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잠시 고민하던 베스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아 왔다. 자신보다 한참은 큰 남자의 손끝만 잡은 채였다.
“들어가요, 우리.”
베스는 그대로 거대한 저택에 한발을 내디뎠다.
“조심해요.”
데베르는 쓸데없는 걱정을 뱉으며 연신 저를 돌아보는 여자를 바라봤다.
잡히면 잡히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데베르는 그렇게 베스에게 발을 맞춰줬다.
한참을 지독한 쾌감과 고통 사이의 어딘가를 배회하다 정신이 들 때면 유난히 더 생생하게 현실이 와닿아 오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취한 척, 미친 척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늘 해왔던 일이었으니까. 때론, 저조차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상처만 보고 갈게요.”
침대 위에 데베르를 앉히고 그 앞에 선 베스는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곤 어깻죽지를 가린 셔츠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셔츠를 벗기려던 손은 이내 멈칫하고 말았다.
목걸이가 없었다. 함께 밤을 보낼 때면 늘 그의 아래에 있는 제 눈앞에서 달랑거려, 저를 죄책감에 몸서리치게 했던 목걸이였는데.
이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베스는 얼른 손을 움직여, 하던 일에 골몰했다. 어설픈 서운함은 사치였다.
“…….”
데베르는 할 일을 끝내자마자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는 여자의 손을 낚아챘다. 손아귀에 실린 힘에 안 그래도 하얀 손이 더 파리하게 질리는 게 보였지만, 데베르는 힘을 풀지 않았다.
여자의 손이 허옇게 질려갈수록, 손끝의 검붉은 흉은 더 짙게 물들어갔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여자가 얼른 손을 오그라뜨리자, 데베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감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마치 다시 술에 취해 잠든 모양새였다.
“…갈게요.”
친히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 멀어지는 여자의 발걸음 소리에 데베르는 귀를 기울였다.
또각. 또각.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소리는 오히려 침실을 벗어나자 조금씩 느려지더니 이내 들려오지 않았다.
복도는 길었다.
그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더 가지 못하고 멈췄구나.
데베르는 시트 위에 올려진 손을 탁, 탁 두드렸다.
무엇이 널 멈추게 했을까. 단순한 걱정? 아님, 뱉어버린 청혼에 대한 후회? 그것도 아니면.
“속여먹는다는 죄책감인가.”
* * *
사복 차림의 베스는 숙소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발그레한 뺨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뭔가 끄적이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종이를 구겼다.
이미 몇 장의 편지지가 바닥으로 떨어진 채였다.
“엉망이야.”
베스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다시 펜을 쥐었다. 새 편지지를 꺼내는 얼굴에 꽤 비장함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 청혼서가 가고 결혼식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베스는 이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전엔 해본 적 없는 휴가 신청까지 이미 아침에 끝낸 참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너무 채신머리없게 적었나.
제법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베스는 결국 반쯤 쓴 문장을 벅벅 지울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한숨을 쉰 베스는 이젠 마지막 남은 편지지를 노려봤다. 이젠 시간도, 편지지도 없었다.
“우리 함께….”
짤막한 한마디만이 담긴 편지지가 곱게 접혀 들어갔다.
짙은 노을빛과 함께 열린 창밖으로 요란한 음악 소리가 기어들어 왔다.
별다른 동요 없이 즐비하게 쌓인 서류에만 눈을 고정하고 있던 데베르도 헹가래 소리엔 창밖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바깥엔 축제를 맞이해 나뭇가지에 묶인 넥서스와 브리틴의 문장이 어지럽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공작님, 올리버입니다.”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평소라면 저택에 있어야 할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혼서는 제대로 갔나요.”
데베르는 맞은편 병원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거리마다 인파로 즐비했다. 웨인 중심가의 군수회사와 맞은편의 제국 병원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네, 하워드 백작님이 받으시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차분히 작은 머리통을 하나하나를 읽어가던 데베르의 눈이 한곳에서 멈췄다.
“제가 찾는 거는요.”
“마침 적절한 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이….”
데베르는 베스 곁에 선 깡마른 소녀를 내려다봤다. 소녀가 연신 베스의 귀에 대고 쫑알거리자, 짧게 웃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개인 시녀라고 들었습니다.”
베스가 무어라 말을 하며 편지 한 장을 소녀의 손에 쥐여주자, 소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틀어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름은 루카라고 합니다.”
“브리틴어네요.”
“그분께서 붙여주셨다고 합니다. 저번 무도회 날, 그 아이와 함께 어울려 논 이들이 말해주는 거로는요.”
아, 그날. 데베르는 베스가 소녀에게 금화 하나를 쥐여 보내던 무도회 날을 기억했다.
“딱 저 같은 이름을 붙였네.”
소녀는 점점 데베르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소녀의 머리통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자, 회사를 지키고 있던 보안관이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를 대신해 집무실을 나갔다 온 집사가 편지 한 장을 건네줬다. 무늬 없이 깨끗한 편지 봉투엔 제국 병원을 상징하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분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본 추문과 똑같은 필체로 적혀 있었으니까.
봉투를 연 데베르는 마른 웃음을 뱉었다.
[우리 함께 여행가요. -베스-]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리자 제 주인에게로 뛰어가는 소녀의 뒤통수가 다시금 보였다. 잘 전해줬다고 얘기했는지, 베스의 고개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데베르는 그 시선을 피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노을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 숨은 그의 모습을 여자는 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진작 했어야 할 일을 지금 하는 것 같네요.”
데베르는 집무실 테이블 서랍에 편지를 넣었다. 굳게 잠긴 서랍 속엔 베스의 세 번째 편지가 담겼다.
두 장의 추문과 한 장의 연서였다.
* * *
“아가씨, 내리셔야 해요.”
굳은 듯이 창밖만 쳐다보는 베스를 루카가 조심스레 재촉했다.
차에서 내린 베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말끔한 얼굴을 하곤 저택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브리틴 사절단의 마지막 만찬이 열리는 곳이 바로 이곳, 하워드 저택이란 사실이 못 견디게 역겨웠다. 저 저택 안에 어떤 여인이 시체처럼 누워있는지도 모르고 하하 호호 웃으며 가증을 떠는 꼴 또한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그럼에도 베스는 꽤 예쁘게 웃었다. 모두가 좋아할 법하게. 하워드의 양녀를 칭찬할 법하게.
이젠 그래야 했다.
“오, 이 아이가 잃어버린 하워드 백작의 여동생의 딸아이군요.”
“완벽한 아가씨가 되어 나타났다더니!”
“저는 일전에 한 번 무도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와 이국적인 향냄새가 방 안을 진동했다. 베스는 적당한 미소로 화답하며 저택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올리비아가 있을 방 앞에 서자, 하녀가 베스의 앞을 막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하워드 그치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서재에 계십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베스의 눈길이 문득 본 적 없는 문으로 향했다. 못 본 새 저택에 생긴 간이 엘리베이터의 문이었다. 딱 한 사람만큼의 틈만 있는 수동 엘리베이터는 하워드의 깊어진 병색을 대변하는 증거였다.
베스는 흐트러진 표정을 갈무리하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아버지.”
호사스런 만찬을 맞이해 위층 또한 술잔을 든 이들로 즐비했다. 베스는 그 틈에 끼어 있는 하워드를 불렀다.
오늘따라 들떠 보이는 하워드가 지팡이를 절뚝거리며 베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비틀려가는 다리와 달리, 손아귀에만 억센 힘줄이 불거진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베스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어머니를 다시 코펠로 보내세요.”
“청혼서가 왔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
하워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멀찍이 선 이들이 보기엔 두 사람은 그저 화기애애한 부녀였다.
“거래예요. 아버지가 그리 좋아하시는.”
“이젠 아버지 소릴 잘도 하는군. 그런데 내가 왜 응해야 하지?”
베스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청혼서를 슬쩍 보였다. 손님으로 즐비한 하워드 저택의 금지 구역은 오직 올리비아가 누워있는 방뿐이었다. 베스는 하워드가 자랑처럼 공작의 청혼서를 서재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리라 확신했고, 그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청혼서를 손에 든 베스는 두어 걸음 하워드의 뒤로 물러났다.
“안 그럼, 여기서 찢어버릴 거예요. 청혼서를 찢어버렸다고 하면 공작님은 아마 화가 나시겠죠? 청혼서 원본이 없으면 황제 폐하께 결혼 승인을 받을 수 없으니까요.”
“겁을 상실했구나.”
“거래를 배웠을 뿐이죠. 제겐 지켜야 할 가족이 있으니까. 어머니를 죽이면 저도 죽어버리려고요. 이 저택에 계속 어머니를 둔다면, 제가 먼저 죽어버릴 거고요. 그저, 제 남은 하나를 지켜달라 부탁하는 것뿐이에요.”
하워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를 시험하는 뱀 같은 눈초리였다.
“데베르를 포기하기로 했나 보구나.”
“…핏줄이 더 진하니까요. 아버지 당신처럼.”
가만히 베스의 얼굴을 뜯어보던 하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카만 눈동자엔 이전과 달리 동요가 없었다.
“그러마. 새벽에 혼잡한 틈을 타 코펠로 보내지.”
베스는 미소 지으며 청혼서를 내밀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어요.”
“머리 굴릴 생각-”
“오, 하워드! 이리 훌륭한 만찬을 여시다니요!”
때마침 등장한 신사 하나가 하워드의 말을 가로챘다. 베스는 가볍게 하워드를 안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혹시나 기면 증상이 생길까 때려 부은 각성제 탓에 속이 메스꺼웠다.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 걸음을 재촉하는데, 베스의 앞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안녕.”
장난기 실린 목소리. 베스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붉은 제복의 가슴팍만 노려봤다.
“하십니까, 라고 해야 보려나?”
혼잣말인 척 빈정대는 말투가 쓸데없이 달콤했다.
베스의 눈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지체 높은 가문의 영애를 처음 뵈어 예법이 서툴렀습니다. 저와 한잔하시겠습니까?”
칼론이 씩 하얀 이를 드러내며 허리를 굽히더니, 이내 샛노란 위스키 한 잔을 내밀었다. 얼음 하나 없이 가득 담긴 술잔엔 상대를 놀려먹겠단 의도가 명백히 실려 있었다.
“아, 이전에 얼핏 보니 술이 약하신 것 같던데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곳에서 술을 권하는 건 말을 붙이고 싶단 소리를 돌려 하는 것이니까요.”
칼론이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협탁 위로 술잔을 옮기려 하자, 베스는 대답 대신 그가 쥔 잔을 낚아챘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무식하게도 채워진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꼴깍거리며 넘어가는 흰 목이 새하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유난히 도드라졌다. 곧 밭은 숨을 토해내는 물기 어린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작은 변화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던 칼론의 눈가가 불그스름해졌다. 베스는 그 욕망 어린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빈 잔이 탁, 소리와 함께 협탁 위에 놓였다.
“대화하기 싫은 상대와 있을 땐 예외에요.”
꼭 대화의 종지부를 찍는 점처럼 말이다.
“예우를 지키세요. 난 당신 친구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