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데베르의 집무실엔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짙은 노을빛이 깊숙이 그의 손 언저리까지 뻗쳐 들어왔지만, 차마 그 손끝에 닿지는 못했다. 데베르는 언제나처럼 짙은 어둠 속에 몸을 맡긴 채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혀도 무표정한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선이 뚜렷한 얼굴 곳곳에 가득한 푸르스름한 멍과, 터진 입가에 여전히 들러붙은 피딱지가 그의 인상을 더 음울해 보이게 했다.
한참을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지 않던 데베르는 불현듯 창밖을 쳐다봤다. 어느새 새카맣게 물든 하늘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긴 봄밤의 시작이었다.
서류 더미를 덮은 데베르는 유난히 깊이 팬 눈가를 눌러 내리며 창가로 가 섰다. 멀지 않은 곳에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제국 병원이 보였다.
데베르는 상처 난 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환각인 건가.”
보랏빛 나비 가면. 새카만 눈동자.
데베르는 셔츠 아래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숨긴 목걸이를 빼냈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열쇠가 새하얀 목걸이에 목이 꿰인 채 달랑거리고 있었다.
데베르는 그 꼴이 제 모습과 비슷하다 자조하며 손바닥에 열쇠 모양이 패일 만큼 거세게 목걸이를 쥐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베스가 제 곁에 있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아픔 따윈 없었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수행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공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올라오시라 할까요?”
데베르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셔츠 아래,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만의 공간에 베스를 감췄다.
몇몇 가로등이 사위를 밝히는 웨인은 밤에도 제법 주위가 환했다. 더군다나 곧 있을 데뷔탕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의상실이며, 양장점을 바쁘게 오가는 통에 해가 져도 중심가는 꽤 붐볐다.
클리프가의 군수회사 앞엔 보란 듯이 황궁 인장이 찍힌 자동차가 서 있었다. 그 앞에 다소곳이 선 라프넬은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노란 가로등 아래에 선 라프넬의 얼굴이 작은 달처럼 반짝였다. 곧이어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그녀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데베르.”
“여기까진 어쩐 일로.”
“어쩐 일이 없어도 볼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어 찾아온 걸 알잖아요.”
라프넬의 노골적인 대꾸에도 데베르는 무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넥서스 공주의 방문을 막을 수 있는 귀족은 웨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은 참 칼 같네요.”
라프넬은 가볍게 웃으며 데베르를 올려봤다. 새파란 눈동자에 잔뜩 상처 난 얼굴이 담겼다.
틈 없이 말끔할 때와 달리, 적당히 흐트러지고 망가진 모습조차 어울리는 남자였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순간 가까이 다가오는 라프넬의 손에 데베르가 한걸음 물러났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더가 무도회에서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라프넬은 올라간 붉은 입술 끝에 힘을 준 채, 손가방을 열었다. 이내 내민 것은 작은 연고였다.
“황궁 주치의에게 부탁한 거예요. 당신이…. 병원 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데베르는 깔끔하게 포장된 연고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 어떤 천한 것에도 닿아 보지 않은 것 같은 공주의 새하얀 손안에 담긴 연고가 이질적이었다.
“데베르, 제 손을 무안하게 할 건가요?”
라프넬이 수줍게 웃어 보이자, 기울어진 어깨를 따라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쏟아졌다.
“데베-”
그때였다.
“어머! 부인! 정신 좀 차려봐요! 세상에, 누가 좀 도와줘요!”
외마디 비명에 모두의 고개가 한곳으로 쏠렸다. 데베르와 라프넬의 시선도 그들과 함께였다.
저 멀리, 웅성거리며 몰려든 사람 중 누군가가 “콜린스 공작님을 모셔 와!”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순간, 시커먼 로브를 걸친 인영 하나가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더니, 대뜸 쓰러진 부인 곁에 무릎을 꿇었다.
데베르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베스.”
홀린 듯한 그의 입술 새로 베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텅 빈 잿빛 눈동자가 검은 로브를 쫓았다. 인파 사이로 주저앉은 검은 로브 자락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부인의 호흡을 살피는지 흐늘한 로브 모자가 부인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더니, 곧장 부인의 목을 옥죄는 장식끈을 풀기 시작했다.
“베스.”
데베르는 이젠 미친 이처럼 단 하나의 이름을 읊조렸다.
여자는 이내 옆에 선 소녀에게 손짓했다. 깡총한 단발머리의 소녀는 로브의 시녀인 듯 보였다.
“데베르?”
심상찮은 데베르의 기색에 라프넬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무심함으로 일갈하던 남자의 얼굴에 보란 듯이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귀라도 먹은 것처럼 한 곳만을 지독히 응시하던 데베르의 가슴팍이 로브를 향했다. 그 순간, 걸음을 떼려던 데베르의 발이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보였다. 어렴풋한 가로등 불빛에 로브 밑자락에 드러난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이. 그리고 가까운 곳에 선 소녀가 잽싸게 인파를 뚫고 뛰쳐나가는 것이.
말을 한다고.
단 한 번도 가정해보지 않은 그 질문이 데베르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베스 제인스가 말을 한다고.
작은 입술은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을 향해 움찔거렸다. 거기서 무슨 소리라도 나온 것인지, 사람들이 그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명령을 따라 이리저리 흩어졌다.
데베르는 멀거니 그 모든 모습을 지켜봤다. 좁혀들 것 같던 거리는 다시금 벌어졌다.
“가져왔어요!”
어디선가 소녀가 손에 든 병을 흔들며 나타났다. 찰랑이는 노란 액체가 담긴 병을 받아든 여자가 급하게 마개를 뜯으려 했지만, 밀봉된 입구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주위 장정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곧바로 주위에 널브러진 날카로운 돌부리 하나를 들어 거세게 병 입구를 내리쳤다. 그리곤 발목을 덮을 만큼 기다란 로브 자락을 죽 찢어냈다.
잘라낸 로브를 거름망 삼아 부인의 입에 가져간 후, 조심스럽게 주스를 따랐다. 행여 부인의 기도를 막을세라 목구멍을 살짝 주무르는 손길이 능숙했다.
“어머, 아가씨! 피가!”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뚝뚝 떨어지는 붉은 선혈이 선명했다. 어둠에 이골이 난 데베르의 눈이 피와 주스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어? 깼다, 깼어!”
“세상에, 부인! 저 로렌스 부인이에요. 제 말 들리세요?”
쓰러진 부인은 몇 번 몸을 바르작거리더니 눈을 껌뻑거렸다.
“이 아가씨가 부인을 구해, 엇, 아가씨!”
모자를 깊이 눌러쓴 여자는 부인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인파를 뚫은 여자는 데베르의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주스 병을 들고 나타났던 소녀도 함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자동차 앞에 대기하던 운전사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뛰어오는 여자에 맞춰 뒷좌석을 열었다. 차에 타는 모양새 하며, 시중을 드는 주위까지.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양새였다.
데베르는 멀어지는 차를 오래도록 지켜봤다.
그게 베스 제인스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 * *
데베르와 아더의 추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사교회 등장에 대한 관심을 더 끌어모았다.
“클리프가와 천박한 소문은 한 몸 아니었나요? 그 정도로 무너질 가문이었으면 진즉에 멸문했을 텐데요.”
집사 올리버가 조심스레 공작에 대한 소문과 회사의 안녕을 걱정하자, 데베르는 가볍게 대꾸했다.
“선대부터 계셨으니 익히 아실 줄 알았는데.”
선대 카시우스 공작을 들먹이자, 집사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지독하게도 가십과 추문에 휩싸인 채로 부와 명예를 누린 가문이 클리프 가였으니 할 말이 없기도 했다.
데베르는 무도회 이후 제 몸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기세로 일에만 파묻혀 지냈고,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은밀히 그를 찾아오는 밀매꾼의 방문 또한 점차 잦아졌다.
밤이 깊어지고 침실의 문이 잠기고 나면 쿵쿵거리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밑의 층까지 울렸지만, 데베르는 그 누구의 시중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완벽한 공작의 모습으로 회사를 향했다.
“오늘 밤입니다.”
서무 책상 위로 황가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이 놓였다. 데베르는 초대장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보던 서류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위로 얇은 종이 한 장이 더 놓였다. 그제야 데베르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젠 소식지가 나보다 빠르다니.”
소식지엔 데베르 공작이 공식적인 사교 시즌 첫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얘기가 실려 있었다.
“기대하세요.”
데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모시는 가주가 소문대로 정말 미친놈인지 아닌지가 결론 나는 날이니까요.”
서재를 나서던 데베르는 활짝 열린 창밖을 바라봤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클리프 저택은 환영 속의 나비 가면을 닮아있었다.
“저도 궁금하네요. 제가 미친 건지, 아닌지.”
컴컴하던 가면무도회와 달리 오늘 밤의 연회장은 세상의 모든 빛은 다 끌어다 쓴 것처럼 환했다. 천장 가득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샹들리에는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살랑였고, 곳곳에서는 향긋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가면 아래 숨어 은밀히 서로를 탐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모두 명망 있는 귀족 흉내를 내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데베르 공작님께서도 역시 오셨군요!”
“데베르! 여기로 와!”
연회장 이 층에 모인 사내들이 데베르를 반갑게 불렀다. 그 가운데엔 눈에 익은 금발 또한 섞여 있었다.
“꼴이 봐줄 만하다.”
“너도.”
아더의 퉁명스런 인사에 데베르도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지독한 새끼. 친구를 적군 때려잡듯이 패고.”
“한때 아군이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군 게 누구였더라.”
데베르는 여상한 얼굴로 위스키병을 기울였다.
둘 다 보기 좋게 상처의 잔흔을 달고 등장한 모습이었다. 아더에게 무자비하게 맞은 데베르의 입가엔 아직 아물지 않은 피딱지가 붙어 있었고, 데베르에게 우악스럽게 졸린 아더의 목에도 여태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더는 제 잔을 데베르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화해주야.”
데베르는 고개를 까딱하곤 위스키잔을 털어 넣었다.
난간에 나란히 팔을 걸친 둘은 짝짝이 어우러진 인영들을 내려다봤다.
둘 다 말없이 작은 머리통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곡의 분위기가 바뀌고, 젊은 남녀들이 몇 번씩 파트너를 바꿀 때까지도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느새 몇 병이나 비워진 술병이 협탁 위에 그득해질 때까지도 데베르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누구 찾는 사람 있어?”
아더의 물음에도 데베르는 집요한 시선으로 무르익어가는 무도회를 방관하기만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떨어지는 약 기운과 상반되는 술기운이 데베르를 덮쳤다.
“빌어먹을.”
다문 잇새로 욕을 짓씹으며, 데베르는 열기 오른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어지럽게 일렁이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난간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형형하게 솟아난 힘줄만큼이나 선명하게 선 눈의 핏대도 함께 달아올랐다. 흘러나오는 음악조차도 제 토악질을 부추기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
마침내 마지막 곡을 알리는 선율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데베르는 기둥에 기대선 몸을 곧추세웠다.
참을 수 없는 조소가 새 나왔다.
“결국 내가 미친 거군.”
데베르는 목숨줄이라도 되는 듯 붙잡고 있던 난간에서 손을 뗐다.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 손을 올려 가슴팍을 매만졌지만, 진즉 차 안에서 죄다 털어 넣은 약이 있을 리 없었다.
“젠장.”
연거푸 들이키는 샷 잔에 데베르의 고개가 난간 아래로 푹 꺾였다.
그때, 마지막 데뷔탕트 영애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오케스트라 선율을 멈췄다. 설핏 들려오는 이름에 데베르는 일소를 터뜨렸다.
미친 새끼. 단단히 홀렸구나.
“하워드 가의 베스 하워드 양이 입장하십니다.”
베스.
그건, 끈적한 환영처럼 제게 들러붙은 이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