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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75화 (75/206)

75화

“데베르!”

이젠 제법 커진 라프넬의 목소리는 아랑곳없이 데베르는 춤추는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불청객의 등장에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던 이들도, 방해꾼이 데베르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합 다물었다.

데베르는 뻐근한 목덜미를 느릿하게 돌리며 입구로 다가갔다. 오직 저를 향한 길잡이별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보랏빛이 선연하기만 했다.

그때와 똑같은 보라색 나비.

환영이 아니었다.

“어머, 저기 좀 봐요.”

“누구한테 가는 거예요?”

“설마 공주를 두고 다른 파트너와 춤이라도 추려는 걸까요?”

춤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움직임을 멈춘 채, 한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회장의 정중앙에서 영애 한 명의 파트너가 되어주고 있던 아더의 시선 또한 데베르를 향했다. 거대한 연회장을 가득 채우는 오케스트라 선율 사이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더는 파트너에게 양해를 구하곤 빠른 걸음으로 데베르에게 다가갔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그건 그저, 오랜 시간을 데베르 곁에서 보낸 친우만이 가질 수 있는 직감이었다.

“데베르!”

멀리서 아더가 불렀지만, 데베르는 돌아보지 않았다. 데베르의 시선이 향한 곳을 급히 둘러봤지만, 가득한 인파 속 누구를 보고 있는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위까지 어둑한 탓에 먼발치에서 보이는 거라곤, 여인들을 치장한 보석이 간헐적으로 램프 불빛에 반사되는 것뿐이었다.

데베르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내지르는 기세가 흉흉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턱이 불거졌다. 닿을 듯 말 듯 눈앞을 어지럽히던 보라색 나비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머!”

“세상에!”

귀부인들이 한데 모여있는 자리까지 헤집고 지나가는 데베르에, 부인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잠시간의 소란을 틈타 나비가 휙 연회장 문밖으로 사라졌다. 복도 오른쪽으로 사라지는 드레스 자락이 데베르의 눈에 길게 밟혔다.

“제길!”

곧장 뛰쳐나가려는 데베르의 어깨를 누군가 거칠게 돌려세웠다.

“데베르 클리프!”

아더였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아더의 노성에 삽시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갑자기 멈춘 손님들의 눈치를 보던 오케스트라도 슬며시 연주를 멈췄다.

들려오는 거라곤 사람들이 나직하게 수군거리는 소리와 아더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비켜.”

“데베르…!”

황궁 복도로 향하는 데베르의 앞을 아더가 다시 막아섰다. 그곳은 후원으로 향하는 복도였다. 데베르 클리프가 취해 쓰러졌던.

“데베르. 보는 눈이 많아.”

아더는 데베르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검은 가면 속의 잿빛 눈동자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 나간 이처럼 재차 후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를 증명했다.

“클리프 공작.”

다시 한번 데베르를 막아서자, 그제야 그의 눈이 눈앞의 황자를 향했다. 퀭한 눈동자가 어지럽게 일렁였다.

“아더 메이너.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읊조리는 목소리에 실린 분노가 선연했다.

“정신 차리라는 뜻이야.”

아더는 침착하게 덧붙였다.

“정신을 차리라고….”

아더의 말을 되뇌는 데베르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건 분명한 조소였다.

데베르는 제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었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색 나비 가면이 툭 떨어졌다. 아더의 시선이 잠시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향했다.

더없이 깔끔한 얼굴의 클리프 공작이 제국의 황자를 내려다봤다.

“누누이 말했을 텐데, 아더 메이너. 건방 떨지 말라고.”

고압적인 일침에 가면에 가려진 아더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은 전시가 아니야, 클리프 공작. 예를 지켜.”

아더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그 여자는 여기에 없어.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면 그 망상부터 때려치워.”

아더는 기어코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 여자가 네 곁으로 돌아올 거라는, 윽!”

순식간에 멱살이 잡힌 아더가 벽으로 처박혔다. 그의 판판한 등에 부딪힌 램프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아더의 손바닥에 유리 파편이 잘게 파고들었다.

데베르는 무자비하게 아더의 옷깃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우악스러운 힘에 아더는 속절없이 데베르를 마주 봤다.

“너 미쳤어?!”

“더 지껄여봐.”

흥분감이 맴돌던 조금 전과 달리, 데베르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다시피 내가 미쳤잖아?”

벌겋게 달아오른 아더의 귓가에 대고 데베르가 낮게 일렀다.

“내가 열여덟부터 미쳐버린 새끼라는 건 네가 곁에서 봐서 알 테지. 그런데 왜, 굳이 날 정신 못 차리게 해 안달이야.”

데베르가 슬쩍 미소를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싼 무리를 훑어보고는 시선을 내리떴다. 무리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황제의 미친개 노릇을 할 땐 쓸만하다가, 이젠 미친 짐승 새끼는 싫다 이건가.”

데베르는 정말 고민하는 듯 제 입가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님, 적어도 공주를 개하고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남매로서의 책임감인가.”

“이 미친 새끼가!”

더 이상 참지 못한 아더가 주먹을 내질렀다. 데베르는 기꺼이 그 주먹질을 받아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반항하는 기색 없이 아더의 주먹질을 받아냈다.

퍽퍽 내리꽂히는 둔탁음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감히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라프넬은 무리의 가장 앞에서 질색한 얼굴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보초병들이 공주가 일별이라도 주면 바로 달려나갈 기세로 흘긋거렸지만, 라프넬은 그저 고운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꼴사나운 광경을 구경하기만 했다.

미친 새끼들. 라프넬은 멸시를 가득 담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위가 어둑한 가면무도회에서 이 난리가 난 게 차라리 다행이려나.

“윽!”

그 순간 들린 아더의 신음에 라프넬은 내리깐 시선을 들었다.

그새 상황은 역전됐다. 아더의 목덜미를 쥔 데베르의 손아귀 힘줄이 불거지는 게 보였다.

라프넬은 그제야 근처에 선 보초병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치껏 명령을 알아들은 보초병들이 얼른 뒤엉킨 둘에게로 다가갔다.

“컥…!”

어느새 아더의 가면 또한 바닥에 널브러진 지 오래였다.

“물러서.”

데베르는 보초병이 제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도 입가에 맺힌 피가 선명했다.

혈기로 붉게 물든 눈을 한 데베르는 미처 가지 못한 길을 다시 내딛기 시작했다.

후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의 뒤로 아더의 거친 숨소리와 아연실색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지만, 데베르는 개의치 않았다.

* * *

“데베르가 단단히 미쳤더구나.”

호이든의 손에서 소식지가 떨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황제의 부름을 받은 라프넬은 죽은 듯한 모양새로 그의 맞은편 식탁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접시 위로 싱그러운 과일이 물기도 마르지 않은 채 올려졌지만, 라프넬의 손은 제 무릎 위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왜 말이 없니. 너도 그 꼴을 목도했을 텐데.”

어제 그 난리가 있고서 이른 새벽부터 도착한 황제의 전갈에 알만하다 싶긴 했지만, 설마 단둘일 줄이야.

라프넬은 부러 수척한 모습으로 치장했지만, 그런 눈속임에 속을 호이든이 아니었다.

“직접 데베르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수고까지 했거늘, 쯧.”

라프넬은 입술을 짓씹었다.

나약한 새끼. 데베르에겐 행여 군수 물자 계약이 어그러질까 찍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힘없는 이복동생만 물고 늘어지는 꼴이라니.

당장이라도 호이든의 머리통을 내리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 내리며 라프넬은 애꿎은 제 입안만 씹어댔다.

“아둔한 것들. 황가의 평판은 어찌하려고 사교회의 시작부터 싸움질이라니.”

호이든은 상스럽게 나이프를 놀렸다. 칼날과 접시가 끼긱거리며 부딪히는 소리에 라프넬의 콧잔등이 찡긋했다.

그 순간, 듣기 싫던 커트러리 소리가 멎었다.

“왜 그러니, 라프넬. 너도 이 자리가 불편한 거니?”

“아니에요.”

“그럼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호이든은 발작하듯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흔들린 와인잔이 맥없이 식탁 위로 쓰러졌다. 라프넬은 붉게 물드는 식탁보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고작 그 미친 새끼 하나 입안의 사탕처럼 굴리지 못하다니! 아더도, 너도 말이야!”

호이든은 입을 닦은 냅킨을 라프넬을 향해 집어 던졌다. 라프넬은 얼룩진 냅킨을 바라보다, 멀찍이 선 시종에게 손짓했다.

“내가 천박한 너희들을 내 형제라 인정하며, 황가에 발붙이고 살게 한 이유는 단 하나야. 도움이 되라고.”

시종이 다가와 새로운 잔에 와인을 채웠다.

“적어도 황가의 칭호를 받고 싶다면, 황제의 권위에 도움이라도 되라고!”

호이든은 잔이 채워지자마자 단번에 비워냈다. 독한 알코올 기운에 인상을 찌푸린 그는 불현듯 부드럽게 라프넬을 다독였다.

“아더는 지난날 제 몫을 해냈어. 나 대신 전장을 뒹굴어줬지. 그럼 너도 무언가 해야 하지 않겠니?”

라프넬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멍청한 아더라도 이곳에 함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았을까. 쓸데없는 가정을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무슨 말 하시는지 알아요.”

“알겠지. 넌 똑똑하니까. 네 어미와는 달리.”

어미라는 말에 무표정하던 라프넬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라프넬은 이젠 척척하게 와인으로 물든 식탁보를 호이든의 목덜미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봤다.

“곧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려요. 그 무도회가 공식적인 사교 시즌의 서막이란 건 아시겠죠.”

분에 찬 라프넬의 손가락이 식탁 밑의 치맛자락을 우악스럽게 쥐어뜯었다. 핏기라곤 없을 만큼 새하얗게 힘주어 쥔 손등이 가늘게 떨렸다.

옅은 아마빛 속눈썹이 몇 번인가 허공 위에서 깜빡이더니, 이내 호이든을 돌아봤다.

“데베르에게 다시 한번 초대장을 보내주세요. 황제의 권위를 앞세워서.”

데뷔탕트 무도회를 시작으로 웨인 곳곳에 청혼서가 돌기 시작할 것이다.

이번엔 기어코 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호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이복동생을 시험하는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뜩였다.

그 뱀 같은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라프넬은 끊어내듯이 말을 뱉었다.

“바라시는 걸, 해내죠.”

곧 해사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아시다시피 전, 제 어미에게 좋은 것을 물려받았지만 멍청한 것은 닮지 않았으니까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호이든의 얼굴에 얼핏 기대감 같은 게 스쳤다.

“마지막으로 믿어보지.”

은밀한 거래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맑은 아침 햇살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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