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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나는-22화 (22/48)

# 22화.

그만하면 그의 대답은 충분했다. 이제껏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지만 불쾌함은 전혀 없었다. 이미 이른 새벽잠에서 깨었을 때 거칠게 다가왔던 그를 생각하며 그럴지도 모르겠다 짐작했으니까.

윤제희가 아무리 점잖다 해도 19세의 남자는 한계가 분명했다. 다만 28세의 그녀가 보기에도 19세의 그는 어른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에 놀라움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재이야.”

“으응. 으으응.”

둥글게 문지르던 엄지가 사라지더니 뜨겁고 단단한 끝이 그녀 안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그 생경한 느낌에 몸을 바싹 움츠리자 제희가 입을 맞췄다. 신경이 분산되자 아래에 들어간 힘이 빠지는가 했는데 꽉 조여오는 힘은 긴장과는 별개였다.

“하아.”

처음부터 위기다 싶은 그가 겨우 억눌러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서서히, 어제는 포기했던 여유를 찾아나갔다. 그녀가 작은 엉덩이를 살짝 들어 자신을 감싸자 그때부터 조심스레 허리를 놀렸다.

“흐으읏. 이, 이상해.”

“이상하라고 하는 거야.”

너무 이상해서 미칠 정도가 되면 모를까. 그 전에는 멈추고 싶지가 않다.

별로 몰아댈 마음은 아니었는데 시작하고 나니 이번 역시 그가 먼저 미치게 생겼다. 그저 지극한 본능 정도라 생각했던 행위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강력한 쾌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예상치도 못한 그 쾌감에 고무되어 허리를 더욱 거세게 치받자 그녀의 앙탈도 심해졌다.

“아아, 으응. 으으응. 제희야.”

“응.”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몰아대는 속도가 올라갔다. 찰싹,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흥분을 한층 고조시켜 그마저 눈을 감았다.

“하아, 하아아…….”

절정에 다다르자 어디가 어떤 감각인지, 이게 고통인지, 쾌락인지도 몰라 애꿎은 베갯잇만 쥐어뜯었다. 거친 숨을 내쉬다 한참 후에나 몸을 돌린 그가 정처 없는 재이의 손을 조용히 덮어 눌렀다. 기껏 훔쳐온 콘돔은 다 쓰지도 못했지만 숨 고르는 데 바쁜 재이는 그마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느낌은, 비할 바가 없다.

쾌락에 따르는 것이 책임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그따위 것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인간이 가질 만한 모든 쾌락을, 이재이에 한해서는 전부 맛볼 생각이었으니. 책임이라고 해봐야 새털만 한 무게도 없어 기꺼울 뿐이다.

“……이제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어?”?

꼭 그걸 알려주고자 아침부터 몰아댔다는 듯한 말투에 재이가 눈을 찡그렸다. 미안해하지도 않고 꽤 뻔뻔스럽다.

“으음, 그럼 왜 하필 그때였어?”

“……그날 네 브래지어 끈이 잠깐 비쳤거든. 너 매일 단정하게 하고 다녀서 그런 일 없었는데.”

“응? 정말? 겨우 그런 걸로?”

“겨우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할 뿐이다. 1센티미터도 안 되는 그 작은 면적이 눈에 들어왔을 뿐인데 그는 커다란 이불에 싸인 것처럼 복잡해졌었다. 정작 재이에게는 쌀쌀맞게 굴면서 다른 아이가 보기라도 할까 그 뒤에서 어마어마한 접근금지의 기운을 뿜어냈었다.

“한 번만 더 그러고 다녀봐.”

“뭐어?”

억지나 다름없는 요구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나는 말 못 해.” 입을 다물었다. 그처럼 뻔뻔하게 구는 것이 목표였지만 마냥 새침해 보일 뿐이라 다시 긴 키스가 이어졌다.

숨결을 불어넣고 앗아오는 이 단순한 반복이 다시 한 번 그의 본능을 불러내었다. 결국 축 늘어진 그녀가 제대로 누운 건 두어 시간이 훌쩍 넘은 후였다.

“좀 더 자.”

“아냐, 일어나야지.”

“일요일이야.”

요일을 불문하고 그녀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났었다. 몸에 밴 습관이라 길고 긴 연휴에도 한번 달라져보지 못한 것이다.

“안 잘 거면 나도 너한테 뭐 하나만 물어볼래.”

“응? 뭐?”

이불 속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부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너는 내가 왜 널 때릴 거라 생각했어?”

“그거야 뭐.”

9년이나 흘렀지만 짝 핑계를 대기가 구차해 배시시 웃고 말았다. 냉기 날리던 자기 태도에 짚이는 것도 없는지 길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야!”

이재이, 정말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건 내가 무서워 물어볼 수가 없어.

하지만 내 마음을 눌러 네가 지금처럼 웃으면 이젠 정말 그걸로 됐어.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라도, 그 기억 안에서 내 열아홉이 죽어버렸더라도.

나는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어제 나오느라 오늘은 가봐야 해. 저녁에는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 꼭 여기 있어.」

두 번째 잠이 들었다가 어깨를 흔드는 부드러운 손길에 잠깐 눈을 떴었다. 비몽사몽 눈을 비비는 와중에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참…….”

일어나보니 가관이다. 머리나 몸이나 흐트러진 침대보까지. 다시 쳐다볼 엄두도 안 나 얼른 몸부터 씻고 나왔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기에는 너무도 깨끗해 그녀의 모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샴푸나 비누, 치약까지 모두 제자리에 놓아두고 거실로 나와 환기를 했다.

“하아…….”

정체된 공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이제야 알겠다. 혼자 있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겠다 했는데 상쾌한 바깥 공기 하나에도 시선이 흔들렸다. 아침도 못 먹고 나갔을 텐데 배가 고파 어쩌려나 마음이 영 그렇다. 전화라도 해보고 싶지만 제희의 휴대전화는 이곳에 있었다.

「이거 가지고 있어. 네 거 배터리 다됐으면 연락도 안 될 텐데. 병원에선 따로 쓰는 거 있으니 내가 전화하면 그거나 잘 받아.」

학교 다닐 때는 이렇게 작고 가벼운 휴대전화가 필수품이 될 거라 상상도 못 했다. 삐삐가 있는 애들도 몇 없었고 잘사는 짝꿍이 삐삐를 샀을 때 너무 신기해 몇 번을 요모조모 살펴봤던 기억이 있다.

폴더를 열어 구경해볼까 하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라 다시 내려놓고 매트에 풀썩 누워 눈을 감았다.

잤어, 자버렸어.

내가 윤제희랑 자다니. 진짜 이렇게 돼버렸어.

얼떨떨하다가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눈을 더 꼭 감았다. 이상하게 눈을 감으니 더 생생해진다. 자신을 만지며 뜨거워지던 그의 몸과 귓가를 가득 채우던 거친 숨까지.

그녀가 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그는 해왔다고 했다. 남자란 원래 그런 건지, 여자는 또 원래 확인받고 싶어 하는지. 나는 또 웬 욕심이 이렇게 많은지.

딩동, 옆자리에 놓아둔 그의 휴대전화에서 문자음이 울렸다. 안 보려 해도 그에게서 온 연락일지 몰라 조심스레,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차 폴더를 열었다.

“어제는 경기 낮에 시작해서 밤에 푹 잤나 보네? 윤제희, 너 피부 장난 아니다. 광택이 반지르르.”

간호사와 스테이션에서 대화를 하던 중에 지나가던 영우가 그를 잡아끌었다. 그 너스레가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오늘은 조금 더했다.

“하기야 지금 대한민국에 기분 안 좋은 사람이 어딨겠어? 4강이라니, 진짜!”

“너 치프한테 한소리 들었다며. 아직도 내기하고 다녀?”

“야! 너도 했잖아.”

“박 쌤, 윤 쌤, 이거 좀 가져가세요. 환자 보호자가 사왔는데 오늘 커피 풍년이라 다 못 마셔요.”

차트를 챙겨 병동으로 가려던 간호사가 잊기 전에 주겠다며 캐리어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두 잔 내밀었다.

“올, 생큐! 쌤 덕에 호강하네요.”

“월드컵 덕이죠, 뭐. 사람들이 후해져서는. 하여튼 저도 아직 살아남았으니까 배당금이나 잘 계산해주세요.”

피곤한 듯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간호사가 사라지자 영우가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긴 호흡으로 빨대로 커피를 들이마셨다.

“야아, 역시 끝내주는구만! 캔커피랑은 차원이 다르지. 이 맛이거든!”

“그래?”

“돈값이 있는데. 캔커피 몇백 원짜리랑 같으면 되냐? 하여튼 누가 주니까 먹는 거지 내 돈 주고 이걸 어떻게 사 먹어. 장사가 되나 싶어도 보면 요새 커피전문점 얼마나 느는데.”

얼음을 흔들어가며 뚜껑까지 열더니 단숨에 마저 들이켰다. 실없는 모습에 웃음이 나 그도 한번 마셔볼까 하는데 쩝쩝 입맛을 다시던 영우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목청을 높였다.

“최기영이! 너 이리 안 와?”

“아, 왜 그러십니까.”

“왜? 왜? 이거 말하는 거 보게.”

“너 또 왜 그래? 가만있는 애 붙잡고.”

“가만있어? 이게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니 열받는 게 있는 모양인지 자신보다 큰 제희의 귀를 살짝 당겼다.

“나 어제 완전 결정적인 순간까지 갔는데 콘돔 없어서 까였단 말이야! 그래도 한두 개는 팔겠지 했는데 없어, 완전. 대박 황당하지 않냐? 무슨 나라가 이래? 세기말도 지났는데 밀레니엄 버그가 이제 오다니.”

“…….”

“하여튼 너한테 이런들 네가 내 맘을 어떻게 알겠냐. 최기영이! 너는 어제는 병원에 짱박혀 있었으니 못 썼을 거고. 어디 감춰놨어? 형준이가 그거 감도가 끝내준다던데.”

“아우, 정말. 왜 그러십니까? 저 아닙니다! 저 안 썼습니다!”

“안 써? 그럼 언젠간 쓰겠다는 거네. 그거 다 쓰면 여자 죽는다고, 이 예비 살인자야. 널 내 손으로 처단해야겠다.”

“아아악!”

영우가 대뜸 후배의 목을 감싸고 조르자 눈을 찡그리던 제희가 얼른 말렸다. 펠로가 불러 달려가면서도 끝까지 주먹을 드는 영우의 모습에 기영이 죽는소리를 하며 매달렸다.

“저 진짜 아닙니다. 말 좀 잘해주십쇼! 억울해 미치겠습니다! 그게 끝내주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

윤제희는 그게 끝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위로도 못 하고 해줄 말도 없어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그에게 있어 처음인 일이다.

“최기영, 너 이거 마셔.”

“네?”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후배의 손에 쥐여주니 기영이 눈을 번쩍 떴다.

“이것도 끝내주는 거래.”

두 번가량 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세 번째 전화의 신호음이 두어 번 울렸을 때 그냥 전화를 끊었다. 이제 곧 퇴근이기도 했고 아침부터 몰아댔으니 지쳐 잠든 것이 아닐까 했다.

그 생각만 해도 뿌듯하니 차오르는 무언가가 마음속에 있었다. 퇴근을 하면 집에 재이가 있고 이번에야말로 취기에 보이는 허상도 아닐 것이다. 불안한 거야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더 이상 그런 마음 가지고 싶지가 않았다.

늘 나올 듯 말 듯 그녀를 향하던 초조함들도 어제부로 묻어버리기로 했으니 이제부터는 좋은 생각만 할 작정이다. 이제껏 해주지 못했던 상상 속의 일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재이의 앞에서 현실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머님, 여기 계세요. 제가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어머, 고마워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길에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돌아보게 했다. 윤지도 윤지였지만 환하게 손을 들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여기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우리 큰아들 보러 왔지. 휴대전화 해도 연락도 없고 집으로 갔더니 아무도 없길래 언제 올지 몰라 이쪽으로 다시 왔어. 너 휴대전화 놔두고 갔더라?”

어머니가 내미는 휴대전화를 받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집으로 갔다면 재이를 보았을 텐데, 아니, 봐야만 할 텐데. 준비되지 않은 그녀를 보는 것이 마음 쓰이기보다는 그녀가 집에 없어 어머니가 재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더 그를 날카롭게 했다.

“집에 들르셨다구요?”

“응. 이번 아주머니는 아주 깔끔하신가 보네? 사람 안 사는 집 같아, 얘.”

그가 전혀 바라지 않던 일이다. 점점 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머님, 오신 김에 식사나 하고 가세요. 저도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는데. 제희야, 너도 나갈 거지?”

“그래, 제희야. 엄마 밥이나 한 끼 사줘. 나도 저녁에 다시 제하네 가봐야 하거든. 이 앞에 맛있는 데 많아 보이던데…….”

“어머니, 혹시 집에서 누구 못 보셨어요?”

원래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둘러말하는 체질이 못 됐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어머니가 그에게 되물었다.

“누구 있었어? 손님?”

“일단은요.”

윤지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성격에 안 맞게 사근거리며 이것도 기회다 나서려고 했는데 어쩜 저러나 싶어 숨을 골랐다. 요 며칠간 윤제희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를 제대로 안 받았다.

“하아……, 우선 가요. 가서 저녁 드세요.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의국으로 들어갔다. 이거저거 할 것 없이 바로 휴대전화를 열어 문자함부터 뒤졌다.

[제희야, 엄마 제하네 가는 길에 오후에 좀 들를게. 집에 있니?]

그녀는 보이지 않고 방금 본 어머니의 문자 하나가 다였다. 애끓는 감정에 거칠게 번호를 눌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전화가 꺼져 있다는 무정한 기계음뿐이다.

너는 또 이래. 어딨는 거야. 이제 막 숨 좀 쉬나 했는데 도대체 왜 이래.

“너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아뇨. 괜찮아요.”

“제하네 같이 가지? 이사 가고 한 번도 못 가봤잖아.”

“다음에 갈게요. 저 내일부터 며칠간 병원서 못 나오거든요.”

잘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식사 내내 이야기를 놓쳤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였지만 더 급한 생각이 자리하다 보니 그로서도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서운한 표정의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그도 마음이 좋지 않아 겨우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 괜찮아요.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나야 뭐. 제하가 서운해할 텐데.”

“전화 한번 하죠.”

“그러길래 넌 왜 의대로 가서. 아버지 하란 대로 법대로 가서 대 이으면 좋았잖아. 변덕스럽지도 않던 애가 왜 갑자기.”

바쁜 그를 볼 때마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그럴 때 나오는 그의 대답 역시도.

“저는 좋아요. 만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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