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89화 (89/206)

89화

“어? 또 꽃이다!”

병원 로비를 울리는 종소리에 딕시가 잽싸게 고개를 쳐들었다. 무언가 끄적이던 차트는 내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베스 하워드 양이 누구십니까?”

우락부락한 배달꾼은 품에 제 상체만 한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병원에서 화려한 색깔의 꽃은 부자연스럽게 눈에 띄었다.

“여기요!”

이번에도 대답하는 이는 딕시였다.

벌써 오늘만 해도 세 번째 꽃 선물이었다. 꽃의 주인보다 먼저 쪼르르 달려나가는 딕시의 눈에 이상스런 총기가 반짝였다.

“음, 프리지아네. 이번엔 또 누구시려나.”

딕시는 잔뜩 기대감을 담아 꽃 틈에 끼인 카드를 뽑아 올렸다.

“에이.”

하지만 대번에 참지 못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내심 데베르 클리프라는 이름을 기대했던 딕시는 못내 서운함을 담아, 카드를 무성의하게 꽃바구니에 쑤셔 넣었다.

“우리 이걸로 병동 꾸밀까?”

“안 돼.”

딕시의 철없는 소리를 딱 잘라 끊으며, 베스는 로비 입구에 놓아둔 꽃바구니를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자 딕시도 얼른 쫓아와 남은 바구니 하나를 들며 도왔다.

“왜, 예쁘잖아.”

“여기에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이걸 버리겠다고?!”

난데없는 고성에 베스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하란 뜻을 보이자, 딕시는 시무룩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래도 버리는 건 너무한 거 같아. 숙소 방에라도 가져다 두면 안 돼? 그저 꽃 선물인걸? 너한테 당장 청혼서를 보낸 것도 아니잖아.”

딕시는 단 한 번도 귀족 영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지만, 하워드 양이 된 제 친구의 곁에서 그 삶을 지켜보는 것은 꽤 재밌는 일이었다. 진즉 약혼자를 점찍어 둔 아이네스와 곁에 누구도 없는 베스의 상황은 확실히 달랐으니 그 재미는 더 쏠쏠했다.

지금의 꽃 선물도 마찬가지였다.

사교계의 입성을 축하한다는 대의를 내세우며, 은근슬쩍 베스에게 추파를 던지는 귀족 영식들이라니. 물론, 그중 누구에게도 베스를 내 줄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럼 숙소 관리 집사님께 드리자. 화단이 영 심심하잖아. 좋아하실걸?”

그 말에 베스의 단호한 표정도 조금이나마 풀렸다.

받아선 안 되는 선물이었지만, 이미 받은 이상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선물이었다. 혹시나 콧대 높은 하워드의 양녀가 영식들의 선물을 버린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플 게 분명했으니까.

“그럼 숙소로 가져간다?”

딕시는 요 며칠 후문 앞에 쌓인 꽃바구니 중 하나를 더 손에 들었다.

때아닌 꽃 배달에 화색이 돈 건 간호 숙소의 관리인이었다. 작은 화단을 가꾸는 게 유일한 낙인 노인에게 넥서스에서도 귀한 꽃들만 모은 바구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람!”

늘 괄괄하던 말투에도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잔뜩 실렸다.

“딕시 양, 바쁘지 않으면 이것 좀 도와주고 가요. 요즘 내가 영 허리가 아파서.”

“저도 곧 회진 돌아야 하는걸요….”

답지 않게 삐질 거리며 뒷걸음질하는 딕시에 베스가 먼저 나섰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유, 이런 걸 해봤겠어?”

“어릴 때 흙장난 몇 번 해봤어요.”

푸스스 웃으며 화단 앞에 쪼그려 앉자, 따사로운 봄볕이 등을 간질거렸다.

관리인은 능숙하게 화단 한쪽을 파내곤 꽃을 옮겨심기 시작했다. 몇 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스도 얼추 관리인을 흉내 내며 흙을 도닥였다.

묵묵히 손만 놀리던 관리인이 툭 말을 던졌다.

“죄다 여기 심겠다는 걸 보니, 바라는 사람한텐 꽃이 안 왔나 보구먼.”

“아니에요.”

베스가 고개를 젓자, 귓가의 잔머리도 가볍게 이는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척 보면 알지.”

관리인은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로 흙이 묻은 꽃잎을 털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대단한 꽃을 고르고 있나 보네.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걸 보면.”

베스도 더 이상의 대꾸는 하지 않고, 텅 빈 바구니만 바닥에 털어냈다.

처음에 병원으로 꽃이 왔을 땐, 자신도 모르게 당연히 그 남자가 보낸 것이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곳엔 데베르 클리프가 아닌 다른 이름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

무슨 바보 같은 기대를 했던 걸까.

행여 관리인이 더 무슨 말을 붙일세라 베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

“베스!”

인사를 채 끝맺기도 전에 딕시의 외침이 대화를 끊었다.

“병원장님이 찾으셔, 얼른!”

저 멀리, 딕시가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급하게 병원장실로 뛰어 들어오던 베스는 소파에 앉아 있는 얼굴을 보곤 표정이 굳어졌다. 며칠 전에 본 얼굴을 잊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문가에 서 있는 베스를 향해 콜린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베스, 이리로 앉으렴. 이분은 클리프 가의 집사 올리버란다. 우리와도 꽤 우정을 쌓은 이지.”

집사는 기꺼이 희끗한 머리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라도 데베르가 찾아올까 로비의 종소리만 울려도 달려나갔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오지 않는 연락에 내심 안심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베스 또한 함께 고개를 숙이면서도 불안스런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베스, 어서 앉으렴.”

마지못해 베스가 자리에 앉자, 콜린스는 대번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네가 데베르의 방문 간호를 전담해야 할 것 같구나.”

방문 간호라는 말에 베스의 의뭉스러운 눈길이 바로 집사를 향했다. 집사는 자연스럽게 콜린스의 말을 이어갔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현재 클리프 가에는 가문 주치의가 없습니다.”

베스는 지난번 데베르가 간호 숙소로 찾아왔을 때, 자신에게 오지 말고 가문 주치의를 찾으라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보셨다시피…. 공작님께는 의료진이 필요하시죠.”

집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하지만 병원에 자주 출입했다가는 뭣 모르는 소식지가 클리프가의 안위를 입에 올릴 것이고, 더불어 공작님의 입지도….”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집사는 베스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작은 행동에도 가주를 모시던 기품이 묻어나는 이였다.

“전장에서 공작님의 처방과 치료를 전담하셨다 들었습니다. 부디,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만 방문 간호를 허락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더없이 깔끔한 마무리에 베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거북스러워 남모르게 치맛자락을 구겼다.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네요.”

베스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제 앞에 앉은 집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베스는 그 얼굴을 보며 데베르 클리프란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보냈을 것이다. 거절할 방도 따윈 없다는 것 또한 진즉 알았을 것이다.

연결된 끈을 놓으려 할 때면, 귀신같이 눈치채곤 팽팽히 잡아당기는 남자였다. 때론 그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제 모든 행동이 의미가 있나 싶어질 정도로.

“공작님은 나아지셨나요.”

어떤 날이라 덧붙이진 않았지만, 집사가 알아듣기엔 충분한 질문이었다.

“저는 일개 집사일 뿐입니다.”

석연찮은 대답에 베스는 곁에 앉은 콜린스를 돌아봤다. 콜린스의 눈에 서린 걱정을 읽자, 베스는 애써 미소를 걸쳤다.

이미 피할 수도 없는 일인데.

“잘할 수 있어요.”

“당연한 걸 말하는구나.”

콜린스 또한 베스의 장단에 맞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베스의 대답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는지 콜린스는 가벼운 손길로 의약 처방서를 꺼내 들었다.

“베스 양의 편의를 위해 저택이 아닌, 회사로 오시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맞춰 차를 대기해 놓겠습니다.”

“멀지 않은걸요.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좁은 다락 창문에 올라 몇 번이고 바라보았던 그곳을 모를 수 없었다.

베스는 공연한 질문을 던졌다. 그저 작은 호승심이었다.

“혹시 오늘 하루만… 집사님께 약을 가져가 달라 부탁드려도 되나요.”

집사와 콜린스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나오려 하자, 베스는 먼저 입을 뗐다. 그러자 억지로 걸쳐놓은 미소는 금세 내려앉았다.

“안 되겠죠. 넥서스에서 대리 처방은 불가하니까요. 제가 오늘 밤에 공작님께 가겠습니다.”

당신은 이런 남자였지. 틈이라곤 주지 않는 남자.

“걱정 마세요.”

베스는 까만 글씨가 빼곡히 적힌 처방서를 손에 꽉 쥐었다.

* * *

저녁 어스름이 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베스는 의료 가방을 챙겨 들었다. 불이 좀처럼 꺼지지 않는 클리프 군수회사의 맨 위층은 숙소 창가에서도 잘 보였기에, 혹시나 남자가 벌써 떠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다.

마지막 매무새를 정리하던 베스는 익숙한 하얀 통을 톡톡 쳤다. 안에 반쯤 담긴 알약이 그 손길을 따라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전 이후 모든 게 바뀐 것 같았는데….

이 약통을 보자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남자도, 심지어 자신조차도.

베스는 눈에 익은 길을 부지런히 밟으며 걸어갔다. 하지만 거대하게 솟아오른 회사 앞에 서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공연히 희미한 가로등 아래만 서성거렸다.

때마침 그 남자만 나와 준다면 건네주자마자 돌아가고 싶었다. 그 생각이 스치자, 안 그래도 바닥에 눌어붙은 발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뤄지지도 않을 수를 떠올리며 애꿎은 가방끈만 쥐어뜯는데, 불현듯 등 뒤에서 선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문 간호가 길가에서 하는 거였나.”

“어?”

베스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에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진작 알았으면 벌써 나왔을 텐데.”

무뚝뚝한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남자의 발은 동그란 가로등 불빛의 경계를 밟고 있었다.

베스는 허둥지둥 가방을 풀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짐짓 자연스러운 체하려 했지만, 땀으로 미끈한 손이 자꾸만 지퍼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런 베스의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차분해져 봐. 베스 제인스.”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에 베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둘을 비추는 노란 가로등 빛에 발간 뺨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오랜만이네.”

데베르는 건네받은 약통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 서로를 만난 게 오랜만이란 건지, 이 약이 오랜만이란 건지 뜻이 모호한 말이었다.

“무도회 날 만날 줄 알았는데.”

“무도회요?”

대번에 튀어나오는 날 선 물음에 데베르는 주먹으로 슬쩍 올라간 제 입가를 가렸다.

부끄러워 허둥댈 때는 언제고 깜빡거리는 새카만 눈엔 의문이 가득했다.

“선물한 사람 성의가 있잖아.”

이번엔 바로 알아들은 베스가 제법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전 가지 않아요.”

“난 베스 제인스와 함께 갈 거야.”

하지만 돌아오는 남자의 대답도 단호하긴 마찬가지였다.

“공작님이라고 뭐든 독단적으로 결정 지을 수는 없으세요.”

베스는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래?”

예전이었다면 단번에 차가운 빛을 띠었을 남자는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뭐라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데베르는 제 가슴팍쯤 오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잔뜩 치켜뜬 동그란 눈이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게 보였다.

“베스 제인스를 기다릴 수밖에.”

데베르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그 시선의 끝이, 무슨 말인가 하려 움찔거리는 작은 입술에 머물러 있다는 걸 언제쯤 이 여자가 알까.

아마 또 새빨개진 얼굴로 노려보겠지.

데베르는 애써 시선을 끌어올렸다.

“난 무도회에서 베스 제인스를 기다릴 거야. 그건 오로지 내 뜻이니 감히 안 된다고 하시진 않겠지.”

“그게 무슨-”

“늦었어. 지켜보고 있을 때 돌아가.”

데베르는 작은 새처럼 쫑알거리려는 베스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잔뜩 불만스런 표정으로 여자가 돌아볼 때마다, 그는 손에 든 약을 설렁설렁 흔들며 손 인사를 했다. 심드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서 가’라고 입 모양으로 재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스 제인스는 그가 유하게 굴 때 더 물러지곤 했으니까.

제멋대로인 사람.

베스는 남자의 정의를 새로이 하며 부지런히 돌아가다가도,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뒤를 돌아봤다. 점점 작아지던 인영이 마침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

베스는 제 뺨을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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