 어디 나가려던 거야?”
“어……, 아냐.”
“아, 그럼 다행이구. 나 근데 있잖아.”
“재우야.”
“응?”
“내가 너 데리고 있을 만한 형편이 못 돼.”
달그락거리던 숟가락질이 조금 느려졌다. 눈을 못 든다 싶으면서도 꾹꾹 억지로 씹어 넘기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렸다.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해본 적 없는 그녀도 입에 무거운 짐덩이를 올려놓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