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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84화 (84/206)

84화

“그래?”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더는 늘어선 향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젠 하워드 양이니 당연히 초대해야지. 하워드 양만 빼려고 그랬어?”

태연한 척은. 라프넬은 남몰래 혀를 찼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심술을 부려.”

아더의 말투에 어르는 듯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게 또 퍽 라프넬의 예민한 귓가에 거슬렸다.

“심술부린 적 없어.”

라프넬은 어릴 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더의 방을 둘러봤다.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는 풍경은 아더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줬다.

“난 하워드 양을 존중할 거야. 어쨌건 하워드 가의 일원이 되었으니까.”

답지 않은 말을 뱉는 라프넬이었다. 아더는 흘깃 그런 제 여동생을 쳐다봤다. 잔뜩 예민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앙칼지게 굴던 작년 봄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달라진 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너도 그걸 원하잖아.”

“라프넬, 난 티파티에 가기 전에 폐하께 먼저 들러야 해.”

완곡한 축객령이었다.

라프넬은 멀끔하게 치장을 마친 아더를 머리끝부터 죽 훑어내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짙어진 황금빛 머리카락은 데베르와 아더를 더 대비되어 보이게 했다. 넥서스 여인들이 공주 몰래 아더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정도로.

“그래. 꺼지라고 할 때 꺼져 줘야지.”

“라프넬.”

“예쁘게 말할게. 하나뿐인 가족이 그렇게 하라는데.”

라프넬은 빙긋 웃었다.

“늦지 않게 와.”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라프넬은 미련 없이 아더의 공간을 벗어났다.

아더는 반드시 올 것이다.

그 애가 온다는 걸 말해줬으니까.

* * *

“숙소에서 바로 갈 줄은 몰랐어.”

“딕시 양이 꾸며줬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넥서스에서 가장 미감이 좋으신 분이 제국 병원의 간호사이실 줄은 몰랐네요.”

아이네스가 입을 떼자, 얼른 게일이 추임새를 덧붙였다.

커다란 마차 안엔 아이네스와 게일, 그리고 베스가 앉아 있었다. 베스가 간호 숙소에서 바로 티파티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곤, 아이네스가 제 마차를 끌고 온 것이었다.

이미 도착해있는 하워드 가의 차를 보곤 당황스러워했지만, 베스는 주저 없이 아이네스의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 정말 예쁘다, 베스. 꼭 그날 같아. 우리 전방 병원에서 파티했던 날.”

베스가 슬쩍 미소 지을 때마다, 살짝 올라오는 발그레한 광대가 반짝였다. 모두 딕시의 솜씨였다.

황궁으로 가는 내내, 게일은 적당한 농담과 말솜씨로 아가씨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갑자기 모든 게 바뀐 베스에 대해서도 눈치껏 아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도착했어.”

마차에서 내린 베스는 눈앞의 정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새파란 잔디 한가운데에 자리한 분수는 빛을 받을 때마다 별처럼 부서지고 있었고, 길을 따라 늘어선 장미 넝쿨에서는 초대장에 묻어 있던 향이 진하게 풍겼다.

지나가는 소문으로만 듣던 공주의 정원이었다.

“예쁘지?”

아이네스는 다정히 물으며 베스의 팔짱을 꼈다.

베스는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천장을 둘러싼 창 너머로 평화로이 지나가는 구름과 함께 따사로운 봄볕이 끼쳐 들어왔다.

모든 게 그림 같은 곳이었다.

“오늘은 지정 좌석이네.”

아이네스가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곁에 선 게일이 먼저 이름을 발견하곤 제 약혼자를 불렀다.

“다행히 같은 자리네요. 공주님께서 배려하신 것 같아요.”

게일은 사람 좋게 웃으며 아이네스와 베스의 의자를 빼주었다.

곧이어 도착한 이들이 서로를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 중엔 베스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저번 데뷔탕트 때 인상 깊게 봤어요. 안타까운 사연 또한 들었고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으셔서 얼마나 제 마음이 기쁜지 몰라요. 하워드 가의 새로운 보물이 베스 하워드 양이려나요?”

베스는 적당한 미소와 애매한 대꾸로 응수했다. 어차피 다가오는 이들도 베스 자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갈수록 커지는 하워드의 호세를 보고 접근한 것이었기에 부담은 없었다.

다가오는 사람은 늘어만 갔지만, 베스는 외운 듯한 대답만 반복해서 읊조렸다.

개중엔 데베르가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은근히 알은척해보려는 사내들도 있었다.

“다 쓸데없는 분들이야.”

아이네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남에게 나쁜 소리라곤 못하는 아이네스의 말이, 꼭 쫑알거리는 딕시의 말처럼 들려 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난 정말 네가 걱정이라고.”

아이네스는 오히려 황당함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베스는 짐짓 엄하게 말했지만, 아이네스는 한숨을 푹푹 쉬며 샴페인잔을 건넸다.

“참, 너 병원으로 돌아가지.”

아이네스는 민망하게 웃으며 내민 샴페인잔을 거둬들였다.

그 사이, 라프넬이 도착했는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인 이들과 같이 라프넬 또한 드레스가 아닌 가벼운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연분홍색 치맛자락이 가볍게 나부꼈다.

“오늘도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단상 위에 올라간 라프넬은 수줍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을 돌아봤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서 푸른 눈동자가 멈췄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네요. 작년 봄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추웠죠. 어쩌면 그때의 시린 나날은, 오늘을 위한 희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새카만 눈동자는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절대 피하지 않는, 그래서 제 마음을 더 조급하게만 하는 그런 눈.

“모두, 오직 즐겁기만 한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라프넬은 베스가 앉은 테이블과 정반대 편 끝의 테이블로 가 앉았다. 그 자리도 베스의 자리와 같이, 한 자리만이 비어있었다.

금테가 둘린 접시 위로 갖은 색상의 디저트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베스는 비어있는 제 옆자리를 돌아봤다. 손대지 않은 접시 위엔 ‘아더 메이너’라고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사령관님은.”

저도 모르게 입에 붙은 호칭으로 아더를 부른 게일이 급하게 말을 고쳤다.

“황자님께선 일이 있으신가 봐요. 데베르 공작님도 안 보이시고.”

아이네스와 게일은 결혼 준비에 대한 얘기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사소한 잡담이 오가는 틈틈이 베스는 커다란 정원 입구 너머로 보이는 시계탑을 훔쳐봤다.

마침내 짧은 시침이 한 칸을 옮겨갈 무렵, 베스는 얼른 손에 든 잔을 내려놨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샴페인 잔은 여전히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 벌써 갈 시간이야?”

따라 일어나려는 아이네스의 어깨를 잡은 베스는 게일을 향해 짧게 미소 지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한 거라곤 떠든 것밖에 없는걸요. 돌아가실 마차를 대기하라 하겠습니다.”

베스는 손을 내저었다. 하워드의 차를 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분에 넘치는 호의를 받은 셈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밖으로 나가 대여 마차를 타려고요.”

적당한 핑계였다.

베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온실 정원을 벗어났다. 뛰듯이 장미 넝쿨 길을 걸어가다가, 음악 소리가 희미해질 때에서야 속도를 늦췄다.

정말 봄이 오긴 한 건지, 그것 좀 뛰었다고 제법 얼굴에 열이 올랐다. 베스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황궁의 야외 정원길로 들어섰다.

입구로 향하는 길은 이미 마차에 앉았을 때 지나가는 풍경을 통해 익힌 터였다.

만개한 꽃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정원길에서 들려오는 건 지저귀는 새소리밖에 없었다. 그 풍경이 퍽 쓸쓸해 보일 법도 했지만, 베스는 그 적막함조차 나쁘지 않았다.

아더는 저 멀리서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노란 치맛자락을 보곤 발걸음을 세웠다. 순간, 저도 모르게 뒤를 돌려던 구두 굽에 힘을 줬다.

시선을 조금 내리깐 아더가 천천히 다가갔다. 얼마쯤 더 걸어가자, 시야 끝에 노란빛이 걸려들었다. 그러자 상대도 저를 알아챘는지 더 다가오지 않았다.

아더는 미소를 걸쳤다. 습관처럼 얼굴에 올리는 미소가 오늘따라 어색했다.

“베스 양을 이리 다시 뵐 줄은 몰랐는데.”

아더는 조금 설익은 웃음을 내뱉으며 제 눈가를 문질렀다.

베스는 얼른 치맛자락을 붙잡고 무릎을 까딱였다.

가슴께까지 늘어진 새카만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 때마다 치맛자락과 함께 살랑거렸다. 올곧은 시선은 아더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더는 어쩐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지겹기만 한 야외 정원 이곳저곳으로 눈을 돌렸다.

만약 베스 제인스를 다시 만난다면.

하지만 그 쓸데없는 상상이 이렇게 부질없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아더는 결국 베스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잘… 지내셨죠?”

물음의 끝이 떨릴세라 아더는 애써 장난스럽게 물었다. 답이 흘러나올 입술을 보는 게 못내 떨렸다. 정말 우습게도.

“네.”

그래, 저 목소리 한 번을 듣고 싶어서.

아더는 꼴같잖은 제 욕망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여자 앞에서 머저리같이 굴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저 목소리 한번을 듣고 싶어서였단 걸.

베스는 다시 한번 무릎을 까딱임으로 작별 인사를 하곤, 아더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그의 코끝을 스치는 미약한 향기에 아더는 숨을 멈췄다.

기억 속의 향이었다.

언젠가 전방 병원 후문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베스 제인스에게 제 재킷을 둘러줬던 그 날. 데베르의 눈길이 향한 여자를 꽤나 호기심 어리게 지켜봤던 그 겨울날의 향이었다.

“기억력도 좋지.”

아더는 스스로를 신랄하게 비웃으면서도 결국 낯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이젠 저 작은 목소리가 오늘을 기억하게 할 것이니까.

* * *

예상치 못하게 아더를 만나 시간이 촉박해진 베스는 병원으로 들이닥치듯 뛰어 들어왔다.

“베스! 면담실에!”

지나가던 간호사 하나가 얼른 후원자가 기다리는 곳을 알려줬다.

베스는 황궁에서보다 한결 밝은 얼굴로 얼른 머리카락부터 동여맸다. 정숙한 영애의 모습은 어디 가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베스를 다시 한번 동료가 붙잡았다.

“베스, 그런데.”

층계참에 선 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그 후원자가….”

우물쭈물하는 모양새로 봐선 단단히 고집스럽고 괴팍한 후원자가 온 모양이었다.

베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난간에 기대서서 손을 흔들었다. 말을 못 하던 시절에도 팍팍한 환자들을 잘만 구슬리던 저였다. 마주 본 친구의 얼굴이 영 미덥잖았지만, 걱정은 크게 되지 않았다.

몰리 부인과 콜린스 교수님께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자.

면담실 앞에 선 베스는 다짐을 한번 되새기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곤 입매를 당겨 올렸다. 어색한 웃음이라도 흉내 내고 싶을 만큼 잘 해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 미소는 맥없이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늦으셨군요.”

그곳엔 예상치 못한 방문자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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