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른 아침부터 병원장실엔 제국 병원의 의료진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중엔 아직 잠기운이 서린 얼굴들도 보였다.
“오늘도 좋은 하루예요.”
기다란 테이블 상석에 앉은 몰리 부인이 회의를 시작하려다 말고, 테이블 맨 끝에서 조는 딕시를 쳐다봤다.
“딕시.”
아이네스가 꾸벅꾸벅 조는 딕시의 팔을 툭 치자, 화들짝 놀란 딕시가 눈을 끔뻑이며 얼른 펜을 고쳐 쥐었다.
부인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조회를 이어갔다.
“요즘 방문 간호가 늘고 있어요. 제아무리 신식 병원을 짓고, 의료진을 충원해도 병원에 오는 것 자체를 꺼리는 귀족들은 여전히 있으니까요.”
대개 방문 간호를 선호하는 이들은 나이 든 귀부인들이었다. 그들은 병원을 병든 평민들과 자신을 한 곳에 가두어 놓는 곳쯤으로 인식했다.
이는 제아무리 몰리 부부 내외가 사교회를 돌며 설파해도 극복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차라리 웨인의 의료에 대한 신뢰감이라도 갖게 해, 종국엔 병원으로 오는 걸음을 만들자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넥서스는 약물 관련 법이 엄격합니다. 방문 간호이지만, 병원에서 쓰는 모든 약품을 가지고 나갈 수는 없어요. 실수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 알겠죠?”
몰리 부인은 전장에서만큼이나 웨인에서도 엄격한 병원장이었다.
“지겨운 잔소리는 늙은 부인의 노파심 정도로 이해해주세요.”
짧은 농담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졸지 마]
베스는 수첩 귀퉁이에 끄적인 글씨를 딕시에게 내밀었다. 이를 본 딕시는 더 울상이 돼선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참 매정하기 짝이 없는 친구였다.
“그리고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요. 아이네스?”
아, 부인은 잊었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베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베스.”
베스는 얼른 허리를 곧추세웠다.
“오늘 오후에 오시는 후원자께 병원을 안내해 드려요.”
“그분이신가요?”
누군가 호기심에 찬 질문을 던지자,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세요. 제국 병원에 지난 일 년간 아주 혁혁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분.”
제국 병원은 선대 황제와 콜린스 공작의 관계 덕분에 설립될 당시엔 꽤나 큰 지원을 받아왔지만, 호이든이 황제로 즉위하고 난 이후로는 사정이 여의찮았다. 몇 안 되는 귀족가의 후원과 몰리 가의 재산으로 운영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그분이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신 건 처음이라 저도 조금은 긴장되네요.”
그런데, 지난 종전 이후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전과 비교되지 않는 수준의 후원금이 들어왔다.
브리틴 계좌를 통해 들어온 익명의 후원자였기에, 다들 브리틴의 고위 귀족 혹은 우방국 중 하나의 귀족이려니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분은 그저 한번, 자신이 후원한 병원을 돌아보고, 의료진들의 숙소를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보통 아이네스가 이런 일을 했지만, 오늘 티파티가 있다고 했으니….”
부인의 오른팔과 왼팔을 담당하는 베스와 아이네스는 서로의 역할을 도맡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베스가 사교계와는 일절 상관없는 평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스, 그럼 부탁하마.”
부인은 이젠 베스 또한 공주의 티파티 참석자라는 사실은 자신도 모르게 잊은 채였다.
아이네스가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베스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떡해.”
계단을 내려가며 아이네스가 나직이 물었다.
베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 무언가 얘기하려던 베스의 입이 딱 다물리더니, 삽시간에 얼굴이 굳었다.
목소리가….
옅게 숨을 뱉어냈지만, 틀어막힌 목구멍에선 쇳소리만 흘러나왔다.
다행히 아이네스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베스의 일을 위임할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숙소로 오고 난 뒤, 낭독을 하지 않은 탓인가.
베스는 얇은 제 목을 몇 번 주물렀다. 그때, 목구멍을 아슬아슬하게 맴돌기만 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엇.”
“왜 그래, 베스?”
“아니야. 그, 티파티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나오려고. 난 그래도 괜찮잖아.”
“그래도.”
“먼저 간다고 해도 공주님께선 이해해주실 거야.”
베스는 적당히 라프넬을 감싸며 상황을 모면했다.
“먼저 가, 아이네스. 난 창고에서 비품 좀 챙겨갈게.”
태연히 등을 돌린 베스는 천천히 창고로 걸어갔다. 그리곤 창고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귀를 틀어막은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기는 웨인 제국 병원. 나는 베스 제인스.”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말은 모두 의미 없는 소리였다. 둥둥거리는 심장 소리도 듣기 싫어 목구멍에 더 힘을 줘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제겐 목소리가 나온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 중요했으니까.
얼마나 그 짓을 반복했을까.
어느새 등 뒤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하아.”
창문 하나 없는 컴컴한 창고에 숨이 턱턱 막혔다.
아니, 어쩌면 저를 숨 막히게 하는 건 목구멍을 기어 나오는 이 목소리일지도.
자리에서 일어난 베스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땀 때문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떼어내며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베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딕시였다. 잠기운이 어룽져 있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눈을 반짝이면서 작은 봉투 하나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건 라프넬의 티파티 초대장이었다.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딕시는 잔뜩 들뜬 얼굴로 황궁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연신 흔들었다. 봉투 겉면에 적힌 ‘베스 하워드’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봉투에서 짙게 풍기는 장미 향에 베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차트 속에 대충 처박아 두면 내가 발견하지 못할 거 같았어? 나를 여전히 모르네, 베스 제인스. 아, 베스 하워드.”
모른 척 트레이를 챙겨 드는 베스의 곁에 달라붙은 딕시는 연방 쫑알거렸다.
“너 옷도 없잖아. 아이네스는 오전 진료만 보고 집에 간대. 내가 너 대신 오후 진료 봐줄 사람은 이미 정했어. 넌 아무 걱정 없이 오전 일만 보고 숙소로 와. 알겠지?”
베스가 대답이 없자, 딕시는 거의 베스의 어깨에 올라탈 기세로 제 몸을 기울이며 “알겠지?”를 반복했다. 결국엔 질린 베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딕시는 “숙소에서 봐!” 인사를 남기곤 위층으로 사라졌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숙소로 온 베스는 우선 땀에 젖은 몸부터 씻었다. 생각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오늘 후원자가 오는 것은 여러모로 제겐 좋은 일이었다. 티파티에서 이르게 도망칠 수 있는 핑계가 생긴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물론, 제 방에서 온갖 원피스를 들고 오는 딕시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딕시는 이번 봄을, 진즉 맞이했어야 할 작년 종전의 봄이 돌아온 것이라 믿고 있었다.
“헉! 너 이 드레스 뭐야?!”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딕시가 새된 소리로 외쳤다. 딕시의 앞엔 겉면이 벗겨진 낡은 옷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 하늘하늘한 감색 드레스가 걸려들었다.
“…선물이야.”
“누가? 하워드 백작님이? 대체 누가?”
딕시는 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볼 것 없는 옷장에서 유일하게 제 눈을 사로잡는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이거 마담 보뜨네 거잖아. 딱 한 벌만 만들기로 유명한 재단사, 몰라?”
베스는 어설프게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완전 귀족 중의 귀족만 상대하는 작자야. 자기가 무슨 넥서스 황후라도 되는 것처럼 군다니까? 예전에 클리프 부인이 살아계실, 아.”
클리프 부인 얘기에 딕시는 얼른 입을 닫았다.
뭔가 예전 같지 않단 말이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딕시 콜먼이 베스와 데베르 공작의 미묘한 관계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각설하고. 자, 이리 와. 딱 너에게 어울릴만한 것들로만 가지고 왔으니까.”
딕시는 침대에서 베스를 휘휘 치우곤, 그 위에 제가 가져온 원피스 몇 벌을 내려놓았다.
“예전에 해본 경험을 살려, 아주 음전하면서도 공주의 기를 팍 꺾을만한 것들로만 추려왔어. 거기에 데베르 공작님도 오시겠지?”
주홍색 눈동자가 비장하게 빛났다.
* * *
라프넬은 순백의 온실 정원을 돌아봤다. 온 넥서스에 꽃이 만개한 지금, 굳이 온실 정원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라프넬은 이번에도 온실 정원에서 티파티를 하겠노라 선언했다.
진짜보다 더 아름다운 가짜.
라프넬 메이너는 자신과 닮은 이곳을 사랑했으니까.
“공주님, 자리는 어떻게 할까요?”
라프넬은 건네받은 작은 이름표들을 성의 없는 손길로 넘겼다. 그러다 어느 이름 앞에서 라프넬의 눈썹이 미묘하게 들썩였다.
“베스 하워드.”
라프넬은 사뿐한 걸음걸이로 동그란 티테이블 사이사이를 걸어갔다. 기다란 연회 테이블을 썼던 지난 티파티와 달리, 이번엔 소수의 몇 명만이 둘러앉을 수 있는 작은 티테이블이 온실 정원 곳곳에 놓여 있었다.
라프넬은 하얀 등나무가 드리워진 테이블 위에 베스의 이름표를 놓았다.
“그 옆은.”
새하얀 손가락이 매섭게 이름표 몇 개를 제쳤다. 그리곤 그 옆에 눈에 익은 이름 하나를 놓았다.
남은 두 자리에도 차례로 이름표가 놓였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렴.”
던지듯 남은 이름표를 하녀에게 넘긴 라프넬은 조금은 지루한 얼굴로 정원을 벗어났다.
걸음을 내지를 때마다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졌고, 찰랑이는 금발은 곧 부스러질 것처럼 바람에 살랑였다.
라프넬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걸음을 하는 중이었다. 한때는 이 길을 제집으로 가는 길처럼 오간 적도 있었지만….
모두 힘없는 기억일 뿐이었다.
“공주님 오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공주의 방문에 아더의 궁이 바빠졌다. 재빠르게 계단 위로 사라진 시종 몇은 아더에게 공주의 방문을 알리러 갔을 것이다.
라프넬은 기억을 더듬으며 높다란 층계를 올랐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청년의 아더 메이너는 다른 방으로 거처를 옮겼을 가능성이 더 컸지만, 그저 걸음을 놀렸다.
“역시.”
라프넬은 반쯤 열린 문가에 기대섰다.
“넌 한결같이 따분해.”
그곳엔 아더가 서 있었다.
어릴 적과 똑같은 방이었다.
거울 앞에 선 아더는 얇은 보타이를 매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라프넬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긴 오랜만이네.”
그게 인사의 전부였다.
“준비가 빨리 끝나서.”
라프넬 또한 간단하게 변명했다.
아더는 알만하다는 얼굴로 장난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장난에도 라프넬은 무감한 표정으로 삐뚜름한 고개를 벽에 기대고만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보타이를 맨 아더는 협탁 위에 놓인 향수 몇 개를 시향했다. 마음에 차는 게 없는지 이것저것 허공에 뿌리길 반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프넬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오늘 그 아이도 초대했어.”
안개처럼 허공을 부유하던 향이 바닥으로 얌전히 내려앉았다. 너른 방 안에 어지러이 가득 찬 향이 그를 닮아있었다.
아름다운 혼돈. 이는 아더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베스 하워드도 초대했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