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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90화 (190/206)

190화

대번에 소총을 들어 올리려던 장교의 손이 멈칫했다. 그건 비슷하게 총구를 잡으려 손을 뻗던 다른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감히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조롱하듯 달랑거리는 수류탄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장이 사령부는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했어. 나중에 혈통 보고 거래할 놈들 고른다고.”

“빌어먹을. 재미 좀 보려나 했더니.”

사령부에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는 두 명. 절뚝거리며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부상병 하나까지 포함하면 총 세 명이었다.

하지만 밑바닥 생을 전전하다 칼론의 끄나풀이 되어 기회를 잡은 그들에게선 일반적인 브리틴 병사들보다 훨씬 기이한 분위기가 풍겼다.

“으억…!”

틈을 봐 잽싸게 총구를 겨누려던 지휘 장교가 순식간에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채 방아쇠에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끄, 으윽….”

“별것도 아닌 새끼가.”

나름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듯한 사내의 총구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미약한 화약 냄새에 섞인 피비린내가 역병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 새끼는 브리틴어를 알아듣는 거 같은데? 이봐, 귓구멍 똑바로 박혔으면 알려. 살고 싶으면 무릎 꿇으라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장교의 머리통을 낯선 군화가 잘근잘근 짓밟았다.

“다들 무릎, 꿇, 어….”

아군 장교의 명령을 듣고 나서야 굳어 있던 넥서스군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애초에 귀족가 자제가 아니면 외국어 공부는 사치나 다름없었기에, 모여있는 이들 대부분은 제 귀에 들리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했다.

눈앞엔 아군의 시체. 공격당한 지휘 대장. 해석되지 않는 말들. 여러모로 공포를 배가시키기엔 충분한 조건이었다.

무릎을 꿇는 척 상체를 굽힌 베스는 몇 걸음 떨어진 아이네스에게 바짝 붙어섰다. 그리고 이미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를 작전 지도가 놓인 테이블 밑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아이네스가 힐끔거리며 베스를 쳐다봤지만, 얌전히 눈을 내리뜬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통역해. 여기 간호사나 의사 있으면 손들어. 특별히 걔네만 살려줄 거니까.”

“가, 간호사… 의사, 살려준다고, 윽.”

대번에 브리틴어를 알아들은 아이네스의 손이 저도 모르게 가늘게 떨렸다. 굵직한 테이블 다리 뒤에 머리통을 숨긴 그녀는 어깨에 저보다 큰 군복을 걸친 탓에 얼핏 그저 일개 병사로 보였지만, 조금만 일어선다면 안에 입은 푸른 간호복이 보일 게 분명했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없어?!”

베스는 모은 손끝을 파들거리고 있는 아이네스를 일별했다.

“젠장. 쓸모도 없는 것들 그냥 죽여버려! 대장한텐 자기네들끼리 자폭했다고 하지, 뭐.”

허벅지에서 피를 철철 쏟아내던 브리틴병이 분을 못 참고 발악을 해댔다. 쥐고 있던 수류탄 핀을 금방이라도 뽑아버릴 듯이 고쳐 잡는 꼴이 그러했다.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아이네스가 손을 들어 올리려는데, 갑자기 끼어든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흔들리는 아이네스의 눈동자와 달리, 새카만 눈동자는 그녀를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안돼. 딱 아이네스만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약한 고갯짓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기적이지 못한 아이네스의 천성이 그 권유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벌벌 떨어대던 그녀가 고집스럽게 일어나려는 찰나. 순간적인 악력이 낡은 의료 가방 후크를 세게 잡아당겼다. 툭, 힘없이 끊어진 가방끈이 옆으로 흘러내리자마자 베스의 손이 잽싸게 그 끈을 낚아챘다.

“저예요.”

엎드리다시피 몸을 수그린 아이네스는 멍하니 고개만 들어 올렸다.

“제가, 그 간호사예요.”

제가 해야 할 말을 대신하는. 그것도 상당히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브리틴어로 말하고 있는 교환원을 향해서였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베스는 의료 가방을 쥔 손을 위로 치켜든 채, 한 걸음 한 걸음 적군이 있는 돌계단 앞으로 다가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커먼 총구가 동그란 이마를 겨누었다.

“브리틴어를 할 줄 안다고?”

“조금.”

미심쩍은 눈빛이 베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샅샅이 훑었다.

“거짓말인 걸 들키면 네 손으로 여기 있는 넥서스 놈들 다 죽이게 할 거야.”

킬킬거리는 비웃음이 뒤통수에 대고 들려왔지만, 베스는 차분히 총구를 피해 부상병이 기대앉은 계단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거기, 너. 데베르 클리프 교신 몇 번이야.”

시선을 받은 애꿎은 통신병 하나가 주춤거리며 교신기 앞으로 기어갔다. 알아들었을 리는 없었으나, 눈치껏 데베르 클리프란 이름만 알아듣고 움직인 거였다.

“크게 틀어.”

거의 정신을 잃은 거나 다름없는 장교는 더 이상 통역은커녕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못 알아 처먹어?! 이래서 더러운 넥서스 놈들은.”

연신 입술을 짓씹어대던 베스는 이어지는 분에 찬 욕설에 기어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코드 번호 73번. 전체에게 들리게끔 틀어 주세요. 아까 전까지 연결돼 있었어요.”

아, 그제야 알아들은 통신병은 일개 보조병보다 훨씬 능숙한 솜씨로 손을 놀렸다. 자그마한 수화기로만 들리던 소리가 작전지 위의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 연결. 들, 리는…]

깨끗지 못한 목소리는 아더의 것이었다.

차라리 끊겼으면.

베스는 원치도 않는 브리틴군의 상처를 살피며 간절히 되뇌었다.

제발 끊겨. 제발. 그 어떤 소식도 전하지 마.

[작전은, 실패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의 바람마저 지금은 사치라는 듯, 잔인한 통보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은 사령부에게 연이어 전해졌다.

[다시 전달한다. 작전 실패. 푸른 숲은…]

무거운 침묵이 사위를 감돌았다. 쓱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가 이상스런 낌새를 간파하곤 이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사이에도 베스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핏물로 엉망이 된 브리틴 병사의 허벅지에서 총알을 꺼냈다. 핀셋에 달려 나온 탄피는 넥서스군의 것이었다. 저 차가운 바닥에서 운명한 정찰병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증표였다.

“윽, 이 여자 진짜 간호사 맞는 거 같은데?”

베스가 하는 양을 헐떡거리며 지켜보던 부상병의 말이었다.

“잘됐네. 데려가.”

밑에서 휘파람을 부르자, 신호를 들은 또 다른 브리틴 병사 두 명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턱짓하자,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단번에 베스의 어깻죽지와 양손을 결박했다.

그 모습에 테이블 밑에 바짝 몸을 숙인 아이네스의 등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움찔거렸다. 불안스레 동요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베스는 작게 눈썹을 들썩였다.

안 돼, 아이네스.

옆을 흘깃 쳐다본 후,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네스를 향해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날 믿어.

순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득한 표정을 짓던 아이네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또 울음을 참기라도 하는지 여린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긴 했지만, 다행히 더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뭐해! 얼른 안 데려가고!”

험한 손길에 짐짓 짐승 끌려가듯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베스가 안도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어둑한 지하에 익숙해져 있던 베스는 지상을 향할수록 쏟아지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끌려가는 듯한 낯선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로도 그렇긴 했다. 아군의 점령지였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종탑 주위엔 짙은 죽음의 냄새와 함께 몇 대의 브리틴 군용차만이 세워져 있었으니까.

“저 차에 태워.”

밧줄에 양손이 결박된 베스의 몸이 차 뒷좌석에 박히듯 던져졌다.

차머리가 주저 없이 설원을 내달리기 시작한 걸로 봐선, 이미 주위는 전부 브리틴 군이 점령한 모양이었다.

“데베르는-”

“입 닥쳐.”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창밖을 쳐다보는 베스를 곁눈으로 살폈다.

“저 계집애 브리틴어를 알아.”

베스는 저를 향해 그들이 뭐라 시시덕거리든 까마득한 설원 너머의 티끌만 한 붉은 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 남자가 타고 있었을 전투기일 게 분명했다. 어쩌면, 미처 빠져나오지조차 못했을지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베스는 밀려드는 불안을 애써 지워 내려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백미러로 지켜보던 남자가 짧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눈 가려. 아무것도 기억 못하게끔.”

* * *

아직 해가 저물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창문 하나 없는 밀실은 한 줄기의 빛조차 허락지 않았다. 그 암흑 같은 공간을 채우는 건 습한 지하 특유의 쿰쿰한 냄새뿐이었다.

“제대로 데려온 거 맞아?”

끼익, 녹슨 이음쇠의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타인의 등장을 알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불빛에 의자에 묶인 인영의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였다. 척 보기에도 축축이 젖은 군복은 눈발에 젖은 것인지, 핏물에 젖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터벅거리던 묵직한 발걸음은 인영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아.”

약간은 감탄에 찬 탄식이었다.

붉은 뒤통수가 제 앞에 놓인 인영을 향해 기울어졌다. 안대에 눈이 가려져 있긴 했지만, 벌써부터 터진 입술이며 희미한 멍 자국이 남은 얼굴을 보자 기꺼운 감정이 샘솟았다.

드디어.

마침내.

“맞는 것 같긴 한데.”

천연덕스러운 소리를 내며, 안대 위로 흩어져 내린 잿빛 머리카락을 사납게 움켜쥐었다. 남자의 고약한 손버릇에 강제로 치켜들어진 인영의 턱 끝이 날렵했다. 기절이라도 한 건지 그가 제멋대로 뒤흔드는 손짓을 따라 잿빛 머리통이 맥없이 휘청거리는 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뭐야. 재미없게 이러면 안 되지.”

배어난 즐거움을 참지 못한 목울대가 낮게 끅끅거리자, 비릿한 미소를 띤 입술이 길게도 찢어져 올라갔다.

“내가 데베르 공작님과 재미 볼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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