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몰리 부인이 복면을 벗자, 곁에 앉아있던 이들도 주섬주섬 복면을 벗었다.
하나둘씩 드러나는 얼굴들은 모두 넥서스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세상에 친자 확인 검사 같은 것도 있다니. 전 폐하께서 그런 걸 알고 계시는 줄도 몰랐습니다.”
동조를 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몰리 부인은 부답했다.
부인의 어깨에 메인 가죽 가방엔 혈액이 담긴 병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하나는 올리비아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베스의 것이었다.
“휴….”
창턱에 올린 손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자, 밤늦게 몰리 공작가를 찾아왔던 데베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베스의 구금에 아연실색해 있는 그녀를 찾아온 데베르는 모골이 송연할 만큼 차분한 태도로 일관했었다.
‘내일이면 아더가 그 여자와 베스의 친자 확인을 하라는 명을 내릴 겁니다.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친황제파와 반황제파가 섞여 부인의 뒤를 따를 예정이고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베스가 정말로….’
데베르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다면, 데베르 공작. 혹시 콜린스를-’
‘사면권의 행사는 곧 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존경받는 제국의 의사이자 공작인 부군을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죠. 제국 법정이 다시 개정하면, 아더의 치하에서 해결될 일입니다.’
그녀의 상념을 담은 차는 부지런히 거리를 달려, 제국 병원 앞에서 멈추어 섰다.
몰리 부인을 필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너스레를 피우며 검사실로 들어서자 자연히 의료진들의 이목이 쏠렸다.
“다른 혈액은 없습니다.”
보스넬에서 베스의 몸을 결박하던 수하들이 이번엔 검사실을 샅샅이 뒤진 후 내놓은 결론이었다.
“들으셨겠죠. 이곳에 두 혐의자를 제외한 다른 이의 혈액은 없다는걸. 그럼 이만 나가주세요. 저도 집중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부인은 경련하는 손을 남모르게 맞잡았다.
영 찜찜하단 얼굴로 연신 주위를 살피던 무리가 검사실을 나가자, 그녀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훔쳐냈다. 침착을 되찾으려 숨을 고르며, 올리비아의 혈액을 꺼내 들었다. 작은 병 안에 찰랑거리던 피는 곧 창가 화분의 고른 흙더미 속에 버려졌다.
몰리 부인은 소리 없이 새 주사기의 바늘을 꺼내, 제 팔뚝에 내리꽂았다.
* * *
갈수록 시려오는 바깥 공기와 달리, 웨인은 이상스런 열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소식지 읽었어요? 글쎄, 그 양녀가 제 어미랑 피가 일치하지 않는대요.”
“몰리 부인이 황궁 감시 아래에서 직접 검사까지 했다는데 완전히 다른 피라더군요.”
“그럼 대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즉위식에 실려 온 그 거죽 같은 여자가 백작의 사촌이 아니든지, 알고 보니 클리프 부인이 귀족 핏줄이 아니란 거겠죠.”
“흥, 아직도 거기까지밖에 모르시나요?”
누군가의 콧방귀 소리에 가십에 목마른 눈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그보다 수상한 게 있는데.”
“뭐, 뭔데요?”
화려한 부채 뒤에 가린 입술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 부인을 전담하던 시녀가 갑자기 항구에서 죽었다더군요.”
“에? 뭐 그까짓 시녀야….”
부인들의 김이 새려는 찰나, 재빠른 속삭임이 티테이블 위로 던져졌다.
“주머니에 어마어마한 돈이 있었다네요. 일개 사용인 따위는 엄두도 못 낼 정도의.”
아둔한 부인들의 얼굴 위로 의문이 피어올랐다.
붉은 입술이 그 멍청한 얼굴들을 보곤 나직이 웃었다.
“그 시녀가 실은, 하워드의 숨겨놓은 딸이랍디다. 시녀로 위장해서 같이 첩자질 하다가 들킬 위기에 처했고, 제 딸 먼저 외국으로 도피시키려다가 사달이 난 거라고요. 뭐, 즉위식에서 한 건 사촌을 희생양으로 써서 꼬리 끊으려는 일종의 쇼랄까?”
경악에 찬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 시녀, 저번엔 클리프 군수회사에서 도둑질도 하지 않았어요?!”
“사실 하워드 백작이 외국을 전전하다 넥서스에 정착한 건 모두가 아는 얘기잖아요. 바깥에서 뭔 짓을 하다 기어들어 왔는지 어떻게 아나요. 어휴, 소름 끼쳐.”
“하워드 부인도 말할 때 보면 은근히 브리틴 억양이 있어요.”
흥분이 덧대어진 추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웨인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 바람을 순풍이라 생각하는 이는 오직 데베르뿐인 듯싶었다. 제가 불어낸 추문에 사뿐히 올라탄 그는 곧 있을 재판을 위해 태연하게 법정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선황제의 서거 이후, 첫 공판이었다.
사람들은 비감에 찬 공작을 보고자 꾸역꾸역 재판장 안팎으로 모여들었고, 날 선 데베르의 태는 꽤 훌륭히 그 역할을 해내는 중이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제법 곱상한 선이 보이던 그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더할 나위 없이 여문 청년의 태를 보이고 있었는데, 결혼식을 올린 이후론 묘하게 농익은 분위기까지 풍겼다. 그 모습이 마치 카시우스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해, 나이가 지긋한 귀족 부인들은 저들끼리 그 사실을 떠들어대곤 했다.
“일동 기립!”
아더의 등장과 동시에 첩자 올리비아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증거는 넘쳐났고 결말은 뻔한 재판이었다.
다만, 예상외의 지점은 데베르 공작이 올리비아가 첩자란 사실을 증명하는데 꽤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번트의 농사꾼 부인이 한 차례 증인을 선 후, 낯선 여인 하나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대략 이십오 년도 더 된 일입니다. 제가 올리비아를 데리고 있었던 때는요.”
야살스럽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연을 보고 싶은 자들은 누구든 제 가게로 왔고, 거기에 카시우스 공작님 또한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피고인이 카시우스 공작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그건 모르죠. 올리비아는 그곳에 있던 가수였으니까요. 곧 사라졌기 때문에 그 애를 오래 데리고 있진 못했습니다. 듣기론 다리를 저는 한미한 남자 하나를 따라갔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눈길이 재판장 한편에 짐짝처럼 놓인 여체로 향했다. 의식조차 없는 그 꼴을 보자 캐 묵은 감정이라도 올라온 건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입술이 곧 울듯이 비틀렸다.
하워드는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공작은 꼭 아군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꼬리 끊기를 도와주고 있었으니까. 릴리아드 가문 얘기까지 꺼내면 더 궁지에 몰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
여차하면 제출하려 했던 ‘아이가 있다’라는 카시우스의 편지 사본을 만지작거리던 하워드는 곧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확신을 가져도 될 때였다. 그의 베스들은 아직 유효한 패라는 것을.
“……혐의를 인정하는바, 유죄를 선고한다.”
긴 재판의 종지부를 찍는 말과 동시에 다음 재판이 곧바로 이어졌다.
“백작이 직접 제출한 밀서를 통해 최근까지 첩자가 브리틴과 접촉한 정황이 증명되었지만, 이 일의 용의자로 보스넬에 수감된 베스 클리프는 심신 미약으로 재판정 출두가 불가하고, 그 시녀는 이미 사망한바 증인들의 증언만 듣도록 하겠소.”
이번 차례는 딕시였다.
다소 쭈뼛거리며 단상에 올라선 그녀의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다.
“시녀가 딕시 콜먼 양을 찾아와 외국으로 도피할 거처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던데”
“아, 도피라고 할 수는 없고… 저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기는 했습니다. 마침, 루카가 가는 목적지가 제 언니가 있는 곳이라서요.”
“그 시녀의 여비가 풍족했나?”
“잘은 모르지만, 부족하지는 않을 정도로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딕시는 제가 아는 것만을 말했지만, 재판의 흐름은 미묘하게 정해진 한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거짓은 말하지 않되, 듣는 이로 하여금 상상은 자극하게끔. 아더는 재판장으로서 딱 그 정도의 개입만을 하는 중이었다.
좀 더 치밀한 판을 위해 몇몇 의미 없는 증인들이 단상을 오르락내리락한 후, 마침내 데베르가 그 자리에서 섰다.
“일전 제 아내의 시녀가 심야를 틈타 군수회사에 숨어들었던 사건 당시, 저는 위증했습니다.”
대번에 위증이란 폭탄을 터뜨려 흐려진 분위기를 집중시켰다.
술렁이는 장내에 상관없이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집무실 금고가 손을 탄 흔적을 발견했으나, 아내와 하워드가의 위신을 생각해 장식품을 도난당했다 거짓을 말하고 선처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 말은 곧 공작의 부인인 베스 클리프 또한 유력한 용의자라는 뜻이군.”
두 친우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본격적인 극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넥서스를 위해 헌신해온 클리프 가의 가주이자, 제국의 군대장으로서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베르는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장내를 천천히 둘러봤다. 부러 공개 재판을 진행한 보람이 있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유달리 귀족 부인들의 참석률이 높은 게 눈에 빤히 보였으니까.
그는 여우처럼 굴어야 할 때를 잘 아는 자였다. 필요만 하다면 언제든 약게 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아시다시피 클리프가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첩자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택의 사용인, 군부대의 부하, 친우, 사업 상대, 그리고 여인들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전부 먼저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라 사료됩니다. 첩자는 숲속에 얌전히 놓인 덫 같은 존재가 아니니까요.”
어느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재판장 안엔 오직 데베르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베스 제인스 양이 첩자였다면 제게 먼저 다가오는 것이 수순이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멋쩍은 듯, 한 손으로 제 턱을 쓸어내렸다.
“촌각을 다투는 전장에서 제가 먼저 그녀를 발견했고, 먼저 접근했고, 먼저 구애했습니다. 신분을 이유로 청혼을 거절하는 그녀에게 매달린 건 접니다. 결국, 제 철없는 사랑을 견디다 못해 떠나가게 만든 것도 저고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직한 고백을 토해냈다.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을, 데베르 공작의 이면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적당한 계산이었다. 가십은 이런 걸 좋아하기 마련일 테니.
“어떤 비극이 겹쳐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미친 듯이 갈구해 베스 제인스 양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만이 분명하겠네요. 대체, 어떤 정신 나간 군대장이… 첩자에게 스스로 찾아가 매달린단 말입니까.”
증언대를 꽉 쥔 굵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떠들어대고 싶을 만큼 달콤한 얘기를 흘려주자.
무릇 저들은 진실을 믿는 게 아니라, 진실이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존재니까.
“…말 그대로 미치지 않고서야.”
데베르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 * *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베스의 위로 희미한 서광이 비쳐들었다.
끼이익. 철컥.
철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눈이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