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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54화 (154/206)

154화

“이젠 내가 좀 간절해졌어?”

지나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귓가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얕게 떨리고 있는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감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온기에 베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보스넬 구치소는 미로 같은 곳이야. 특히나 독방은 함부로 도망칠 궁리조차 할 수 없게끔 창문 하나 없지.”

습기 찬 바닥을 타고 낮은 음성이 뱀처럼 기어 왔다.

베스는 형체도 없는 그 목소리가 제 발목 어딘가를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널 여기서 함부로 대하진 못해. 설령, 네가 첩자라 의심받을지언정.”

그가 설핏 미소 지었다. 한쪽 입꼬리만 슬쩍 당겨 문 탓에 미소보단 비소를 닮은 그 웃음을 매달고는 가만히 속삭였다.

“베스 제인스는 죽을 때까지 클리프 부인일 테니까.”

첩자인 클리프 부인. 철장 안의 여자와 그 밖에 선 남자만큼이나 지독한 괴리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베스는 벌벌 떨리는 입술을 애써 달싹여보았다. 겁을 집어먹기라도 한 건지, 목구멍은 또다시 콱 틀어막혀 쇳소리 같은 음성만 튀어나왔다.

“오, 올리비아는….”

“유감이야.”

유감, 유감….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답의 기저를 찾기 위해 베스는 계속해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어느 기억의 편린을 발견한 순간, 슬며시 그에게 잡힌 모가지를 빼냈다. 피했다고도 할 수 없는 그 미세한 움직임에도 데베르의 동공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베스는 그 기민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유감이야.’

루카가 경관에게 잡힌 날, 터무니없이 도둑으로 몰린 아이가 울부짖던 그 날에도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제 약혼녀가 어떻게 매달리든, 무슨 변명을 하든 상관없이 그날의 희생양은 루카가 되어야 한다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또다시 같은 말을 한다. 유감이라고.

“약간은 기분이 이상하네.”

의중을 알 수 없는 한마디에 적막한 공기 속으로 긴장이 피어났다.

“막상 가장 더러운 바닥에 엎어져 있는 널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

짙은 눈썹이 돌연 구겨졌다.

데베르는 질척한 바닥만큼이나 제 마음 또한 엉망으로 짓밟히는 것을 느꼈다.

보스넬에 발을 디디고, 저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보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저열한 마음 한구석에선 희열이 올라왔다.

네가 내게 유일한 손길이었듯, 나도 이곳에서만큼은 너의 유일한 숨통이야.

지질한 소회를 홀로 되새기며 결국 이긴 싸움이란 승리감에 도취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마도, 네 겁먹은 눈망울 때문이겠지.”

여자는 몰랐다. 그녀는 언제라도 그를 구렁텅이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고작 겁먹은 눈빛 한 번, 그를 피하는 작은 몸짓 한 번으로도.

그걸 모르는 이 여자의 무지는 지독히 다행스러우면서도, 미치도록 잔인한 일이었다.

데베르는 툭툭, 두서없이 튀어 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가슴을 들썩였다.

“…이 진창에서 널 구해줄게.”

다시금 끈질긴 손길이 베스의 뺨으로 따라붙었다.

베스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어둠에 익숙해지고도 남은 그녀 또한 미묘하게 달라진 남자의 태도를 희미하게나마 눈치채는 중이었다.

“사면권을….”

그래서 빌어 볼 생각이었다. 이젠 빌어야만 했다. 그는 이런 걸 원하는 사내일 테니까.

“사면권을… 베풀어주세요, 공작님….”

“…뭐라고.”

“사면권을, 흡. 허락해주세요.”

“누구를.”

되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일순 차가워졌다.

“오, 올리비아를요. 공작님도 보셨잖아요…. 운이 없었고, 카시우스 공작님을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꼭 그녀 자신을 향한 말 같았다. 난 운이 없었을 뿐이고, 데베르 당신을 해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 여자가 카시우스 공작을 해치지 않으려 했다는 증거가 있나?”

“그건.”

베스는 버석한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저 제 어미라면, 기억 속의 그 어머니라면 본인의 안위를 위해 누군가를 해하지 않았으리란 추측이었다. 바람을 달리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더디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따라 베스의 시선도 한 박자 늦게 위로 올라갔다.

“군대장에게 사면권이 몇 번이나 주어진다고 생각하길래.”

고압적인 눈빛이 아득한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굵직한 쇠창살 탓에 죽죽 세로선이 난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한 번….”

“그걸 알면서도, 이런 부탁을 한다니.”

혼잣말이 아니었다. 따져 묻는 것이었다.

“사면권을 써서 그 여자를 내보내면, 그럼 넌. 베스 제인스 넌 어떻게 되는 거지?”

“…….”

베스의 계획의 끝은, 언제고 그녀 자신의 소멸이었다. 그게 가장 완벽히 모든 것을 매듭지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한번 마음을 정한 이후론 다시는 내린 선택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그 완벽한 매듭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올리비아, 아니. 베스 릴리아드의 죄는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어. 내 문제는 여기서 클리프 부인인 널 어떻게 빼내냐는 거야. 고작 이따위 창살이 아니라…! 네 그 더러운 과거에서.”

‘이따위 창살’을 말하며 데베르는 참지 못하고 창살을 거세게 흔들었다. 우악스런 손아귀 아래 파들거리는 창살이 요란한 소리를 내자, 여자의 어깨도 함께 화들거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쾅. 차마 성질 것 더 흔들 수도 없어 내리친 주먹이 둘 사이를 가로막는 창살에 꽂혔다. 쟁쟁거리는 쇠 울음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자, 다시 사위엔 어둠을 닮은 고요가 내리 앉았다.

끔찍한 침묵을 깨는 건 이번엔 데베르의 몫이었다.

그는 눈을 더욱 내리깔았다. 또다시 그 심연 같은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한때 그의 흉터를 더듬던 작고 흰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껏 네가 세운 그 잘난 계획 중에… 네가 사는 수도 있었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해. 소식지에 가십을 밀고하고, 만년필을 훔치고, 무언가 해 보겠다 온갖 짓을 아등바등하던 그 모든 순간에… 네가 살아남는 수가 있었어?”

베스는 찝찔한 피가 새 나오는지도 모르고, 입술을 짓씹었다.

어미를 살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고, 원수를 죽이는 수는 모두 있었지만, 내가 살아남는 수는 없어요. 그 쉬운 대답이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남자가 분노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꽤나 맹렬히.

“말하라고 했어.”

아니다. 베스는 제 판단을 정정했다.

슬퍼하고 있구나.

어째서…? 당신 앞에 원치 않는 흉터처럼 나타난 내가, 흔적 없이 사라지겠다는데.

“…없군.”

허탈한 한숨이 들려왔다.

“…네가 살아남는 수 따윈 없었어.”

애초에 없었던 거야, 처음부터.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남자의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였다. 그 사이로 언뜻 비친 물기에 베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리려다, 얼른 두 손을 모아쥐었다.

“잘 알아들었어. 네 대답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데베르는 서서히 낯을 굳혔다.

순진한 눈가의 물기 뒤로, 비틀린 애정의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데베르 자신조차도.

* * *

빛 한 점 없는 창살 아래에서 베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어쩌다 정신을 차린 순간엔 누군가 왔다 갔는지 발치에 식사가 놓여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간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란 남자의 말은, 곧 아무도 그녀를 대면하지 않을 것이란 말과 똑같다는 것을 며칠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실상 그 며칠이란 것도 자의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여기군.”

베스는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에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늘어진 몸뚱이는 바닥에 눌어붙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이것도 꿈일 수 있으니까.

무력한 몸을 핑계 대기 위해 베스는 끝없이 이어지던 꿈 탓을 했다.

“결박해야 하나?”

“반항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기절한 건가, 아니면 잠든 건가?”

갑작스레 들이밀어지는 주홍 불빛에 베스는 신음을 뱉어냈다. 거대한 빛무리에 정작 등불을 든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누, 누구.”

“아, 정신이 있구먼. 잡아.”

순식간에 단단한 몸체가 베스의 양팔을 붙잡았다.

“누구, 여기, 읍…!”

입이 틀어막힌 베스가 발버둥을 쳤다. 저항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이 퍼뜩 들어 되는대로 팔을 내저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얼른 하고 나가시죠.”

“그게 좋겠습니다.”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대여섯 명의 무리는 모두 발목까지 오는 시커먼 로브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들리는 목소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읍…!”

그중 하나가 무릎을 굽히더니 베스의 소매를 걷었다. 얼핏 보이는 반짝이는 바늘에, 두툼한 손바닥에 가로막힌 베스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부인. 가만히 계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해할 뜻은 없어요.”

멀찍이 선 새로운 인물의 목소리였다.

푹 꽂히는 주삿바늘에 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굵은 바늘을 타고 제 안의 무언가가 흘러나가는 느낌이 선연했다.

장갑을 낀 채 그녀의 피를 뽑은 이는 능숙하게 일을 마무리 짓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끝난 거요?”

주사기를 든 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원히 베스의 몸을 결박하고 있을 것 같던 손길도 담백하게 멀어졌다.

“아….”

밀려오는 탈력감에 베스는 털썩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 뽑은 피를 가방에 넣던 복면 하나가 뒤를 돌아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베스는 다시금 긴 잠에 빠져들었다.

철옹성 같은 보스넬 구치소의 문을 벗어나자마자 초겨울의 건조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갑갑할 정도로 몸을 꽁꽁 싸맨 로브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자취가 을씨년스러워, 몇몇은 몸을 흠칫 떨었다.

“다들 타시죠.”

복면을 쓴 이들은 모두 문 앞을 기다리고 있던 차 한 대에 함께 올라탔다. 서로가 서먹한 모습들이, 일행인 듯 남인 듯 묘한 동행이었다.

“제국 병원으로.”

그 중, 어느 복면 아래에서 나직한 중년 부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할 짓이 못되군요.”

다소 거칠게 복면을 벗는 이의 주인은 바로 몰리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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