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13화 (113/206)

113화

<2부>

오만.

데베르는 손에 들린 쪽지를 읽으며 저를 향한 세간의 평판 중 하나를 떠올렸다. 그 안엔 단정한 필체로 더러운 소문이 빼곡히도 적혀 있었다. 데베르 클리프라면 모를 수 없는 필체였다. 언젠가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 필체처럼 말할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함께 쥐고 있던 시가 불이 종이 끄트머리를 그을리자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소위 ‘소식지’라 통칭하는 넥서스 황색지의 발행인은 다름 아닌 데베르 클리프였다. 정확히는 그의 것이라기보단 그의 가문인 클리프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가장 귀한 것을 취하고 싶다면, 가장 천한 것에 발을 담글 줄도 알아야 한다.’

카시우스는 뱉은 말을 징글맞게도 지켰다. 클리프가를 향해 불어만 가는 추문과 멸칭을 두려움으로 이용했고, 적당히 아둔한 치들을 동요해 제 편으로 만들었다. 바로 이 ‘소식지’를 통해.

그리고 데베르는 그의 아들이었다.

철저히 카시우스의 손 아래에서 자라난 데베르는 그의 방식을 따랐다. 아버지를 경멸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적당한 추문들로 황제의 과도한 견제에서 벗어났고, 뭇사람들에게는 공포심을 심어줬다.

베스가 사라진 이후, 정신 나간 데베르 공작이 보호구역을 전전하며 전장에서 만난 여자를 찾는다는 추문을 실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행여 그 여자를 보호구역에서 마주치더라도 미친 공작이 두려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고.

소식지는 데베르 클리프가 넥서스에서 건재하는 방식이자, 살아남기 위한 전술이었다.

데베르는 성의 없는 손길로 쪽지 두 장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깊이 시가를 빨아들이려 고개를 기울이자, 덜 마른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내뱉는 연기만큼이나 그의 눈빛도 짙어졌다.

“오만….”

혹은 오류.

꼴사납게 테이블을 나뒹구는 쪽지는 그가 브리틴과의 친선 경기를 나가기 직전, 서재에 도착했다.

‘공작님, 어떤 꼬마가 웨인 4번가 보호구역에 이 쪽지를 주고 갔다고 합니다.’

집사가 전해 준 작은 쪽지엔 이미 소식지에 실린 베스와 공작에 대한 추문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필체를 알아본 순간 작게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꼬마가 있는 곳이 어디라고요.’

친선 경기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역겨운 브리틴 놈들이 어떻게 기어오르든 그의 관심사는 오직 꼬마가 있다는 후미진 여관뿐이었으니까. 어쩌면 순수한 호기심으로 착각할 만큼 약간의 흥분이 덧대진 상태로 피오닐레 여관으로 향했다.

꼬마에게서, 그것도 베스의 호의를 경험한 어린아이에게서 나머지 추문이 적힌 쪽지 한 장을 얻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널 이곳으로 보낸 간호사가 위험해. 혹시 전하지 못한 게 있다면 내게 바로 줘야 할 거야. 그 간호사가 반드시 널 찾아 남은 걸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거든.’

적당히 부드러운 어조와 베스의 안위면 충분했다. 베스 제인스를 경험한 놈들이라면 누구든 이렇게 될 것이었다.

번트에서 돌아온 직후, 제가 미리 확인하지 못한 소식지를 받아들었을 땐 그저 치기 어린 귀족 놈들의 밀고라 생각했다. 으레 권세 있는 가문에 혼사가 오갈 땐 더러운 소문이 붙기 마련이니.

하지만, 단 한 번 내린 오판의 내막을 알게 되자 데베르는 넘쳐나는 조소를 참지 못했다.

“내가 너무 장단 맞춰줬지.”

읊조리는 표정이 서늘했다.

베스는 데베르의 권태를 뚫고 들어온 여자였다. 병적으로 무기력하고 지겨움을 견디다 못해 그 감각마저 무뎌진 그의 틈을 파고든 ‘예외’였다.

데베르는 모든 것이 제 계획대로만 되어가야 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늘 예상을 벗어나 걸어가는 여자를 꽤나 즐거워했다. 그러다 몇 번 약한 체해주면 금세 그가 원하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 또한 기꺼웠다. 때론 약간의 고통마저 쾌감으로 느낄 만큼 베스는 데베르에게 자극이었으며 처음 경험한 안온함이었다.

지겨운 술래잡기도 베스였으니 해 준 것이었다. 어차피 결과가 뻔했으니 당연했다.

데베르는 지는 싸움을 할 만큼 여유로운 남자가 아니었다.

“내 눈을 피해서 이딴 거나 쓰고 말이야. 감히 내 영지의, 내 성에서.”

그것도 전날 밤엔 애인을 하겠다며 스스로 안기기까지 해놓고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베스는 데베르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 생각에 마른 웃음을 흘리자 매캐한 연기가 그의 상념을 담아 어지럽게 흩어졌다.

대체 왜.

단지 결혼이 싫어서? 더러운 꼴을 봐서라도 스스로 청혼을 물리라고? 작은 소문 하나에도 벌벌 떨던 그 여자가?

그 순간, 나직한 노크 소리가 방을 울렸다.

쭈뼛거리며 집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일 년여 전 베스 제인스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아든 남자였다. 그는 그날 이후, 데베르 공작이라는 꽤 괜찮은 약쟁이 손님 하나를 얻은 터였다.

데베르는 테이블 끝에 놓인 약통을 문가에 선 남자에게 던졌다.

“무슨 약인지 말해.”

엉겁결에 약통을 받아든 남자가 흰 알약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까지 내밀어 부수어 먹었다. 몇 번 쩝쩝거리던 남자는 혀끝에 남은 약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병원에서 받으셨다던 안정제는 아닙니다요.”

“그러면.”

“그, 이게 약쟁이들이 중독이나 금단증상이 너무 심해졌을 때 먹는 일종의 해독제 같은 건데 부작용은 조금 있습죠.”

“부작용?”

“좀 센 거라서 확실히 중독된 약발은 빨리 떨어지는데, 몽유병이 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중독이란 것도 알고 있으면서….

데베르는 고민했다. 여자는 그가 알지 못하리라 생각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늘 주던 안정제가 아닌 해독제를 주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손을 떨어댔는데 모르길 바라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었다.

불쌍한 새끼로는 치부하지만 차마 결혼은 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베스의 발목을 잡기 위한 수를 놓는 것에 오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종전이 선포된 전장에서 여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그 날개를 꺾어서라도 제 옆에 두겠다는 딱 저다운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고집스러운 그 여자는 목줄을 쥐려 할수록 달아나려 할 테니까.

데베르가 저답지 않은 말을 뱉고, 연약한 새끼처럼 움츠린 건 그게 이기는 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여자가 쓰다듬어 주는 게 못 견디게 저를 충동질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다 보니 정말 첫사랑이라도 하는 풋내기처럼 진심 어리게 그 발밑을 구르기도 했었다. 나 좀 봐달라는 꽤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가끔은 환자 놀이에 심취했는지 죄책감이나 미안함 따위의 감정마저 올라올 지경이었지만, 어쨌건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그 여자를 손안에 쥐어야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가장 완벽한 족쇄였다.

전장에서 숨을 곳이 필요하면 숨겨주겠다던 말은, 저만 보게 가두겠다는 말을 가장 낭만적으로 꾸민 말이었다.

“그걸 눈치챌 재주는 없는 여잔데.”

약쟁이를 내보낸 데베르는 끝이 거의 다 탄 시가를 쪽지 위에 던졌다.

마지막 무도회에 갈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베스를 달래볼까, 혹은 제게 빌어보게 할까 이런저런 아둔한 계획을 세웠지만, 제 뒤에서 이런 앙큼한 짓을 했다는 걸 안 이상, 이젠 이 술래잡기마저도 권태롭게 다가오는 상황이었다.

“청혼서를 넣으세요. 이번엔 하워드 백작에게 직접.”

약쟁이가 새롭게 가져온 물건으로 자연스레 향하던 데베르의 손가락이 바깥의 집사를 향했다. 눈치 빠른 집사는 가주가 제게 청혼서 외에도 더 시킬 일이 있음을 알곤 아직 침실 문 밖에 서 있었다.

“그 여자 주위에 붙일만한 눈도 찾으시고요. 하워드 저택까지 드나들 수 있으면 더 좋고. 이번엔 하워드의 내력 따위를 찾아보는 게 아니라, 베스 제인스의 행방에만 초점을 맞출 테니.”

데베르는 거울을 흘깃 봤다. 눈 위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자 지독히도 무감한 눈동자가 저를 마주 봤다.

“빌어먹을.”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던 카시우스와 똑같은 눈동자였다.

탁.

소파 위에 쓰러져 있는 데베르를 깨운 건 낯선 파열음이었다.

규칙적으로 창을 때리는 소리에 마지못해 움직이는 발걸음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죽죽 흘러내리며 일렁거리는 시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장면은 파편처럼 흩어져 눈에 들어왔다. 꼭 박살 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것 같았다. 울렁이는 창턱. 비척거리며 내려가는 끝 없는 계단. 그리고 눈앞의 베스까지.

환영인가.

하지만 곧이어 훅 끼쳐오는 향은 자신이 환영이 아니라, 그토록 그를 미치게 하는 베스 제인스임을 말해줬다.

데베르는 텅 빈 시선으로 그의 발치에 쭈그리고 앉는 베스를 내려다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뭐라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의 귀에는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여자가 그의 뺨을 감쌌다. 움칠거리는 작은 입술 새로 뚝뚝 끊기는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게 청혼서를-”

데베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청혼서를 보내지 말라고…?

“-결혼식을-”

결혼식 따위 하지 않겠다는 말이 하고 싶어?

반짝 밝혀지는 불빛에 발갛게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의 결혼을 알도록.”

나 따위와 얽힌 걸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어서?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온기가 어느새 데베르의 입술에도 닿았다. 아마 여자가 뱉었을 모진 말들과는 확연히 다른 온기였다.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내가 베스 클리프가 됐다는 걸 모두가 알도록.”

마침내 선명해진 고백과 함께 서투른 입맞춤이 넘어왔다. 내리뜬 새카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아, 베스 클리프.

베스 클리프.

데베르는 한 대 맞은 것처럼 오직 베스 클리프라는 한마디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넌 마지막까지도 내 예상을 벗어나는구나.

내 계획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잠시 그 요령 없는 입맞춤을 받아주던 데베르는 손을 올려 여자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숙이자 성긴 입맞춤이 깊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류.

데베르는 확신했다.

이건 오류다.

완벽해야만 할 그의 계획에 변수가 생겼단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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