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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화 (1/123)

1화 피폐물에 빙의했습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대던 미오가 가쁜 숨을 헐떡였다. 쏟아졌던 피가 다시 몸 안에 차오르는 기분은 언제나처럼 역겨웠다.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숨을 힘겹게 들이쉬는데, 입 가장자리로 침이 주르르 흘렀다. 널브러진 상태로 눈을 끔뻑끔뻑하는데 솜방망이 같은 발이 보였다.

‘또 여우야?’

다시 짐승의 몸으로 깨어난 지금의 끔찍한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짐승의 하울링만 나왔다.

―아우우.(제기랄!)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 회귀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불에 타 죽고, 검에 찔려 죽고, 돌 맞아서 죽고…….

죄다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전생에 내가 나라를 팔아먹기라도 한 건가.’

도대체 얼마나 악독한 죄를 지었길래, 책에 빙의한 것도 부족해서 죽고 또 죽는 걸까. 억울하다는 말로는 이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책을 읽었을 뿐이잖아.’

미오가 있는 이곳은 《목을 비틀어 너를 취하고》라는 피폐 소설 속이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지오프리는 모종의 이유로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가 지나는 모든 길은 혈흔이 낭자했고, 끔찍한 비명만이 있었다. 그곳에는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여우 수인이 등장했다.

‘나랑 이름이 같잖아?’

하얀 털에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울 게 분명한 여우는 아주 짧게 등장했다. 가련한 여우는 보답받지 못할 사랑에 빠져 있었다. 미오는 이름이 같은 그 여우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여자 주인공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다 희생하는 거야.’

여우는 그녀를 쳐다봐 주지도 않는 지오프리 곁을 내내 맴돌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사랑하는 지오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그를 카스피언 제국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군주로 만들려고.

‘……지오프리는 여우를 한낱 도구로 생각했을 뿐인데!’

그 대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미련하게 죽은 여우를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전혀 몰랐다.

‘내가 그 여우가 될 줄이야.’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믿기 어려웠다.

아니,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그 여우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아니까.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악몽에서 깨는 법을 찾지 못했어.’

미오는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였고 원작의 결말을 되풀이했다. 처음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과 원작을 읽은 상식으로 닥친 위기를 잘 극복할 줄 알았다.

‘극복은 개뿔…….’

작은 털 짐승의 몸이 된 그녀에게 지식이나 원작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지오프리를 만나기 일주일 전쯤일까.’

약간씩 비틀리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녀는 어김없이 지오프리에게 빠졌다. 아무리 그를 멀리하려고 해도 뼛속 깊이 새겨진 각인 효과가 엄청났다.

‘여우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 남자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닌데 말이야.’

호흡은 편안해졌지만, 지쳐서 뭘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오는 그대로 주둥이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일단 좀 자고 다시 생각해 보자.’

하지만 자기도 그리 쉽지 않았다.

웅크리고 누웠는데, 너무 추워서 3분에 한 번은 눈을 떴다.

‘북극여우인데 추위를 타는 게 말이 되냐고?’

미오는 빈약한 털과 작은 몸을 보면서 혀를 찼다. 영하 70도까지 버틸 수 있는 털가죽 같은 것은 다큐멘터리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몸을 숨길 굴을 하나 파야 할 텐데…….’

작은 머리가 핑그르르 어지러웠다.

‘뭘 든든하게 먹어야 할 텐데…….’

떨어진 열매만 몇 개 주워 먹었더니, 속이 허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백 년쯤 뒤에 미라로 발견될지도 몰라.’

이렇게 된 것도 기가 막히는데, 죽는 것은 더 싫었다. 미오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 물이라도 마셔야지.’

비틀비틀 걸어가서 작은 웅덩이에 주둥이를 담그는데 물속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하얗고 긴 털을 가진 작은 여우 한 마리가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눈은 노랑과 주황의 경계선에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외모야.’

물을 마시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그녀는 나무 밑동 근처로 비틀거리며 걸어가서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을 파고들었다. 몰랐는데 이렇게 자면 은근히 따뜻했다.

‘정신 차리자.’

지금 이런 보온력이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인간이 되지 못하면 일 년은커녕 당장 내일모레 죽을 거야.’

조금 더 복잡한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 인간화를 하는 게 급선무였다.

‘싫어도 할 수 없어.’

―크르르.(그 녀석을 찾아갈 수밖에…….)

자라다 만 송곳니를 드러낸 미오가 분한 듯 낮게 으르렁댔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 * *

카스피언 제국은 일 년 내내 냉기가 감돌았다. 약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때, 인적이 드문 숲에 말을 탄 사내들이 찾아들었다.

“카스피언 공작님. 한가롭게 이럴 때가 아닙니다. 성으로 돌아가시죠.”

공작의 종자가 옆에서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겨울에 접어든 숲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갑옷에 와 닿는 햇살이 유려한 그의 얼굴에 반짝임을 더했다. 깊게 잠긴 검은 눈, 촉촉하고 붉은 입술을 한 남자는 마치 숲을 지배하는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 벤 황태자 전하의 생일에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까.”

“누가 나를 기다리겠어.”

그의 입술을 타고 흰 기운이 흩어졌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으시면 괜한 소문이 날 겁니다.”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데 풀숲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지오프리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순식간에 검을 빼 들었다. 반짝이는 검의 끝에는 도토리를 물고 있던 다람쥐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곧장 검을 거둔 지오프리가 음산한 음성을 냈다.

“이를테면 내가 황제와 황태자를 모조리 죽이는 반역을 저지른다는……?”

검날에 얼굴을 비춰 보는 지오프리의 모습에 종자가 몸서리쳤다.

“이곳에 아무리 듣는 귀가 없다지만,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가뜩이나 심약한 사무엘이 걱정으로 입술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정말 내 명에 못 살겠어.’

그의 주인은 이미 나쁜 소문이라는 소문은 전부 몰고 다녔다. 황제는 몇 년 전 카스피언 공작을 변방으로 보냈다. 그곳을 지키던 중 전쟁이 일어났고, 장장 3년이나 이어졌다. 황제는 그동안 장남인 그를 단 한 번도 부르거나 치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주인님이 피를 철철 흘리는 동안에 말이야.’

카스피언 공작의 통솔 아래 변방에 침입했던 야만인은 모두 물리쳤고, 경계는 강화되었다. 카스피언 제국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공작의 삶은 예전보다 피폐해졌다.

‘공작은 피로 목욕을 하는 걸 즐긴다고 하더라.’

‘정원 구석구석에 시체가 파묻혀 있어서 밤이면 카스피언가에서 유령을 볼 수 있다던데.’

그의 주인이 전장에서 저지른 수많은 살생은 모두 카스피언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누구 덕분에 밤에 두 다리 뻗고 잠을 자는지 아느냔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사무엘은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온갖 희생을 다한 주인이 오히려 욕을 먹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속으로만 해야 했다.

‘주인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 말이야.’

소매로 눈물을 훔친 그가 입을 뗐다.

“말에게 풀을 조금 먹여야 할 것 같습니다.”

쉬지 않고 달린 것이 반나절, 말이 조금 지쳤는지 자꾸 멈칫댔다.

“그러지.”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지오프리가 고삐를 사무엘에게 내밀었다. 그는 허리를 편 채 곧장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하늘은 예전 그대로인데, 그의 일상은 왜 이리 달라졌을까.

“……하.”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눈앞에 낙엽 더미가 꿈틀거렸다. 하얀 털이 슬쩍 보이자, 지오프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토끼인가.”

그런 거라면 잡아서 벤에게 생일 선물로 줘도 좋을 것이다.

‘겁 많은 그 녀석의 모자 장식을 하기에 딱 맞지.’

성큼성큼 다가선 그는 곧장 낙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들개?”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다람쥐나 토끼보다는 컸지만, 아직 새끼인 게 분명한 흰 개였다. 어미의 보살핌은 전혀 받지 못했는지, 비실비실한 것이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개의 호박색 눈과 마주친 순간 지오프리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껭.(갑자기 왜 이래?)

한편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미오의 심장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는 헛것을 봤나 했다.

‘하지만 저런 얼굴이 둘이 있을 리가 없잖아.’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검은 눈.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은 미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지오프리를 만나게 된 건 처음이야.’

운명의 신이 이제야 그녀의 손을 들어 주는 모양이었다. 미오는 곧장 주둥이를 길게 내밀었다. 지오프리와 입을 맞추어야 이 지긋지긋한 털 짐승의 몸을 벗어날 수 있다.

―크르르.(얼른 입술을 내놔라. 인간.)

“전혀 쓸모가 없는 녀석이로구나.”

토끼가 아닌 것에 실망한 지오프리는 짐승을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패대기쳤다.

―깨갱, 깽.

미오는 그대로 폭신한 낙엽 더미를 한 바퀴 굴렀다. 너무 황당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짐승을 집어 던지는 놈이라니…….

구르다 보니 뒷다리가 쓸린 것 같았다.

‘도대체 원작 여우는 저 인간의 어디를 보고 반한 거지…….’

몸을 똑바로 한 미오는 다친 부위를 혀로 핥으려다 멈칫했다.

‘팔자 좋게 그루밍이나 할 때가 아니야.’

게다가 지금 저 녀석이 그녀를 들개라고 부른 건가. 지금 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몸집이 작기는 하지만.

―크르르.(야! 인마! 나 여우야. 여우.)

카스피언 숲에서 곰, 늑대 다음으로 포악한 맹수였다. 그런데 들개 따위와 비교하다니 굉장히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미오는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은 이런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지금 그녀는 저 매정한 남자가 꼭 필요했다.

‘나는 널 이용하려는 것뿐이니까.’

화가 나서 곤두선 털을 겨우 가라앉힌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제자리를 돌고 있는 지오프리에게 다가섰다.

―갸르르.(나 좀 봐.)

그는 미동도 없었다.

‘이 정도의 귀여움에도 끄떡없다니, 역시 냉혈한이야.’

할 수 없이 미오는 지오프리의 가죽 부츠에 정수리를 문질렀다. 이것은 여우의 몸으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애교였다.

‘굴욕이다, 굴욕.’

그녀를 몇 번이나 죽였을지도 모르는 녀석한테 애교를 떨어야 한다니…….

그제야 미오를 내려다본 남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훗.’

그 모습에 그녀는 조금 우쭐해졌다. 때가 좀 타긴 했어도 아름다운 흰 털을 한 여우의 애교에 인간 따위가 버텨 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때 지오프리의 그윽한 저음이 들렸다.

“……광견병에 걸린 건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미오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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