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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89화 (189/206)

189화

데베르는 이미 끊긴 교신의 단조로운 기계음을 들으면서도 감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도록.’

허연 성에가 낀 유리창 너머론, 찰나의 잡념조차 사치라는 듯 전투기 프로펠러가 사나운 눈보라를 일으키며 돌아가고 있었다.

“반드시…. 어려운 명령을 하네.”

“군대장님.”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아더가 다가와 허름한 판자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더욱 커진 엔진음이 폭격처럼 귓가에 내리꽂혔다.

“준비됐습니다.”

등을 돌린 데베르는 의연한 표정으로 걸어 나가다 말고, 미미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자네가 하관답게 구는 건 오랜만이군.”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반면, 한숨을 푹 내쉰 아더의 입매는 질색이라는 의미를 담아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있는 대로 군모를 눌러썼기에 그의 푸른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불거진 턱 근육만으로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전하기엔 충분했다.

허연 벌판이 그들의 앞에 있었다. 아직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순백의 들판은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보는 이들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 새하얀 심연 속으로 데베르가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

“가시 범위가 예상보다 짧겠습니다.”

아더의 말에 데베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폭설이 그쳐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하늘은 또다시 부연 거스러미를 흩날려대고 있었다.

털털거리는 전투기에 올라탄 데베르는 머리맡의 유리 덮개를 당기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기회는 양군이 접전인 지금, 단 한 번뿐이야.”

그의 손아귀가 제 가슴팍에 달린 금빛 브로치를 그악스럽게 떼 내 눈밭 위로 던졌다. 이제 이 전선에서 발에 채는 넥서스 군복을 똑같이 차려입은 그에게, 데베르 클리프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건 짙은 잿빛 머리카락과 그와 닮은 눈동자뿐이었다.

“내 공습이 유효하게 끝나지 않을 시, 차기 군대장은 자네란 걸 명심해.”

“헛소리 집어치우고 캐노피나 닫으십시오.”

하관의 권유를 가장한 불손한 명령에도 데베르는 선선히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초탈한 듯한 그 미소가 마음에 걸린 아더가 급히 닫힌 캐노피를 두드렸지만, 그의 친우이자 건방진 군대장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수신호를 보낼 따름이었다.

바닥에 얼어붙어 있던 눈더미까지 갈수록 빨라지는 프로펠러의 바람을 못 이겨 튀어 오르자, 아더는 눈가를 찌르는 얼음 조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데베르를 태운 전투기는 순식간에 굉음을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데베르!”

아더가 고개를 젖혔을 땐, 이미 짙푸른 날개 한 쌍이 도약을 시작한 새처럼 설원 위를 비상한 후였다.

* * *

어둑한 사령부 지하는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붉은 불빛으로 사방이 어지러웠다. 긴 벽면을 둘러싼 채 하나씩 자리를 잡은 통신병들은 들려오는 교신과 정찰병의 보고를 들으며, 손에 쥔 막대기를 이용해 아군 혹은 적군의 위치를 정정했다.

널찍한 사령부 지하의 한가운데에는 넥서스와 브리틴, 코바흐가 모여 있는 전선 지도가 커다랗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위에 있는 작은 장난감 같은 모형들이 바로 그들의 전력을 상징했다.

“종달새, 목표물까지 5분.”

“제10보병연대 후퇴, 지원요청.”

재빠른 손길들에 의해 넥서스군을 상징하는 푸른 모형은 앞으로 가기도, 뒤로 하기도, 때론 아예 지도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건 상대인 브리틴의 붉은 모형도 마찬가지였다.

“브리틴, 서부 1-7 지역 교량 점거.”

붉은 잉크가 전선의 한곳에 죽죽 그어졌다.

“젠장!”

아예 모든 신호가 끊긴 통신병 하나가 거세게 수화기를 내던졌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불행히도 명확했다. 끊긴 신호의 수만큼 넥서스의 병력이 사망했고, 그리하여 딱 그만큼 패전에 더 가까워졌다는 것.

씩씩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베스 제 귓가에 닿는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처음 교신 이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는 데베르의 전화선 코드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불이 들어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이 야속하기만 했지만, 속상함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쿠웅. 쿵. 이번에도 천장이 잘게 진동했다. 종탑 너머로부터 전해지는 희미한 진동은 갈수록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저건 또 뭐야?”

“제기랄.”

갑작스레 부산해진 병사들의 발걸음을 따라 엉겁결에 고개를 돌린 베스는 뜻밖의 인물에 표정을 굳혔다.

“누구든 좀 받아주세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새된 고성이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얼른!”

그곳엔 피범벅이 된 간호복과 군복을 기괴하게 겹쳐 입은 아이네스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부상병을 부축한 채 서 있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병사의 옆구리에서 핏줄기가 푹 솟아올랐다.

“시체 데려온 거 아니니, 그런 눈으로 보실 필요는 없어요.”

탐탁잖은 시선을 눈치챈 아이네스가 톡 쏘아붙이며 허리께에 맨 가방에서 응급 약품들을 꺼냈다. 그녀의 말대로 막상 셔츠를 벗긴 병사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당장의 고통은 심해도 충분히 살아남을 만한 병사였다.

“제길. 언제 시가지 근처까지 온 거요?”

다가온 지휘 장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 와중에 더 상황을 어수선하게 만든 건 단순히 간호사 하나가 부상병을 끌고 들어와서가 아니었다.

부상병의 존재는 곧 적군의 총구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교전이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적군이 벌써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거라면….

최후의 보루인 이 사령부마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상상이 모두의 머릿속을 끔찍하게 헤집어댔다.

“현재 전장 병원은 데베르 군대장님의 명령으로 전부 후방으로 옮겨간 상황이에요. 정확한 위치는 극비, 사안이라 말씀드릴 수 없고요.”

극비를 말하며 아이네스는 제 시선 끝에 앉아있는 베스와 눈을 한 번 마주쳤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시선을 떨구고, 바닥에 널브러진 부상병의 상처를 살피는 데만 열중했다.

“전… 사령부 쪽에도 혹시 모를 비상 응급 인력이 필요할까 봐 홀로 자원해 나온 거예요.”

“읏, 저번, 시가전에서 못 빠져나간 브리틴, 군이 숨어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던 병사가 겨우 상황을 설명했다.

“사살했나.”

“허억, 예….”

깊게 주름이 잡혀있던 장교의 미간은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잠시나마 펴졌다.

“저 끝으로 데려가.”

응급 처치를 미처 마치지도 못한 부상병이 건장한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구석으로 처박혔다. 벽면 가장 끝자리, 베스의 전화 교환기 바로 옆에 난 구석 자리였다.

“아직 매듭도 못 지었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아이네스가 냉큼 뛰어와 그사이 울컥 피가 새 나온 병사의 붕대를 재차 휘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스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아, 베스.”

끔쩍 놀라 입술을 뻐끔거리던 아이네스가 고개를 젓자, 베스는 벌겋게 피로 물든 그녀의 손을 쥐곤 제가 직접 닦아주었다. 가만히 손을 내맡기고만 있긴 민망했는지, 아이네스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간밤에 정신 나간 약혼자가 병원에 왔다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얼굴 보러 온 거라고 하길래….”

사실 그건 울음을 참는 거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울음기가 묻어났다.

지휘 장교 앞에서도 빳빳하게 눈에 준 힘을 풀지 않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속절없이 떨어대는 그녀는 그저 사랑하는 연인을 전장에 보낸 애처로운 한 명의 여인일 뿐이었다.

“허튼 말씀 하시는 분은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꼭 뭐라도 아는 것처럼 하는 말에, 아이네스는 꼭 눈앞의 여자가 정말 제가 아는 베스 제인스 같아 슬쩍 웃었다.

“게일을 모르시면서….”

저도 모르게 감상에 빠졌던 아이네스는 큼, 목소리를 고르곤 벌떡 일어섰다.

“다시 나가봐야겠어요. 기관포 진동이 가까워지는 게 영 낌새가 좋지 않아요.”

흐트러진 의료 가방을 단단히 고쳐매고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앞을 지휘 장교가 가로막았다.

“우리가 받는 부상병은 딱 저 벽에 붙은 놈 하나까지요. 후송도 불가한데, 괜히 이곳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고-”

“그럼, 잿더미 위에 내버려 두고 폭격기의 표적이라도 되라는 말씀인가요?”

“제기랄. 상황 좀 보란 뜻이었소!”

흥분한 장교가 작전 지도가 놓인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치자, 성인 남자 두세 명은 족히 누울만한 테이블 다리가 돌연 바르르 떨렸다.

“엇.”

비단 장교의 악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쿠궁. 종탑 머리 어딘가에서 벽돌이 어긋나는 소리가 지하까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불행의 징조 같은 떨림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그때, 때아닌 베스의 교환기에서 붉은빛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푸, 푸른.]

들려오는 교신에 급히 수화기를 고쳐 쓴 베스는 조심스레 전화선 코드를 붙잡았다.

[미확인 물체 발견.]

[푸… 숲.]

두 개의 교신이 어지럽게 얽혀 동시에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베스에게로 향했다. 그 틈에도 종탑을 울리는 진동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아군 전투기로 추정. A-40, 동부 브리틴 1군 방향으로 약진 중.]

“전형에서 벗어난 아군 전투기, 적진으로 돌진 중!”

선명한 보고가 베스의 한쪽 귓전을 때림과 동시에, 관측경을 들여다보던 옆자리의 정찰병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베스와 정찰병 두 명에게로 나뉘었다.

[브리틴 공격 태세로 우측에서 접근한다. 예상 거리 2분.]

“적군 빠르게 접근, 엇…!”

[요격 실패. 추정 인물 보고 바람. 들리는가.]

“격추당했습니다!”

일순 안색이 파리해진 지휘 장교의 언성이 높아졌다.

“대체 어떤 새끼야!”

“그, 게일 웰링턴 대령님이 모시는 전투기 같습니다. 현재 낙하산 추락 중.”

이제 베스를 향한 시선은 아무도 없었지만, 혼미한 보고는 오로지 그녀의 귓가에만 들려오고 있었다.

[붉은 낙하산. 중상 예상. 엇, 제기랄. 뭐야?!]

“군대장님?”

곁에 선 정찰병을 숫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밀친 베스는 관측경에 제 눈을 가져갔다.

동그란 망원 렌즈 속에서 적군의 기관포에 날개가 잘린 넥서스 전투기가 불에 타며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고 선명한 붉은 점이 느리게 떨어지는 것 또한 보였다. 내려앉는 눈송이처럼 똑같이 새하얘야 할 낙하산이 온통 피에 젖어 불그죽죽한 채로.

그 순간, 한참을 치직거리며 끊어졌던 나머지 신호가 베스의 남은 정신마저 갈고리처럼 낚아챘다.

[…푸른 숲이, 잡혔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것만큼은 구분할 수 있었다.

[다시 보고한다. 푸른 숲이…]

안 돼.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잖아.

“비, 상… 억!”

그때. 돌계단 위에서부터 요란스럽게 병사 하나가 뛰어 내려왔다. 하지만 그건 제 의지라고 볼 수 없었다. 좁은 계단 벽면에 이리저리 둔탁하게 몸을 부딪쳐대다, 결국엔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모습은 절대 제 뜻이라고 볼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엎어진 병사의 가슴팍에서부터 죽죽 쏟아지는 핏줄기가 바닥 위로 부지런히 번져갔다.

그가 종루를 지키던 정찰병이란 것은 사령부에 속한 모두가 아는 바였다.

쨍한 고요가 순식간에 사위를 잠식했다.

꼭 누가 쥐고 흔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떨리는 종탑은 지하실에 모여 있는 이들의 공포를 닮아있었다.

“여기가 맞나?”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쯤이었다.

“맞겠지. 아까 전 네가 쏜 놈이 헐레벌떡 여기로 내려갔잖아.”

넥서스어보다 높낮이가 뚜렷한 억양. 비슷하면서도 다른 단어. 어쩔 수 없이 이방인임이 드러나는 특유의 색깔.

“아, 맞네.”

계단참에서 굼뜨게 허리를 숙인 침입자가 거무튀튀한 입술을 씨익 비틀었다.

“쥐새끼들. 여기에 다 있었네.”

브리틴어였다. 결코 이곳에서 들려선 안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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