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베스는 뒤이어진 소리를 들을 틈도 없이 약제실로 뛰어갔다.
소식지에서 보았던 데베르 클리프에 대한 얘기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나돌았다.
밤이 되면 클리프 저택을 찾는 외국 밀매꾼들. 자연스레 그에게 위스키잔을 가져다주던 종업원. 떨리던 손.
이미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가정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베스는 급히 방문용 의료 가방을 열었다. 양손으로 바쁘게 진열장의 주사액들을 집어넣곤, 곧장 로비로 뛰어갔다. 먼저 준비된 가방을 챙겨 든 아이네스가 시종을 따라가려 했지만, 시종은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걸음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내가 갈게.”
베스는 아이네스를 뒤로한 채 가장 먼저 병원을 빠져나왔다. 빨려 들어가듯 시동이 걸린 차에 올라타자, 시종도 기다렸다는 듯이 조수석에 올랐다.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차는 그들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을 뚫고 클리프 저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심가를 벗어나자,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주위를 밝히는 가로수길은 음산한 기운마저 풍겼다.
남자는 저와 닮은 곳에 살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을까요?”
베스가 차에 탄 후 내뱉은 첫마디였다.
운전사는 말없이 속력을 높였다. 가방끈을 쥔 손에 자꾸만 땀이 배어 나와 미끈거렸지만, 베스는 부여잡은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 남자를 살릴 수 있는 건, 결국 이 가방 안에 든 것뿐이었으니까.
“많이 위급한가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방문 간호가 필요하시단 사실 뿐입니다.”
“…그렇군요.”
시종은 예의 바르지만 단호하게 베스의 질문을 일축했다.
“이제 도착했습니다.”
철옹성같이 뻗어 올라간 철장 문이 저택으로 진입하는 차에 맞춰 천천히 열렸다. 베스는 어둠에 잠긴 클리프 저택을 눈여겨봤다.
정갈한 모양새의 건물은 하워드가보다 훨씬 컸다. 과연 저 커다란 곳 어디에 그 남자가 있다는 건지. 베스는 막막한 기분에 눈을 꾹 감았다.
시종이 뒷좌석 문을 열기도 전에, 베스가 먼저 차에서 뛰쳐나왔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베스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집사 올리버.
인자한 노년의 집사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오셨습니까.”
간호 숙소에서의 첫 만남보다 여유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집사는 예의 그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베스를 맞았다.
“어디로 가면 되죠?”
“사 층입니다.”
타닥타닥 뛰어가는 베스의 걸음 소리와 집사의 발걸음이 엇갈리며 울려 퍼졌다.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가 그 속에 섞여들었다.
저택에 들어설 때부터 희미하게 들리던 파열음은 층을 오를수록 더 뚜렷하게 들렸다.
무언가 거세게 깨지는 소리였다.
차오른 숨이 턱 끝에서 할딱거렸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헉. 헉.”
베스는 숨을 몰아쉬며 사 층 복도 너머를 바라봤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는 침실 안에서 나고 있었다.
주저 없이 손잡이를 잡아 돌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성마른 손길이 거칠게 손잡이를 연거푸 흔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공작님께서 잠그신 겁니다.”
겨우 베스를 뒤따라온 집사가 열쇠를 내밀었다. 베스가 집사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님께선 그 어떤 경우에도 침실 출입은 금하십니다.”
베스는 열쇠를 내려다봤다.
혼란스러움이 깃든 베스의 얼굴을 본 집사가 머리를 숙였다.
“가주님의 상태가 걱정되어, 감히 개인적인 사견을 붙여 방문 간호사를 요청했습니다.”
그 남자가 나를 부른 게 아니라면. 전담 간호사는 그밖에 알지 못하는데.
베스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애써 떼어냈다.
“전담 간호사는….”
“얼핏 공작님께서 취하셨을 때 흘리신 말씀을 담아 두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용서하십시오.”
그 남자가 취했다고?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전에, 요란하게 깨지는 유리 소리가 산통을 깼다.
“제가 들어갈게요.”
열쇠를 건네받은 베스는 작은 홈에 맞춰 손목을 돌렸다. 이내 달칵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틈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제 옆으로 날아드는 잔에 베스는 비명을 삼키며 문부터 잠갔다.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했지.”
척척한 목소리가 뱀처럼 바닥을 타고 기어 왔다.
베스는 조심스레 발아래의 유리 파편을 피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유리 조각이 바스락거리며 밟혔다.
온기 한 점 없는 방 안을 비추는 건 어슴푸레한 달빛뿐이었다. 베스는 거의 닫혀 있는 커튼부터 활짝 젖혔다. 그러자 커다란 창에서 쏟아지듯 하얀 달빛이 들이닥쳤다.
순간, 침대 밑바닥에 웅크린 형체가 벌떡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베스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베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우악스런 힘이 그녀를 끌고 갔다.
틀어 잡힌 손목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새 나왔지만, 남자는 들리지 않는지 그대로 침대로 베스를 끌고 갔다.
“빌어먹게도 헷갈리게 해.”
남자는 손에 잡힌 여체를 침대 위로 들어 올렸다.
베스는 제 어깨를 누르는 무게감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는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면 꼭 진짜 같잖아.”
데베르는 푸른 간호복 위로 훤히 보이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습한 숨이 지척에서 와닿자 베스는 있는 힘껏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정신 차려요.”
그 말에 남자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들썩이는 어깨와 함께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는 꼭 비틀린 신음 같았다.
“그럴듯해. 정말로. 효과가 좋다고 하더니.”
데베르는 비척비척 일어나 위스키병이 엉망으로 쓰러진 협탁으로 향했다. 유리잔에 담긴 불투명한 액체가 그의 손안에서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베스가 얼른 뛰어가 유리잔을 빼앗아 던졌다. 저도 모르게 한 짓이었다.
남자는 그런 베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는 쓰러지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까 전의 흉흉한 기세는 사라진 채였다.
베스는 얼른 바닥에 내팽개쳐진 의료 가방을 열었다. 들고 온 주사액들도 협탁 위에 즐비하게 올려놓았다.
그리곤 간호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조금 다르게 주사액을 배합하기 시작했다.
그건 보호구역에서 노파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만한 해독제가 없다. 아가, 기억해 두렴. 많은 귀족 나리들을 살리게 될 맹약이니.’
베스는 잊지 않았다. 잊을 수도 없었다. 노파가 가르쳐준 그 맹약은 소년 데베르를 살린 것이기도 하니까.
늘어진 남자의 팔을 들어 올려 지혈대를 감아도 그는 잠자코 제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조금 아파요.”
작은 경고를 하며 남자를 봤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깜빡이던 눈만 가만히 감았다.
주삿바늘이 잔뜩 일어선 그의 핏줄을 비집고 들어갔다. 베스는 신중하게 해독제가 들어가는 양을 확인했다.
모든 것은 찰나였다.
주사기를 뺀 베스는 잠든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며칠 전보다 더 야윈 것 같기도 했고, 그저 더 여문 청년의 태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해독제가 몸에 돌기 시작했으니, 곧 정신을 차리겠지.
베스는 데베르가 깨기 전에 떠나기 위해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그러고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자는 줄 알았던 남자가 번뜩 눈을 뜨더니 멀어지는 손목을 잡아챘다.
“어딜 가.”
잔뜩 충혈된 눈에 피로감이 묻어났다.
고개를 뒤로 젖힌 데베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갈 곳도 없으면서.”
남자는 아까 전과 달리 힘을 푼 채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을 풀기 위해 베스가 반대편 손을 들어 올리자, 남자는 그 손마저도 잡아챘다.
졸지에 두 손이 속박된 베스는 오도 가도 못 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할 뿐이었다.
데베르는 제 옆으로 베스를 끌어당겼다.
“해독제보다 이게 나아.”
여린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데베르는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대체 제 안에 뭘 집어넣은 건지 밀려오던 토악질도, 머릿속을 헤집던 환청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몽롱한 정신은 여전히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넌 밤에 뭘 해.”
그 틈을 타, 데베르는 한 번쯤 묻고 싶던 질문을 뱉어냈다.
넌 대체 홀로 있는 밤에 무얼 하는지, 이 긴 고요를 어떻게 견디는지, 너도 두려울 때가 있는지. 묻고 싶은 건 넘쳤지만, 흘러나온 건 결국 제 모든 걸 숨긴 말뿐이었다.
베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해독제를 투여한 시간을 계산했다. 아직 정신이 들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몇 번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베스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창밖도 보고…. 낭독도 해요.”
멀끔한 모습의 데베르 공작 앞에선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낭독?”
그가 웅얼거렸다.
아직 취해 있구나.
조금은 안심한 베스의 어깨가 가라앉았다.
“책 읽어요.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왜.”
투정 같은 질문에 베스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정말 취해 있는 게 맞구나.
“다시 말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요.”
가슴을 짓누르던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누구에게도 뱉지 못할 고백을 듣는 게 이 남자라니. 베스는 애꿎은 손끝만 뜯었다.
“해 봐.”
여자의 어깨에서 반쯤 고개를 비튼 데베르는 바닥에 널브러진 책 한 권을 가리켰다. 술에 반쯤 젖은 책은 끝이 오그라들어 엉망이었다.
“싫어요.”
“싫다는 것만 많지.”
데베르는 다시 고개를 비틀어 흰 목덜미에 제 얼굴을 온전히 묻었다. 약간 젖은 머리카락이 베스의 목덜미에 비벼졌다.
“목소리 듣고 싶어.”
데베르는 부탁했다.
“항상 들어보고 싶었어.”
그건 조금은 애타는 간청이었다.
결국 베스는 절반은 술에 젖어 읽을 수 없는 반쪽짜리 책을 잡아 들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데베르의 침실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소년에 대하여…. 당신은 길을 잃은 소년을 본 적이 있는가.”
베스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더 읽을 수 없는 장이 펼쳐졌지만, 베스는 책을 닫지 않았다.
그저 동이 터올 때까지, 제게 기대 잠든 남자가 깨지 않길 바라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좋은 꿈 꿔요.
창가에서 흘려보낸 지난날의 바람이 이번엔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달칵.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자, 데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버석한 얼굴을 쓸어내리자, 침음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마간 제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데베르는 창가로 걸어갔다. 베스가 활짝 열어젖히고 간 창가엔 푸르스름한 새벽 여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데베르는 클리프가의 너른 정원을 부지런히 걸어가는 작은 머리통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여자는 하얀 손을 내저으며 이내 견고한 철문 밖으로 사라졌다.
베스가 사라진 정원 한구석에 데베르의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넌 항상 나에게서 멀어지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데베르는 엉망이 된 침실을 벗어났다.
“일어나셨습니까.”
베스를 배웅하고 돌아온 집사가 계단 밑에서 고개를 숙였다.
데베르는 복도 창문 너머, 주인을 잃은 제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뗐다.
“청혼서를 넣으세요.”
이젠 저조차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